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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 아찔하게 흐르는-83화 (83/100)

83화

“오라버니는 끝까지 비겁하시군요.”

차가운 선영의 목소리가 정회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눈물이 마른 눈은 차라리 통곡을 하고 원망을 하는 것이 더 나을 만큼 정회의 가슴을 갈가리 찢기게 만들었다.

“이젠 제 손을 빌리시겠다 이겁니까?”

“…….”

“본인이 직접 나서서 해결할 용기는 없고, 죄책감은 무거우니 이런 수를 쓰시는군요.”

속내를 정확히 꿰뚫는 선영의 말에 정회는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정확히 그녀의 말대로였으니까.

선영을 구할 방법은 사실 이런 것 말고도 많았다.

그녀와 이 집안 식구들을 억지로라도 데리고 피할 방법도 있었고, 혹은 자신의 사병들로 이 집을 지키는 방법도 있었다.

차라리 그가 직접 이곳에 남아 그녀의 마지막을 지켜주는 방법도 있었다.

그러나 정회는 무엇 하나 실행에 옮길 수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리하게 되면, 준백의 눈 밖에 나 자신의 모든 것을 잃게 될 테니까.

그는 비열하였고 겁이 많았으며 아직 손에 움켜쥐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한때 모든 것을 걸고 싶었던 여인 하나 구하자고 이제껏 온갖 수모를 견디며 쌓아 올린 명성을 저버릴 수는 없었다.

하여 자신이 비겁하다는 사실은 애써 외면하고, 고고한 선영을 설득하려고만 하였다.

“선영아, 당장은 자존심이 상하겠지만 어찌 목숨보다 품위가 우선이겠느냐. 일단은 몸을 먼저 피하고서…….”

“틀렸습니다, 오라버니.”

그러나 선영은 그조차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단번에 정회의 말허리를 끊어내었다.

“저는 제 목숨으로 말미암아 오라버니께서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날 기회를 주지 않을 것입니다.”

“…….”

“그러니 이리 용서를 구하실 생각일랑 하지 마십시오.”

이미 당신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으니.

선영은 정회가 준 밀서를 대나무 통에 말아 넣었다.

대나무 통 뚜껑에 음각된 낯익은 문양이 정회의 눈길을 아프게 잡아끌었다.

선영은 감정 하나 담지 않은 눈으로 정회를 보았다.

“이만 돌아가십시오. 저는 당신들의 죗값을 반드시 치르게 할 것이나, 목숨을 구걸하진 않을 것입니다.”

“……선영아.”

“돌아가시라 하였습니다.”

단단한 음성은 파고들 틈조차 없을 만큼 견고하였다.

애초부터 용서를 빌 생각도, 받을 생각도 없었다.

선영이 뒷일을 대비할 수 있도록 위험을 알리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

정회는 더 미련을 끌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방문을 열기 직전, 마지막으로 선영을 향해 염치없는 부탁을 하였다.

“제발, 살아남아라. 포기하지 말아 다오.”

그 말에 선영이 조소인지 실소인지 모를 것을 짧게 내뱉었다.

경멸 어린 시선이 뻔뻔한 낯짝을 꾸짖듯 날아들었다.

“포기하겠다고 한 적 없습니다.”

“…….”

“뒷일은 제 오라버니께서 알아서 해주시겠지요.”

그러곤 더 이상 말을 섞기도 싫다는 듯 선영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문고리를 잡은 손이 문을 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놓지도 못한 채 머뭇거렸다.

‘내가 없으면 내 가족은. 내 아들은…….’지지리도 못난 놈.

정회는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끝끝내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저 있으나 마나 한 밀서 하나 건네준 것으로 스스로를 위안하며 도망치듯 그 집을 빠져나왔다.

선영을 구하러 갔던 그 순간조차 회합 무리에게 뒤를 밟히면 어쩌나 하는 불안에 떨었던 것이다.

그렇게 정회는 예정된 비극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

정회는 주름진 얼굴을 쓸어내리며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선영은 자신의 몸종을 통해 친 오라버니인 민지청에게 밀서를 알려 후일을 도모하려 했을 것이다.

그리고 비극의 날, 자식들을 최대한 숨기기 위해 움직이던 찰나 변을 당하고 만 것이겠지.

첫째 아들인 서결만 겨우 숨기고서.

하나 모종의 이유로 밀서는 북방 경계선까지 가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그 밀서는 세상에서 영영 사라지게 되고 말았다.

그리고 오랜 세월을 지나, 그것은 다시 한양으로 돌아온 듯하였다.

남은 반쪽과 맞춰지기 위하여.

‘분명 서결의 손에 있는 것이렷다.’확실하진 않았지만 직감이 그리 말해 주고 있었다.

온전한 한 장이 성조의 손에 있었다면, 녀석이 그렇게까지 궁지에 몰린 눈을 하고 있지 않았을 테니.

당장 밝혀지진 않을 것이란 말 속에도 아들놈의 의지는 들어 있지 않았다.

‘……저는 더 이상 이렇게 살고 싶지 않습니다, 아버지.’ 무릎을 꿇은 성조의 모습이 다시금 눈앞에 떠올랐다.

15년 전 서 씨 가문이 몰락하고 난 후 언제나 아비를 멀리하던 놈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한때는 피를 나눈 가족보다 더 가까이 지내던 집안을 제 손으로 멸문시켰으니.

그것도 더러운 권력에 빌붙어서.

나이는 어려도 세상을 읽는 눈은 특별했던 탓에, 성조는 일찍부터 제 아비를 멀리하게 되었다.

커서 아버지처럼 될 거라던 아들은 모든 것의 척도에 아버지를 두었다.

결코 따라 해선 안 될 본보기로.

‘아버지께서 정말 저를 위해 이 길을 걷기 시작하셨다면, 적어도 더 이상 제 앞에서 당당히 말씀하시지 못할 일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 성조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귓가에 맴돌았다.

준백에게 뺨을 맞았던 굴욕과 그것을 아들이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절망도 다시금 가슴을 짓눌렀다.

어찌해야 좋을까.

이제껏 끌려다니다시피 하였던 지난 삶들을 정회는 처음으로 되돌아보았다.

그러곤 제 앞에 놓인 두 갈래의 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대로 전과 같은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성조의 말대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길을 갈 것인가.

한쪽은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길이요, 다른 한쪽은 자신을 버림으로써 완성이 되는 길이니.

“…….”

서장의 문을 잡은 정회의 손이 옅게 떨려왔다.

손이 하얗게 질릴 만큼 서장의 문짝을 꽉 쥐었던 정회가 그것을 천천히 열었다.

남은 회합록들이 새로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선영의 앞에서 닫아 버렸던 문을, 정회는 15년이 지나서야 다시 열 수 있었다.

***

깊은 밤.

성인 남성의 키만큼 자란 갈대가 바람에 흔들리며 스산한 소리를 내었다.

달마저 구름에 가려져 흐릿한 달빛이 갈대 위에서 산산이 부서지니.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에 당장이라도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긴장감마저 감돌았다.

“헉, 허억, 헉……!”

그 가운데 누군가의 절박한 숨소리가 무성한 갈대 사이를 헤집고 있었다.

소녀는 자신보다 더 어린 남동생의 손을 꼭 잡은 채 연신 뒤를 살피며 필사적으로 달리고 있었다.

“조금만 더 빨리, 어서!”

“누나, 나 놓지 마. 누나…….”

낯선 언어는 분명 여진의 말이었다.

남동생은 의지와 달리 지친 발과 턱 끝까지 차오른 숨으로 인해 헐떡이며 누나의 손만 간신히 붙잡고 있었다.

“헉!”

남동생의 손을 고쳐 잡던 소녀가 무언가를 보곤 숨을 집어삼켰다.

저 멀리 검은 복면의 사내들이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고 있던 것이다.

소녀는 다시금 남동생과 함께 죽을힘을 다해 뛰기 시작했다.

저들이 왜 자신들을 쫓는 것인지, 어쩌다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인지 그들도 알 수 없었다.

그저 간밤에 웬 장정들이 집으로 들어와 자신들을 납치하였고, 운 좋게 그들의 손아귀에 벗어나 도망치던 중 강을 맞닥트렸으나, 하늘이 도왔는지 그 앞에 줄에 연결된 나룻배가 있더라.

남매는 난데없이 자신들을 잡으려는 저들을 피해, 그리고 어떻게든 살기 위해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이곳이 어디인 줄도 모르고.

모든 것이 사냥꾼의 토끼몰이인 줄도 모르고.

“아!”

그때, 남동생이 지친 제 발에 걸려 결국 넘어지고 말았다.

“얼른 일어나. 얼른!”

“누나, 나 못 가겠어. 나 너무 힘들어…….”

꼴딱꼴딱 넘어가는 숨으로 고개를 젓는 남동생을 보며 소녀가 애타게 발을 굴렀다.

어떻게든 남동생을 일으켜 다시 도망치려던 찰나.

“잡았다, 이것들!”

“꺄악!”

솔개가 병아리 낚아채듯 검은 복면의 사내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남매는 엉엉 목을 놓아 울면서 두 손을 싹싹 빌었다.

이런 상황이 익숙한 장정들은 킬킬 비릿한 웃음을 흩뿌리며 매서운 눈으로 남매를 보았다.

“감히 함부로 조선의 국경을 넘어오다니. 너흰 이제 엄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일부러 넘은 것이 아니에요!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제발 보내주세요!”

조선의 국경이란 말에 얼굴이 하얗게 질린 소녀가 고개를 마구 저으며 더 절박하게 애원하였다.

그러나 사내들은 풀어주기는커녕 남매의 머리에 두터운 자루를 씌우고 손발을 묶어 어딘가로 끌고 갔다.

그들은 주로 여진의 언어로 대화를 나누었으나 이따금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도 함께 섞어 사용하였다.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하였는지 남매는 차가운 짚더미 위에 내동댕이쳐졌다.

이대로 꼼짝없이 죽게 되는 건가 싶던 그때.

“으악!”

사방에서 들려오는 묵직한 비명에 남매가 우왕좌왕하며 습관적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눈앞이 보이지 않아 두려움만 더 커져가던 찰나.

휙, 벗겨진 포대 자루 너머 도깨비처럼 험상궂은 사내의 얼굴이 나타났다.

놀란 남동생이 크게 딸꾹질을 하며 몸을 떨었다.

“이 썩을 놈의 자식들. 어린애까지 건드려?”

사내, 진위는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사내들을 향해 욕지거리를 내뱉곤 남매의 몸을 묶은 밧줄을 풀어주었다.

한 병사에게 일러 남매를 다시 국경 너머로 데려다주라 명한 뒤, 진위는 잡은 놈들을 한데 모아둔 곳으로 다가갔다.

방금 잡은 다섯 명까지 포함하여 이곳 근처에서만 총 서른에 달하는 자객들을 붙잡았다.

한 무리는 사냥꾼으로, 그리고 한 무리는 여진족으로 둔갑한 도적단으로.

‘아니. 어차피 국적이 없는 건 마찬가지니 저들 또한 이방인이겠지.’

상단인 척 둔갑하여 도적단을 잡은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 와서 새로이 알게 된 사실이 있었으니, 바로 이들이 죄 없는 여진인을 일부러 국경 너머로 꾀어낸 뒤에 사냥꾼들에게 넘긴다는 것이었다.

국경을 함부로 넘어와 약탈을 하였다는 누명을 뒤집어씌워서 말이다.

‘어찌 인간의 탈을 쓰고 금수만도 못한 짓을 저지르는 건지.’

진위는 반죽음 상태로 포박된 이들을 보며 쯧 혀를 찼다.

하나같이 반쯤 벗겨진 옷 위에 익숙한 문신들이 새겨져 있었다.

파도치는 원 안에 용의 머리.

모두 준백의 자객들이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수확은, 바로 치열한 접전 끝에 자객단의 우두머리인 음수를 붙잡았다는 것이었다.

온몸이 꽁꽁 묶여 언제 죽을지 모를 상황에 놓였는데도 음수는 조금의 주눅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형형한 눈으로 진위를 매섭게 노려볼 뿐이었다.

수틀리면 자결을 할 놈들이란 걸 알아 미리 재갈까지 채워 놓았지만 오래 놔두어 좋을 건 없었다.

진위는 놈들의 머리에 포대를 씌우고선 큰 목소리로 병사들에게 일렀다.

“자, 장군과 함께 한바탕 뒤집어엎으러 가자!”

“예!”

이들만 데리고 가면 결이 준백을 치는 것은 시간문제이리라.

진위는 막대한 책임감을 느끼며 서둘러 말을 몰았다.

***

이 소식은 무사히 결의 귀에 들어갔다.

하나 문제는 들어가선 안 될 귀에까지 닿고 말았으니.

“……이 멍청한 것들!”

쾅! 서탁을 내리친 준백이 살벌한 기운을 내뿜었다.

회합 중 갑자기 화를 내는 준백에 다른 대신들이 모두 그의 눈치만 살폈다.

그 가운데 정회와 성조만이 묘한 눈을 할 뿐이었다.

준백은 바득 이를 갈며 허공을 노려보았다.

다른 자객들은 몰라도 음수가 잡힐 것이라곤 예상치 못했기에 더욱 당혹스러웠다.

그는 빠르게 머리를 굴려 어떻게든 이 위기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강구했다.

결의 수하들이 한양에 당도할 만한 길을 예측하여 오가는 길목을 모두 막으면 어느 정도 시간은 벌 수 있으리라.

역병은 여기에 아주 좋은 핑계거리였다.

‘건방진 것……. 끝까지 내 목덜미를 물어보겠다 이거지.’

결 역시 더 이상 가만히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준백의 눈동자가 앞으로 남은 궁중 행사들을 정리해 놓은 문서로 향했다.

유렵(遊獵). 곧 임금이 놀이 사냥을 위해 몇몇 문무 대신들을 대동하여 나갈 예정이었다.

무신 최고 등급인 서결 역시 함께할 터.

‘놈이 달려들어 내 목덜미를 물기 전에 먼저 몽둥이를 휘둘러야 한다.’

감히 달려들 생각조차 못 하게끔.

물론 허를 찌르려는 생각은 준백만 하는 것이 아니었으니.

‘이번 겨울이 끝나기 전에, 남준백과의 악연을 끊는다.’

결 또한 이제 마지막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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