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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 아찔하게 흐르는-85화 (85/100)

85화

결은 미친 듯이 산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다모들이 그녀와 함께 있긴 했지만, 이 정도 기습을 꾸밀 정도라면 웬만한 다모로는 결코 막을 수 없을 것이었다.

‘조금만 기다리거라. 제발 조금만 더!’

빗물이 시야를 가리고 땅을 질퍽하게 하여 다니기 쉽지 않았지만, 결은 쉴 새 없이 말에 박차를 가하며 단이가 갔을 만한 곳을 전부 찾아다녔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

결의 시야에 익숙한 쪽빛의 천이 들어왔다.

말에서 내려 가까이 살피니 분명 자신이 선물해 주었던 그 목도리였다.

‘단이야.’

불길한 예감이 덩굴처럼 발목을 타고 올라와 삽시간에 가슴을 옥죄었다.

목도리를 움켜쥔 손이 하얗게 질렸다.

주변을 살피니 목도리 앞쪽에 아직 빗물에 지워지지 않은 발자국들이 보였다.

황급히 말에 올라탄 결은 발자국을 따라 내달렸다.

빽빽하게 들어찬 수풀을 겨우 헤쳐 비탈을 빠져나왔을 때쯤.

결은 눈앞에 보인 광경에 더 이상 이성을 붙잡을 수가 없었다.

다모가 단이에게 검을 겨누고 있었던 것이다.

머리가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여 활을 들었다.

그러곤 군더더기라곤 전혀 없는 동작으로 시위를 당겨 단번에 다모에게 화살을 날렸다.

“윽!”

화살이 다모의 몸이 아닌 어깨에 맞은 것은 그만큼 결의 평정심이 많이 흐트러짐을 뜻하고 있었다.

이 정도 거리라면 충분히 다모를 제압하고 단이를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곧장 다모를 제압하기 위해 적운검을 빼 들려던 순간.

갑자기 다모가 몸을 돌리더니 단이에게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러곤 단이를 안아 그대로 절벽 아래로 뛰어들었다.

절벽 아래는 수심이 깊은 강이었다.

비까지 내려 수심이 높아진 데다 유속까지 빨라 떨어지면 살아남는 것이 어려워질 정도였다.

그런 곳으로, 단이가 떨어졌다.

절벽 아래에 강물이 있다는 건 이 순간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아니, 사실 물이 있다는 자각조차 없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머릿속엔 온통 단이를 구해야겠다는 생각만이 가득했으니까.

결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그들을 따라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단이야!”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아 결은 있는 힘껏 단이를 향해 팔을 내밀었다.

단이가 본능처럼 뻗은 팔이 손끝에 닿기 직전.

풍덩!

강물이 엄청난 물보라를 일으키며 세 사람을 동시에 삼켜버렸다.

하늘이 사라지고 세상이 뒤집혀 모든 것이 물속에 잠식되었다.

빗물과 겨울 공기보다 더 차가운 투명한 물이 온몸을 집어삼키자, 결은 뒤늦게 자신이 어디에 뛰어들었는지를 자각하였다.

“…….”

모든 태동이 심장으로 몰려갔는가.

터질 듯이 세차게 뛰는 심장과는 반대로 몸은 점차 딱딱하게 굳어만 갔다.

미칠 듯한 두려움과 절망, 강박 등이 검은 줄기처럼 뻗어 나와 손가락과 손목, 팔, 어깨, 목을 휘감기 시작했다.

허공처럼 투명하게 일렁이던 눈앞에 서서히 붉은 핏물이 번져왔다.

마치 붉은 주사를 풀어놓은 것처럼 온 강물이 붉게 물들었다.

질식할 것 같은 피비린내와 함께.

숨을 쉬지 못하는 것이 물속이라서가 아니라 짙은 비린내 때문인 것 같았다.

곧 결은 자신의 몸과 뻗은 손조차 비린내 나는 붉은빛에 잠겨 볼 수 없었다.

온통 붉게 변한 세상 가운데 차례로 가족들의 얼굴이 보였다.

어머니, 어린 형제들, 아직 말조차 떼지 못하던 갓난아기인 막내와 큰아버지, 할아버지.

그리고…… 아버지.

하나같이 슬픈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얼굴들이 꼭 자신을 탓하는 것만 같았다.

어찌 너만 그리 살아 있냐고.

그 모든 죄업을 짊어지고 어찌 너만 그리 악착같이 살아 있냐고.

가족의 모습을 빌어 늘 스스로를 질책하고 가두던 결의 죄책감이었다.

결의 몸이 점점 붉은 핏물 아래로 가라앉았다.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생각마저 전부 사라졌다.

아주 중요한 걸 잊은 것 같은데,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저 지독한 허무와 두려움, 그리고 고통만이 그를 아래로, 아래로 끌어당길 뿐이었다.

차라리 이대로 모든 것이 끝날 수만 있다면.

이 극심한 피비린내로부터 벗어날 수만 있다면.

그렇게 모든 것을 포기하고 눈을 감으려던 찰나.

‘나리.’

봄날의 따스하고도 부드러운 바람을 머금은 것 같은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맴돌았다.

물결에 흔들리는 시야 너머로 희미하게나마 누군가의 얼굴이 보였다.

이런 붉은 핏빛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여인.

눈이 부실 만큼 희고 고운 빛을 닮은 여인.

내 삶의 주인. 나의 이유.

나의, 단이.

“나리!”

“……!”

그때였다.

눈앞을 점령하였던 붉은 핏빛이 사라지고 다시 원래의 투명한 물빛이 보였다.

그 속에 단이가 보였다. 허상이 아닌 진짜 단이가.

괴로움에 버둥거리는 단이의 얼굴이 보이자 비로소 죽어가던 온몸의 감각들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저주와도 같던 현상들이 단이로 인해 전부 사라진 것이다.

결은 굳었던 몸에 억지로 힘을 주어 앞을 향해 나아갔다.

거친 물살이 가로막았지만 결은 필사적으로 그녀에게 다가가 팔을 뻗었다.

마침내 단이의 여린 손을 잡은 결이 그녀를 끌어안고서 힘껏 위로 올라갔다.

수면 위로 올라온 결은 단이를 데리고 안간힘으로 거센 물살을 헤쳤다.

간신히 단이를 땅 위로 올려 보낸 결이 뒤따라 물에서 빠져나왔다.

어깨와 등을 두드리는 차가운 빗물에 드디어 물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러나 안도하기도 잠시.

“허억, 헉…….”

거칠게 숨을 내뱉던 결은 곧 차갑게 얼어붙은 손으로 더듬거리며 단이에게 다가갔다.

몸이 잔뜩 젖어 곳곳에서 뚝뚝 물이 떨어지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의 신경은 오로지 단이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

“단이야, 단이야.”

단이를 품에 안은 결이 애타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하나 물을 많이 마신 탓인지 단이는 쉬이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

굳게 감긴 눈에 작은 미동도 보이지 않자 결은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단이야, 제발…… 제발 눈 좀 떠보거라. 단이야!”

단이를 꼭 끌어안은 결이 울먹이듯 포효하며 단이의 등을 쓸어내렸다.

어떻게든 차갑게 식은 몸을 데우며 멈춘 숨을 토해내게끔 하였다.

이대로 단이가 눈을 뜨지 못한다면.

그녀 역시 가족들처럼 곁을 떠난다면…….

물속에 잠겼을 때보다 더한 공포가 가슴을 짓눌러 숨조차 쉬기 어려웠다.

누구도 내 허락 없이는 이 아이를 데려갈 수 없다.

설령 그것이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가르는 것이라 하더라도.

핏발 선 눈 아래로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이 흘러내렸다.

혼이라도 붙잡을 것처럼 단이의 몸을 끌어안던 그때.

“콜록, 콜록……!”

품 안에서 느껴지는 요동에 결이 얼른 단이의 얼굴을 살폈다.

“단이야, 정신이 드느냐. 단이야!”

연신 기침과 물을 내뱉던 단이가 옅게 신음을 흘렸다.

괴로운 듯 미간을 좁히며 파르르 속눈썹을 떨던 그녀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나리…….”

유약하게 새어 나온 목소리가 희망의 끈을 다시 이어주었다.

결은 저도 모르게 흐느끼며 다시금 단이를 끌어안았다.

“고맙다. 고맙다, 단이야. 고맙다…….”

한 사람의 생명이 이토록 간절하게 여겨진 적이 있었나.

물에 빠졌다가 다시 나오게 된 것도, 단이가 무사한 것도 결은 전부 기적처럼 느껴졌다.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이 아이를 구하기 위해 저렇듯 투명한 물속으로 뛰어들게 될 줄을.

저주와도 같던 환각을 스스로 이겨내 벗어나게 될 줄을.

단이가 아니었다면 절대 불가능할 일이었다.

“대체, 어떻게 물에…….”

단이가 천천히 손을 뻗어 결의 뺨에 묻은 물들을 닦아주었다.

결이 자신 때문에 강물에 뛰어들었던 것을 걱정하는 얼굴이었다.

“나도 알 수 없다. 아까는 그저 널 구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괜찮으시어요……? 나리께선, 물을 가까이하면 아니 되시잖아요…….”

비록 저주에 삼켜질 뻔하였으나 단이 덕에 이겨낼 수 있었던 결이었다.

결은 울컥 북받치는 감정을 애써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 너만 괜찮으면 된다. 너만 괜찮으면…….”

결은 추위로 파랗게 질린 단이의 입술을 보곤 다시금 그녀를 단단히 감싸 안았다.

단이를 안고 뛰어들었던 다모는 결국 물살에 휩쓸려갔는지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불행 중 다행으로 비는 곧 그쳐 하늘이 개었다.

하나 빗물에 불어난 강물이 금방이라도 다시 손을 뻗어 두 사람의 몸을 삼킬 것만 같았다.

“일단 이곳부터 벗어나자.”

결은 단이를 안아 든 채 흑마를 매어두었던 곳을 향해 올라갔다.

다행히 절벽이 그리 높지 않은 데다 근처에 딛고 올라갈 만한 바위들이 있어 어렵지 않게 위로 올라갈 수 있었다.

흑마 역시 소란 속에서도 얌전히 자리를 지켜주어 무사히 되찾을 수 있었다.

단이만 말에 태운 결은 최대한 물을 털어낸 철릭을 그녀의 어깨에 덮어주었다.

그러곤 한 손으로는 말의 고삐를, 다른 한 손으로는 단이의 손을 감싸 쥔 채 말을 이끌었다.

비가 온 탓에 길이 질척여 산을 내려가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결은 한시도 쉬지 않고 최대한 조심하며 산을 내려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차갑게 식어가는 단이의 몸이 그를 초조하게 만든 탓이었다.

그나마 산이 그리 높지 않고 험준하지도 않아, 해가 지기 직전에 마을로 내려올 수 있었다.

이선을 비롯하여 다른 관료들은 모두 보이지 않았다.

한양으로 돌아가 상황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 옳았으나, 지금 결에겐 추위에 떨고 있는 단이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다.

하여 결은 곧장 한양으로 가는 대신 근처 민가의 주막으로 향하였다.

따듯하게 데운 방에 들어서자 한기가 조금은 가시는 듯하였다.

“어쩌나. 하필 지금 주막에 남은 이불이 이거 하나밖에…… 아이고.”

때마침 이불을 가지고 온 풍채 넉넉한 주모가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한 두 사람의 모습에 주춤하였다.

주모는 호기심 많은 눈길로 그들을 번갈아 보면서도 부러 모른 척 물었다.

“술상이라도 좀 봐올까유? 아니면 밥상?”

많이 놀란 탓인지 단이는 별로 생각이 없다는 눈빛을 보내왔다.

결 역시 일단은 몸을 녹이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하여 고개를 내저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부르겠네.”

“언제든 편히 말씀 주시어유. 건너편에 있을 터이니.”

“…….”

“쯧쯧, 저리 젖은 옷 계속 입고 있으면 고뿔 걸리기 십상인디.”

주모는 잔뜩 파리해진 단이의 안색을 보며 말을 흘리곤 문을 닫아주었다.

둘만 남게 되니 묘한 침묵이 공기 중을 부유하였다.

결은 주모가 가져다준 이불을 펼쳐 가장 따듯한 아랫목에 깔아주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말하였다.

“주모 말대로 젖은 옷을 계속 입고 있으면 몸에 한기가 돌 터이니, 젖은 옷은 벗고 이불을 덮고 있거라. 나는 밖에 나가 있을 터이니.”

“하지만 방금 아주머니께서 이불은 이거 하나밖에 없다 하시었는데……. 나리께서는 어찌하시려고요?”

“내 걱정은 말고.”

단이가 무어라 더 할 새도 없이 결이 방을 나서버렸다.

그러잖아도 질척하게 달라붙는 옷 때문에 불편하던 차라.

입술만 몇 번 뻐끔거리던 단이는 곧 젖은 옷가지를 벗기 시작하였다.

가슴 가리개와 속속곳만을 남겨두고 모두 벗어 걸어 놓은 단이는 하나뿐인 이불을 몸에 칭칭 감았다.

“나리…… 이제 들어오시어도 되어요.”

부끄러운 마음에 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결을 불렀다.

상황이 낯선 건 그도 마찬가지인지, 문을 여는 손길에서부터 머뭇거리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결은 단이에게서 멀찍이 떨어진 윗목에 앉고서 부러 외면하듯 고개를 돌렸다.

서로 정까지 통한 사이에 어찌 이리 내외를 하실까.

자신 때문에 공연히 결이 추위에 떠는 것 같아 단이는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런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일 아침 동이 트는 대로 한양에 갈 것이니, 일찍 자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결은 여전히 젖은 옷을 모두 갖춰 입은 채 불편하게 벽에 등을 기대어 눈을 감았다.

이대로 밤을 지새울 모양이었다.

습격에서 벗어났다곤 하나 언제 적들에게 위치가 발각될지 모르는 상황이니, 단이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편하게 잠을 청할 수 없는 까닭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방이 따듯하다곤 해도 윗목은 찬바람이 드나드는 곳.

거기다 결의 옷 역시 제 옷 못지않게 축축이 젖어 있는 상황이었다.

걱정 가득한 눈으로 결을 바라보길 한참.

이윽고 결심한 단이가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나리께서도 벗으시어요.”

붉게 달아오른 얼굴만큼이나 부끄러움이 깃든 손이 도톰한 이불을 열었다.

“같이 덮어요. 이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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