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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 아찔하게 흐르는-78화 (78/100)

78화

빠르게 내달린 말은 다행히 인정을 넘기기 직전에 결의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성조가 단이를 담장 너머로 넘겨주기 무섭게 통행금지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기 시작하였다.

둥- 둥.

야반의 어둠 속으로 인경이 우는 소리가 낮고도 묵직하게 울려 퍼졌다.

이 시간대에 함부로 밖을 돌아다녔다간 순라군에게 잡혀 곤장을 맞게 되는 터라.

언제 순라군의 조족등이 이곳을 밝힐지 모른다는 생각에 단이가 다급히 손짓을 하였다.

“나리, 시간이 많이 늦었으니 차라리 안으로 들어오시어요!”

“주인 없는 집에 어찌 함부로 발을 들일 수 있겠느냐.”

“지금 가시다간 순라군에게 잡히실 수도 있습니다.”

“괜찮다. 순라군이 이곳까지 오는 것보다 내가 집에 도착하는 것이 더 빠를 터이니.”

“하오나…….”

“너는 결에게 오늘 일을 알리지나 말거라. 뒤늦게 좀 무서워지려 하고 있으니까.”

저 고집을 누가 꺾을까.

단이는 걱정되는 마음에 한숨을 폭 내쉬면서도, 행여 가는 발이 묶일까 얼른 가시라며 손을 내저었다.

그런데 당장 출발해도 부족한 시간에 성조는 고삐를 단단히 쥐면서도 움직이지를 않았다.

한 시가 급한데 어찌 이리 미적거리시나.

걱정스럽게 보는 단이를 향해 성조가 나지막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단이야.”

언제나 다동, 다동 하시던 분이 난데없이 이름을 부르시니 괜스레 기분이 이상하였다.

벗끼리는 닮는다더니.

고작 이름 하나 부르는 것으로 사람 기분을 싱숭생숭하게 만드는 것조차 두 분이 꼭 같다.

하여 가만히 다음 말을 기다리니, 돌아온 것은 더욱 이해할 수 없는 물음이었다.

“내가 언젠가 너에게 큰 잘못을 하거든, 그때 나를 용서해 줄 수 있겠느냐.”

잘못을 하고 용서를 비는 것은 보았어도, 미리 용서부터 구하고 잘못을 예고하는 것은 처음 본다.

무슨 이런 해괴한 사과법이 있단 말인가.

또 무슨 장난을 치려고?

단이는 부러 장난스럽게 눈을 좁히며 시치미를 떼었다.

“이제까지 하신 것만 해도 잘못하신 것이 너무 많아 무엇을 용서해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일단 밤중에 저를 끌고 나가신 것부터 용서해 드려야 할까요?”

“오늘 일은 후회하지 않으니, 이건 잘못을 빌지 않을 것이다.”

“하면 무엇을 용서하란 말씀이시어요?”

성조는 대답 대신 잠시간 말없이 단이의 눈을 바라보기만 하였다.

아까 이곳에서 보았던 그 슬픈 얼굴이 다시금 떠올랐다.

차마 해소할 길이 없어 어찌할 줄 모르고 꾹꾹 억누르기만 하던 그 슬픔이.

“무엇이 되었든…… 너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는 것 딱 한 가지만.”

대체 어떤 길을 가려는 것이기에 용서부터 비는 것일까.

가늠조차 할 수 없어 단이는 선뜻 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침묵을 부담이나 거절로 해석한 것일까.

이내 고개를 내저은 성조는 애써 웃음으로 어색해진 분위기를 무마하려 하였다.

“강요하는 것은 아니니 그냥 네 하고픈 대로 하거라. 원망하고 싶으면 원망을 하고, 저주를 하고 싶으면 저주를 하고.”

“…….”

“이제 진짜 가야겠다. 잘 자라, 다동.”

성조가 도망치듯 말 머리를 돌려 떠나던 그때.

“용서해 드릴게요!”

단이가 그의 등에 대고 외쳤다.

“대신 나리께서도 용서해 주세요.”

“……무엇을?”

돌아보는 성조를 향해 단이는 진심을 담아 말하였다.

“나리 스스로를요.”

내내 가면처럼 성조의 얼굴에 덧씌워져 있던 미소가 단숨에 사라졌다.

단이에게 용서를 받는 조건이 스스로를 용서하라는 것이라니.

무엇을 알고서 하는 말인가.

아니면 그저 떠오르는 대로 내뱉은 말인가.

무엇이 되었든 참으로 거대한 파동을 일으키는 말이었다.

‘아…… 너는 정말.’성조는 또 한 번 뻐근하리만치 가슴에 차오르는 감정을 느끼며 고삐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네게 손을 뻗을 것 같아서.

과거든 진실이든 전부 뒤로하고 함께 도망가자 할 것 같아서.

싫다고 뿌리치는 널 안을 것만 같아서.

그러면 안 되는 걸, 너무도 잘 알아서.

“……용서받긴 글렀구나.”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것이 섞여든 한탄을 짧게 흘린 성조가 단이를 향해 마지막으로 환히 웃었다.

“결에겐 비밀, 잊지 말고.”

입가에 길게 검지를 갖다 붙인 그가 비로소 등을 돌리며 작별을 고하였다.

“잘 지내라, 다동.”

꼭 두 번 다시 보지 않으려는 것처럼.

뒤늦게 그를 부르려 하였으나 성조는 눈 깜짝할 사이에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단이는 이상하게 먹먹해지는 가슴을 손으로 꾹 눌렀다.

“대체 무슨 마음을 지니고 계신 것이어요…….”

무엇을 하시려고. 어찌하시려고.

얼마나 더…… 스스로를 나락으로 끌고 가시려고.

***

며칠 후.

“도련님께서는 아직 퇴청하지 않으셨습니다요.”

“관청에도 없다 하던데.”

“글쎄요. 또 어디를 들렀다 오시는 건지……. 아무튼 집에는 안 계십니다.”

청지기가 곤란한 얼굴로 어색하게 웃으며 허리를 굽실거렸다.

결의 차가운 눈동자가 열린 대문 너머를 훑자 난색이 더욱 짙어지는 듯했다.

정말로 없는 것인지.

아니면 없다고 전하라 명한 것인지.

“……돌아오거든 내가 찾았다고 전해주게.”

“예, 그러겠습니다.”

결은 더 묻지 않고 이만 발길을 돌렸다.

요 근래 집으로든 관청으로든 먼저 성조를 찾아갔으나, 그때마다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았다.

자리에 없다. 혹은 일이 바빠 나올 수가 없다.

처음엔 그저 길이 엇갈렸나 생각하였지만, 같은 상황이 반복되니 그 뜻을 모를 수가 없었다.

피하려는 마음이 분명하다는 것.

성조에게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만남을 강요하진 않았으나, 찾아가는 것 또한 멈추지 않았다.

지금은 문전박대를 당하더라도 계속 찾아가는 것만이 성조의 마음을 두드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므로.

그렇게 며칠이 흘렀을까.

늦은 저녁, 집으로 찾아간 길에서 드디어 성조를 만날 수 있었다.

마치 결이 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 그는 집으로 향하는 길목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매번 같은 날 같은 시에 찾아온다는 걸 알고서 나온 듯하였다.

“그러잖아도 오늘 찾아오지 않으면 내가 가려 했는데. 다행히 왔네.”

며칠 퇴짜를 놓은 것은 기억도 안 나는지 태연하게 맞이하는 모습이었다.

순간 맥이 풀려 허망하기도 했지만, 마침내 한 걸음 나아간 기분이었다.

결은 그런 성조를 탓하는 대신 말없이 앞장서라 고갯짓만 하였다.

방 안으로 간단한 술상이 들어왔다.

행랑어멈은 정회가 돌아오면 조용히 알리겠다 말하곤 문을 닫아주었다.

그때까지 성조만 말없이 응시하던 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은 바쁜 일이 없었나 보군.”

“나도 한 번쯤은 자네를 애태워야 공평하지 않은가.”

장난기 어린 실소를 흘린 성조가 술병을 집어 결의 잔을 채워주었다.

“어때. 내가 조금은 그리웠는가?”

“……헛소리.”

미간을 좁힌 결이 술병을 받아들어 성조의 잔에 술을 따랐다.

두 사람은 서로 잔도 부딪치지 않고 술을 비웠다.

잔을 내려놓은 성조는 빙빙 돌려서 말하는 대신 본론부터 꺼내었다.

“해명을 위해서 온 것이라면, 하지 말게. 뭐…… 딱히 내게 해명할 것도 없겠다만.”

결 역시 잔을 내려놓고 성조를 마주 보았다.

굳이 자세히 말을 듣지 않아도 그날 소다옥에서 단이와 나눴던 대화를 뜻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비꼬는 것인가. 아니면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는 것인가.

그 뜻을 알기 위해 말없이 쳐다만 보고 있으니 성조가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내가 김칫국부터 들이켠 건가?”

“말과 표정이 그리 일치하는 것 같진 않아서.”

“속이 좁아서 그런 건데.”

능글맞게 말아 올리는 입술 끝이 평소의 성조와 다름이 없었다.

아까부터 은근슬쩍 작정하고 속을 긁으려는 태도에 결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화를 내라.”

“뭐를 핑계로 화를 내란 말인가?”

“단이, 왜 미리 말하지 않았냐고.”

그때까지 그린 듯 호선을 유지하던 입꼬리가 천천히 밑으로 내려왔다.

더 이상은 억지로 참지 못하겠는지, 성조는 헛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것을 내쉬며 자신의 잔을 채웠다.

자작으로 잔을 비운 그는 탁 소리 나게 잔을 내려놓고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화내면.”

허공을 배회하던 눈동자가 결에게 향했다.

“단이를 내게 보내줄 건가?”

미소가 사라진 성조의 얼굴은 한없이 차가웠다.

온정 하나 남기지 않은 채, 속마음을 깊이 꿰뚫듯이.

혹은 돌아올 답을 이미 알아 허무하다는 듯이.

말로 듣지 않아도 결의 눈빛이, 표정이, 그가 풍기는 분위기가 벌써 모든 답을 알려주고 있었다.

사실 듣지 않아도 이미 알 수밖에 없는 답이었지만.

그럼에도 이 지독한 마음을 해소할 길이 없는 이유는 사랑일까.

아니면 미련일까.

단이를 포기해야만 하는 이 빌어먹을 상황이 처음으로 죽도록 원망스러웠다.

지그시 눈을 감아 터질 것 같은 감정을 억누른 성조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도 오래 고민한 끝에, 그는 서탁 아래에서 서책 하나를 꺼내 상 위에 올렸다.

그러곤 품속에 지니고 있던 것을 꺼내어 그 위에 함께 놓았다.

한쪽 면이 찢긴 듯한 반쪽짜리 종이.

그 위에 아무렇게나 칠해진 옅은 먹물.

중구난방 배열된 글자들, 어지러이 접은 흔적.

“포기하겠네. 내 앞길, 내 가문, 나의 미래까지 모두.”

바로 단이가 갖고 있던 대나무 통의 밀서, 그것의 나머지 반쪽이었다.

“그러니…… 단이만 내게 양보해 주면 안 되겠는가.”

밀서의 반쪽보다 더 머릿속을 뒤흔든 성조의 말에 결이 굳은 얼굴로 그를 보았다.

그저 평소처럼 농담으로 던진 말이라기엔 목소리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지금 마주한 저 시선의 무게만큼.

보는 사람의 가슴이 다 무너질 만큼 애처로운 그 시선에 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무거운 적막이 흘렀다.

찰나 같기도, 혹은 영원 같기도 한 시간이 흐른 후.

“자네 표정을 보아하니 정말 적잖이 당황했나 보군!”

성조는 언제 그런 말 같잖은 소리를 했냐는 듯 푸스스 웃음을 흘렸다.

“농일세, 농. 내가 아무리 호색한이라도 임자 있는 여인은 안 건드리지. 둘째로 밀려나는 건 싫거든.”

호쾌하게 터져 나오는 웃음에도 결은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성조가 아무리 너스레를 떤다 한들, 그가 조금 전 내비쳤던 짙은 감정까지 전부 덮지는 못한 까닭이었다.

한참을 혼자 웃던 성조는 제풀에 지쳐 여운처럼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는 어두워진 결의 얼굴을 보고서 또 한 번 피식 힘없는 웃음을 흘렸다.

“그런 표정 짓지 말게. 오늘 밤은 이렇게 미친 척이라도 해야 버틸 수 있을 것 같으니.”

그는 남은 술을 각각의 잔에 따르고서 또 한 번 홀로 술잔을 비웠다.

그러곤 회합록과 종이를 조금 더 결 쪽으로 밀었다.

“아버지의 비밀 서장에서 찾아낸 것이네. 내 가문을 포기하겠다는 말은 진심이니 사양치 말고 받아. 이것들은 이제 자네 것이야.”

“……다른 방법은 없는 것이냐.”

“자네가 하지 못한다면 내가 할 것이네.”

성조는 싱긋 웃으며 결을 보았다.

입꼬리를 올리고 있으나 차라리 안 웃느니만 못한 웃음.

결은 저 웃음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자네가 하더라도, 나 또한 해야 해.”

성조가 스스로를 버리려 할 때 짓는 웃음이었다.

그는 지금 자신의 손으로 직접 제 가문의 과오를, 아버지의 허물을 세상에 밝히려 하는 것이었다.

멸문을 당할 수밖에 없는 그 길에 오르기 위하여.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설령 목숨을 거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이들의 부모께서 내 아버지 때문에 돌아가셨네. 그리고 그 사실을 내가 알게 되었지.”

“…….”

“나는 이제 결코 그 죄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될 걸세.”

차마 울지 못해 미소를 그린 눈동자가 붉은 기운을 품었다.

붉은 기운은 차츰 미소를 잡아먹어 종국엔 두 눈을 잠식하였다.

“도착하는 곳은 결국 같을 것이나…… 지금은 우리가 잠시 다른 길을 걸어야 할 때인 듯하네.”

뒤틀린 미소 위로 굵은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그러니 서결.”

내 평생을 다하여 가장 사랑하는 벗아.

더 이상 미소 지을 여력도 없어진 성조의 얼굴이 애처롭게 일그러졌다.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흐느낌이 처절하게 흘러나왔다.

“네가 이 빌어먹을 연 좀 끊어주라. ……제발.”

벼랑 끝에 선 성조가 모든 것을 내걸고 하는 부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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