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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 아찔하게 흐르는-82화 (82/100)

82화

따각, 따각.

말발굽 소리가 앞뒤로 나란히 엇갈리며 밤길을 수놓았다.

성조와 정회는 말없이 고삐만 잡아당기며 집을 향해 가고 있었다.

정회는 아들이 아까의 장면을 보았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한 채 그저 분을 삭이느라 애를 쓰고 있었고, 성조는 그런 아버지의 뒷모습을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아버지에게 어떤 일이 생기든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다.

아니. 좋은 대접을 받으면 어찌 그리 뻔뻔할까 싶을 것 같았고, 나쁜 대접을 받으면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이라며 속이 후련할까 싶었다.

그에게 아버지란 존재는 타산지석 그 자체였으니까.

감히, 불효막심하게도 그런 생각을 하였으니까.

한데 준백으로부터 정회가 모욕을 당한 순간.

성조는 난생처음으로 스스로 주체 못 할 분노를 느꼈다.

아버지를 함부로 대했던 준백을 향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준백에게 아무런 대항도 하지 못했던 아버지를 향한 것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그 순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자신을 향한 것이었을까.

날 서린 화살이 누구를 겨냥하고 있었던 건지는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저 눈앞에서 본 광경이 미치도록 분하고 서러웠다.

그렇게 두 부자가 문드러져 가는 가슴을 각자 삭이고 있을 무렵.

어느덧 저 멀리 집 대문이 보였다.

저 대문을 지나고 나면 언제나처럼 그들은 남보다 못한 사이처럼 갈라지고 말겠지.

익숙한 일인데, 늘 그래 왔던 것인데.

이상하게 오늘만큼은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성조는 잘 가던 말을 갑자기 멈추고선 앞서가는 정회를 불렀다.

“아버지.”

발길을 붙잡는 목소리에 정회의 말 역시 천천히 자리에 멈춰 섰다.

쉬이 돌아보지 않는 뒷모습은 아까의 수모를 숨기기 위한 노력이었다.

성조는 그 뒷모습을 눈에 억지로 담다가 먼저 말에서 내렸다.

그러곤 착잡해지는 감정을 애써 뒤로하며 입을 열었다.

“이제 만족하십니까.”

뜻을 알 수 없는 질문에 정회가 고개를 돌려 성조를 보았다.

무슨 뜻이냐 물어보기도 전에, 무엇을 묻는 것이든 만족하는 것이 없어 그렇다 답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하여 정회는 질문으로 답을 대신하였다.

“설마 나 때문에 억지로 회합에 들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

“만일 그런 것이라면, 그것은 만족하십니까.”

아니.

정회는 그리 답하고 싶은 것을 삼키며 굳은 눈으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이 회합에서 나가라 호통을 치고 싶었다.

빌어서라도 나간다면 그리하고도 싶었다.

그리 만류할 때는 보란 듯이 서결과 붙어 다니더니, 무슨 변심을 하였는지 하루아침에 준백의 편에 섰다.

하필이면 이리 위험한 일을 도모할 때에.

제 아들놈이지만 저 머릿속에 무슨 생각을 품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물어본들 그 뜻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놈이 아닌 터라.

“네가 그럴 놈이 아니지 않느냐.”

“그렇죠.”

정회는 공연히 상처 줄 만한 말을 골라 지독한 걱정을 숨겼다.

성조 역시 그 정도로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저항 없이 수긍하였다.

그것이 가슴 한구석을 저리게 만들었으나 정회는 꿋꿋이 굳은 표정을 유지하였다.

“대체 무슨 생각인 것이냐. 무슨 생각으로 영상의 옆에 붙은 것이야.”

“무슨 생각인지 말씀드리면, 방해하지 않겠다고 약조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거라. 네가 어찌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아무것도 하지 않고 꼬리를 말고 있는 것보다야 낫겠죠.”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에 정회가 턱에 힘을 주었다.

그는 화를 누르며 날이 선 눈으로 아들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정녕 그 간악한 독사 옆에서 쥐처럼 끌려다닌 줄로만 아느냐.”

그라고 어찌 고개만 숙이고 있었을까.

나름대로 준백의 영역에서 벗어나려 노력도 해보았고, 그의 눈을 피해 빠져나가려는 노력도 해보았다.

그러나 죄다 헛수고만 하고 수포로 돌아갔다.

이곳 조정에서, 아니.

이 조선 땅에서 준백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준백을 무너트릴 방법은 더더욱 없었다.

그리 덕망 높고 모든 선의 중심이었던 현덕마저 끝내 이기지 못하고 그의 손에 사라지지 않았는가.

하늘이 벌하지 않는 한 준백을 없애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넌 아직 어리다. 감정과 젊은 혈기에 치우쳐서 뭐든 다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어.”

“계속 부딪치다 보면 금이라도 가겠지요.”

“너만 다칠 뿐이다.”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지금도 편히 살지 못하는 거.”

“아비 속 긁고 싶은 거라면 거기까지만 하거라. 이 이상은 더 못 들어주겠으니.”

“같이 바꾸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 말에 정회가 미간을 좁혔다.

바꾸자니. 무엇을? 설마 준백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이 세상을?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제껏 알아듣게끔 말하였는데도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건가.

하나 정회의 여유는 오래가지 못했다.

“병풍 뒤 서장, 계첩으로 꾸민 회합록과 반쪽 밀서.”

“…….”

“그게 지금 어디로 갔다고 생각하십니까?”

정회의 눈빛이 한순간 사납게 변했다.

억지로나마 유지하고 있던 평정이 한순간 깨어지고 말았다.

고삐를 쥔 손이 하얗게 질려 힘을 이기지 못하고 바르르 떨렸다.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게야! 그게 무엇인지나 알고 함부로 건드려?!”

고막을 찢을 듯한 고함이 허공을 무섭게 뒤흔들었다.

만일 검이라도 차고 있었다면 그것까지 아들의 목에 겨눌 기세였다.

“아직은 걱정 마십시오, 아버지. 아마 당장 밝혀지진 않을 것입니다. 물론 언젠가는 수면 위로 떠오르겠지만…….”

정회의 드센 노기에도 성조는 흔들림 없이 그에게 다가갔다.

이윽고 벌어진 일에 정회의 주름진 눈이 커다래졌다.

“……저는 더 이상 이렇게 살고 싶지 않습니다, 아버지.”

성조가 정회를 향해 무릎을 꿇은 것이다.

“성인군자는 되지 못할망정, 짐승처럼 수치를 모르고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일어나거라. 뭐 하는 짓이냐!”

“결을 도와주십시오, 아버지.”

붉어진 눈시울로 바닥을 보던 성조는 아예 머리까지 바닥에 대어 간곡히 읍소하였다.

“이제라도 모든 걸 바로잡아 주십시오.”

정회는 혼란스러워 선뜻 무언가를 할 수 없었다.

지나간 과오, 숱하게 어깨와 가슴을 짓누르던 후회, 그리고 더 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절망이 성조라는 모습으로 자신을 압박하는 것만 같았다.

“일어나, 일어나래도!”

정회는 급히 말에서 내려 성조를 일으키려 하였다.

그러나 의관이 마구 흐트러지는 와중에도 성조는 엎드린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몸에 힘을 주어 정회 앞에 엎드릴 뿐이었다.

“아버지를 존경하던 때가 그립습니다. 아버지가 다른 이에게 억지로 고개를 조아리거나 뺨을 맞고도 허리를 숙이는 모습은 더 보고 싶지 않단 말입니다……!”

성조의 괴로운 울부짖음에 정회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간신히 지탱하던 버팀목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다 보았구나.

그 잔인한 진실이 정회의 땅을 무너뜨렸다.

성조는 안간힘으로 울음을 삼키며 뜨거워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버지께서 정말 저를 위해 이 길을 걷기 시작하셨다면, 적어도 더 이상 제 앞에서 당당히 말씀하시지 못할 일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

“…….”

“부탁드립니다, 아버지.”

성조의 옷깃을 우악스럽게 그러쥐고 있던 손에 서서히 힘이 풀렸다.

툭, 아들을 놓은 정회는 넋이 나간 듯 한동안 서 있다가 그대로 몸을 돌렸다.

비척거리며 몇 걸음을 옮기다, 다시 자리에 서서 주먹을 말다가, 무언가를 참는 듯 어깨를 가늘게 떨던 그는 이내 뭉친 숨을 길게 내쉬었다.

“……일어나거라. 차다.”

그 한마디만 남긴 정회는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태어나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눈물로 간청을 하였던 성조는 이후로도 오랫동안 차디찬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온 감정이 응집된 눈으로 닫힌 대문만 보았다.

길을 잃어버린 느낌이었다.

앞으로 나아갈 길도.

다시 뒤로 되돌아갈 길까지.

***

쓰러지다시피 벽에 세워진 병풍.

그 너머 열린 서장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정회는 허망한 눈으로 그 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행여 성조가 같잖은 거짓으로 협박하려는가 싶었지만, 일말의 기대는 쉽게 무너지고 말았다.

쌓인 서책 사이 가장 중요한 회합록과 반쪽짜리 밀서가 사라져 있던 것이다.

“하…….”

낮게 한숨을 내쉰 정회는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회합록이 사라졌다는 것도 큰 문제였지만, 밀서까지 가져간 것은 꽤나 충격이었다.

겉보기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빈 종이거늘.

그것이 밀서라는 것을 알았다는 건, 그 내용까지 전부 해석했다는 뜻일 테니.

어떻게, 라는 생각을 하자마자 정회는 의미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명석한 놈이었으니 분명 준백의 뒤를 쫓는 과정에서 알아내었을 것이다.

음수라는 놈도 결에게 뒤를 쫓기고 있다 하지 않았던가.

아마 그 과정에서 성조와 함께 다른 밀서들을 찾아내었을 확률이 높았다.

“……애초부터 뒤를 밟힐 판이었군.”

실소인지 한숨인지 모를 것을 흘린 정회가 서장에 등을 기댄 채 멍하니 허공을 보았다.

아득한 곳에 묻어두었던 옛 기억이 흐리게 번져나갔다.

***

15년 전, 현덕이 죽고 얼마 안 되었을 무렵.

준백의 서재에서 밀서를 본 것은 정말 우연한 일이었다.

쓴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특수 안료가 옅게 말라 있어 내용을 곧바로 볼 수 있었다.

서 씨 가문의 남은 일가를 모두 죽이라는.

아마 회합의 다른 사람, 아니면 준백의 사병이라 일컬어지는 자객단에게 보내질 밀서였을 것이다.

내용으로 보아선 후자일 가능성이 더 높았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선영의 얼굴과 함께 어떻게든 이 일만은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하필 그때 서재 밖에서 사람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정회는 급한 마음에 서책 사이에 끼어 있던 밀서를 빠르게 잡아당겼다.

찌익. 종이가 덜 마른 탓에 작은 자극에도 쉽게 결대로 찢어졌다.

벌컥, 문이 열린 순간.

“먼저 와계셨군요, 대제학.”

황급히 종이를 갈무리한 정회는 간발의 차로 그것을 품에 넣고서 아무 일도 없던 척 준백과 다른 무리들을 맞이하였다.

“행랑아범이 예서 기다리면 된다 하기에……. 혹 제가 무례를 범하였습니까.”

“그럴 리가요.”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듯한 준백의 눈동자에 정회는 마른침을 삼켰다.

등골이 서늘해져 지금이라도 밀서를 제자리에 놓아야 하나 생각이 들던 찰나.

“자, 다들 앉으시지요.”

천만다행으로 준백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 그대로 회합을 시작하였다.

무슨 정신으로 시간을 보낸 건지 알 수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회합이 끝나 이미 준백의 저택을 나와 있었다.

어찌나 긴장을 하고 있었던지 손바닥과 이마에 식은땀이 축축하였다.

회합의 사람들이 괜찮으냐 물어보던 것이 괜한 인사치레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주위를 둘러본 정회는 가슴 앞섶을 조심스럽게 더듬어보았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마치 살얼음이 깨지는 소리처럼 들렸다.

신경을 곤두세우며 한 번 더 주위를 살핀 정회는 그 길로 곧장 말을 몰아 어딘가로 향했다.

이윽고 정회가 멈춰 선 곳은 서 씨 가문의 대문 앞이었다.

혹 누가 뒤를 밟기라도 했을까, 마지막까지 경계를 놓지 않은 정회는 은밀히 문을 두드려 그 안으로 들어갔다.

“……어찌 찾아오셨습니까.”

선영은 인사 한마디 없이 마른 눈으로 정회를 바라보았다.

수척해진 그녀의 얼굴은 정회에게 있어 죗값의 시작과도 같았다.

허락된 시간이 많지 않은 터라.

정회는 곧장 품속에서 찢어진 밀서의 반쪽을 꺼내어 선영에게 내밀었다.

준백이 회합에서만 쓰는 비밀 인장이 찍혀 있는 부분이었다.

“당장 너에게 모든 걸 알려줄 수는 없으나, 이것은 네가 위험하다는 증좌다.”

정회는 당장이라도 누가 들이닥칠 것처럼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어서 도망쳐라. 그 인장이 찍힌 종이를 갖고 경남에 있는 박 대부의 댁에 가면 너를 지켜줄 것이다. 훗날 상황이 잠잠해졌을 때 이것을 세상에 드러내면 내가 잡혀갈 것이고, 나는 남준백을 고발할 것이다. 너의 손으로 우리를 쳐다오.”

숨 한번 제대로 고르지 않고서 쏟아내듯 내뱉은 말이었다.

선영은 뜻을 알 수 없는 눈으로 가만히 밀서를 내려다보다가 다시 정회를 마주 보았다.

그녀는 강한 여인이었다.

사건의 전말을 알고서도, 죽음을 앞두고서도 그녀는 눈물 한 방울 흘리는 법이 없었다.

하여 도망을 갈 줄 알았다.

용서의 한마디는 하지 않을지언정, 어떻게든 살아남아 자신을 벌하려 할 줄 알았다.

하나 이어진 선영의 행동은 정회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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