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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 아찔하게 흐르는-79화 (79/100)

79화

소다옥의 선반을 정리하던 단이는 문득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소다옥으로 오는 사람들일까 싶어서였다.

하나 단순히 지나가는 군사들의 기척이었는지 소리는 곧 빠르게 멀어져 갔다.

길게 숨을 내쉰 단이는 내려놓았던 차제구를 마저 올려놓았다.

날이 부쩍 더 추워져서 그런가.

오늘따라 결이 차를 마시고 떠난 뒤 찾아온 적막이 유독 쓸쓸하게 느껴졌다.

이전에도 결이 퇴청하기 전까지는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내곤 했거늘.

아무래도 그간 너무 많은 일이 있던 탓에 어제 같은 오늘, 오늘 같은 내일이 새삼 낯설어진 모양이다.

함께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던 선정도 없고, 온갖 장난과 농담으로 정신을 쏙 빼놓던 성조도 보이지 않는 까닭에 더 그런 듯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성조 나리께서 통 찾아오시질 않으시네……. 많이 바쁘신가?”

하루가 멀다 하고 소다옥에 발 도장을 찍으시던 분이었건만.

요 근래엔 소다옥에 찾아오기는커녕 아무 소식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것이 딱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매일같이 찾아와 놀리려 들 땐 그렇게 성가신 것이 없더니, 막상 성조가 오지 않자 이리 허전한 것을 보면.

그간 이런저런 일을 함께 겪으며 실로 많은 의지가 되었기에 그의 빈자리가 더욱 크게 느껴지는 것이리라.

결에게 슬며시 성조의 근황에 대해 물어 보아도 돌아오는 답은 많이 바쁜가 보다, 하는 형식적인 대답뿐이었다.

무엇보다 진위가 일부 군사들을 데리고 시찰이란 것을 나간 뒤로 결 역시 전보다 일이 부쩍 많아진 터라.

그저 벗이 바쁜 것을 알고 방해를 하지 않는 것이겠거니, 그리 생각할 뿐이었다.

할 일을 마친 단이는 소다옥 문을 열고 잠시 볕을 쬐러 나왔다.

군사들이 병서를 습독하는 시간인지 훈련원 마당이 텅 비어 있었다.

아득히 먼 곳에서 글을 읽는 평온하고 단조로운 목소리가 바람결에 들려올 뿐이었다.

참으로 조용하고도 고요한 시간.

단이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보며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폐부를 가득 채운 시린 공기를 단숨에 내쉬니 잠시마나 찌뿌드드하였던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그래. 차라리 이렇게 매일이 고요하였으면.

이 평화가 우리의 매일을 감싸 안았으면.

그리 소원을 빌고 있던 그때.

“……어?”

문득 고개를 내린 시선 끝, 익숙한 얼굴이 단이의 시야에 들어왔다.

너무 멀어서 자세히 보진 못했으나 청포 관복에 호리호리한 체형이 분명 성조의 것이었다.

이쪽을 보고 있던 그는 단이와 시선을 마주치기 직전에 발길을 돌려 다시 멀어졌다.

“성조 나리!”

단이가 큰 소리로 외쳐 불렀으나 그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부르는 것을 행여 듣지 못하셨는가.

황급히 그의 뒤를 쫓았으나 훈련원 입구에는 아무도 없었다.

“내가 잘못 봤나? 분명 성조 나리셨던 것 같은데…….”

고개를 갸웃거리던 단이는 연신 훈련원 입구를 보면서도 다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소다옥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여전히 가슴속에 커다란 바위 하나가 들어앉은 것처럼 답답했다.

“물어보고 싶었는데……. 그날 하셨던 말씀, 도대체 무슨 뜻이었냐고.”

이토록 성조가 신경이 쓰이는 이유는 역시나 그가 남긴 말들 때문이었다.

미리 용서를 구한다느니, 잘 지내라느니.

꼭 무슨 큰일이라도 벌이고 떠나려는 사람처럼 군 탓에 괜스레 마음이 쓰였다.

지금이라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시끌벅적하게 나타나면 좋으련만.

단이의 바람을 외면하듯 성조는 오늘도 퇴청 시간이 다가오도록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심란한 마음에 눈에 안 들어오는 책장만 의미 없이 넘기던 와중.

무심코 든 시선 너머, 언제 온 것인지 결이 문설주에 기댄 채 가만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 탓에 그가 온 줄도 모르고 있었다.

“나리!”

단이는 복잡하게 얽힌 생각들을 잠시 내려두고 그에게 다가가 품에 안겼다.

등을 감싸는 손길에 먹구름 낀 듯 내내 우중충하였던 마음이 햇살 비춘 듯 조금씩 개기 시작하였다.

“별일 없었느냐.”

“예,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한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누가 들어오는 줄도 모르고 넋을 잃고 있었느냐.”

“그냥, 이런저런 생각을 좀…….”

단이는 어색하게 웃으며 얼버무리다가, 이내 머뭇거리는 눈으로 결을 올려다보았다.

그날 일은 꼭 비밀로 해달라던 성조의 부탁 때문에 함부로 그 일을 말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대로 두자니 마음이 영 찜찜하고.

‘그래도 살짝 귀띔이라도 해드려야 하지 않을까.’나리의 절친한 벗께서 자꾸 이상한 생각을 하시는 것만 같다고.

아무래도 성조 나리께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다고.

잠시간 고민하던 단이가 입을 열었다.

“사실…… 아까 훈련원 입구 쪽에서 성조 나리를 보았어요.”

그 말에 결의 표정 위로 언뜻 묘한 감정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당혹 같기도 하였고, 혹은 경계 같기도 하였다.

기분 탓일까.

단이는 결의 안색을 유심히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어쩐지 낯빛이 무척이나 안 좋아 보이셔서, 혹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 건 아닌가 하고…….”

“궁금해하지 말거라.”

“……예?”

“이 시간부로 성조에 관련하여선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예상치 못한 답변에 단이는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성조에 대해 궁금해하지 말라니.

두 사람이 싸웠다거나 단순히 다른 사내를 향한 질투로 생각하기엔 느껴지는 심각함이 달랐다.

단이는 결의 옷자락을 잡으며 불안에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역시 무언가 안 좋은 일이 생기신 것이지요? 혹 성조 나리께서 무슨 위험에…….”

“단이야.”

결은 그런 단이의 어깨를 감싸 쥐며 낮은 목소리로 공기를 눌렀다.

결이라고 어찌 성조의 결심을 돌리고 싶지 않았을까.

그 누구보다 가장 성조를 말리고 싶은 사람이 바로 결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녀석을 어디 가둬서라도 그 위험한 계획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하나 세상 무엇이 성조의 결심을 돌릴 수 있을까.

오랜 세월 죄책감으로 고이다 못해 썩어 문드러진 그 속을, 그 위에 붙고 만 불을, 감히 누가 평탄히 잠재울 수 있을까.

오로지 스스로의 몸을 다 태우고 한 줌의 재가 되어서야 비로소 사그라질 것을.

“가야 할 길이 다른 녀석이다.”

결국엔 한곳에서 만나게 될 길이니, 지금으로선 성조가 말해준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그 길의 끝에서 최악의 상황을 막을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는 것이 바로 제 몫이었고.

“때가 될 때까지만 기다려다오.”

“…….”

“그래야 네가 안전하다.”

뭔가를 더 말하려던 단이는 결국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물어도 들을 수 있는 답이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었다.

지금은 그저 믿고 기다릴 때.

언제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주시던 분들이었으니.

불안한 예감이 가슴을 스쳤지만 더 물을 수 있는 것도, 알 수 있는 것도 없었다.

“궁금한 게 많겠지만, 지금은 우리 둘을 믿어 달란 말밖에는 해줄 수가 없구나.”

“……알겠어요.”

결은 흐린 표정의 단이를 도로 끌어안으며 등을 다독였다.

직접적이든 혹은 간접적이든, 15년 전의 사건에 정회가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일로 결의 가족들은 물론이고 단이의 어머니까지 어린 자식을 두고 숨을 거두게 되었으니.

단이 역시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적잖은 충격을 받게 될 것이었다.

하나 결은 그 사실을 직접 단이에게 말해 줄 수 없었다.

진실을 알리고 용서를 구하는 것은 오로지 성조의 몫이었기에.

모든 걸 짊어지고 떠나는 것 또한, 그의 선택이었기에.

‘어쩌다…… 우리 모두 이리 되어야만 했을까.’지독하게 얽힌 그들의 인연이 한없이 가엽고, 서럽고, 또 원통할 뿐이었다.

그러기에 더더욱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잘못된 과오를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한스럽게 유명을 달리하게 된 자신의 가족들과 단이의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그리고 이 모든 비극의 시작…….’남준백, 그를 끝까지 처단하기 위해서라도.

결은 성조와 함께 끝까지 싸울 생각이었다.

그들 각자의 방법으로.

***

탁, 타닥, 탁.

안개로 뒤덮여 달무리조차 희미한 어느 밤.

촛대에 꽂아놓은 서너 자루의 초가 촛농을 떨어트리자 촛불이 일렁이며 그림자를 뒤흔들었다.

그 가운데 준백은 홀로 고심에 빠져 손끝으로 서탁을 두드리고 있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허공을 가르는 소리는 그의 심기가 상당히 불편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선정 옹주는 스스로 멸하여 먼 곳으로 달아났고, 놈을 묶을 수 있는 계집종 또한 여진족이 아니란 게 밝혀졌다. 지금 상황에 칼을 보내봤자 의심만 더 사게 되겠지…….’계집종이 홀로 남겨져 있을 때를 노리려 해도 결이 시종일관 그 근처를 지키고 있으니 그조차 쉽지 않았다.

이제 턱 밑까지 쫓아온 그 건방진 놈을 어떻게 죽여야 이 분노가 가실까.

‘꺾일지언정 절대 허리를 숙이지 않는 놈이니, 계속해서 몰아가다 보면 분명 제 아비처럼 스스로 사지에 걸어 들어갈 터인데.’하나 북귀의 곁엔 항상 성조가 있었다.

음수의 뒤를 쫓은 것도, 계집종의 핏줄을 찾은 것도 그놈의 작품이라 들었다.

아직 명자에 먹물도 마르지 않은 것이 계책은 웬만한 책사보다 뛰어나 결의 길잡이 노릇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으니.

‘놈을 완전히 고립시켜야 해.’서결을 제대로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선 우선 그놈부터 떼어내야 했다.

그러나 제 아비조차 어찌 못하는 녀석을 어찌 다루어야 할까.

듣기론 피를 나눈 형제보다도 더 끈끈한 우애에 두 사람이 각성바지가 아니냔 해괴한 소리까지 떠돌고 있거늘.

함부로 건드렸다간 오히려 역으로 뒤를 밟힐 수 있어 각별히 조심해야 했다.

“문제는 놈이 무얼 원하느냐인데…….”

돈이 없는 놈은 돈으로 꿰어내면 되고, 출세를 원하는 놈에겐 관모를 내려주면 된다.

인간이란 본디 욕망이 채워지면 더 큰 것을 원하여 스스로 진흙탕에 발을 들이는 족속이니.

“한데 그놈은 도무지 뭘 원하는지 알 수가 없단 말이지.”

기생집을 문이 닳도록 드나들면서도 하룻밤을 허락한 적이 없고, 이미 제 아비를 통해 탄탄대로에 올랐으나 딱히 높은 자리를 원하는 눈치도 아니다.

마냥 속이 투명하고 속물스러운 망나니 같으면서도, 막상 그놈이 원하는 것을 파고들려 보면 정작 눈을 어디에 두고 있는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완전히 가짜인 놈이란 뜻이었다.

‘하긴. 그러니 북귀가 그놈을 계속 곁에 두는 것일 테지.’

알맹이 없이 껍데기만 있는 놈이 무턱대고 달라붙는다고 받아줄 위인이 아니니.

여러모로 성조는 거슬리는 벽이 아닐 수가 없었다.

“하여간 좌찬, 그 쓸모없는 인간 같으니라고.”

애초부터 정회가 아들놈을 휘어잡을 수 있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성조를 계속 놔두었던 건 기회를 엿보기 위함이었다.

한 번쯤 놈을 구슬려 이쪽으로 오게끔 할 기회.

하나 반년이 훌쩍 넘도록 작은 틈조차 보이질 않으니.

타닥. 서탁을 두드리는 신경질적인 소리 위로 서늘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냥, 죽여 버릴까.”

우리 편으로 만들 수 없다면, 차라리 더 이상 고민할 것 없이 그냥 죽여 버리는 것이 더 나을지도.

그런데 한창 성조에 대한 생각으로 골머리를 앓던 그때.

“이리 오너라!”

야밤에 난데없는 객의 방문에 준백의 미간이 구겨졌다.

곧 대문으로 달려가는 아랫것의 발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잠시 뒤, 사랑으로 온 행랑아범이 방문객의 정체를 고하였다.

“……뭐라?”

행랑아범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준백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순간 제 귀가 잘못되었나 싶어 되물었지만, 돌아온 이름은 여전하였다.

“하……! 여우가 호랑이 굴에 들어왔구나.”

헛웃음을 친 준백은 객을 안으로 들이라 명하였다.

곧 닫힌 문 너머로 익숙한 그림자가 길게 드리웠다.

객은 문도 열어주지 않는 사랑 앞에 우두커니 서서 첫인사를 올렸다.

“제가 제대로 온 것이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대감.”

객, 성조가 웃음기 묻어 나오는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북귀를 죽이고 싶다면, 이곳으로 오면 된다던데.”

여우가 한 마리 들어왔다.

사냥감을 뜯으러 온 것인지, 사냥꾼을 몰고 온 것인지 알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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