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나리께서도 벗으시어요.”
벗으란 말이 왜 이렇게 외설적으로 들리는 것인지.
단이는 제가 말해놓고도 결이 이상하게 들으면 어쩌나 싶어 얼굴이 홧홧해졌다.
‘이건 순전히 젖은 옷 때문에 나리께서 추워하실까 염려하여 드리는 말씀이야. 절대 다른 뜻이 아니야.’
단이는 아무도 묻지 않은 것을 혼자 변명하며 이불 한 쪽을 살짝 들었다.
“같이 덮어요. 이불…….”
하나 이번엔 결의 표정에 언뜻 움찔하는 기색이 엿보였다.
괜스레 속이 뜨끔한 단이가 얼른 말을 덧붙였다.
“그것이, 이불은 하나뿐이라는데…… 감히 나리께서 헐벗은 상태로 있으실 수는 없고, 그렇다고 나리 앞에서 제가 헐벗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당황스러운 마음에 어설픈 핑계가 중구난방으로 뛰쳐나왔다.
이리 말하고 나니 그 의도가 더욱 불순해 보이는 터라.
‘힝…… 망했어.’
단이는 입술을 꾹 맞물며 슬그머니 이불을 턱 밑으로 끌어올렸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길 잠시.
피식, 귓가를 간지럽히는 웃음소리에 단이가 빼꼼 눈을 들어 앞을 보았다.
고개를 돌린 채 낮게 실소를 흘린 결이 웃는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혼자 얼굴이 새빨개진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 어찌 저리 귀여운지.
작은 머리통 속에 든 생각이 훤히 보일 정도였다.
결은 아직 축축하게 젖은 제 옷고름을 손에 쥐며 물었다.
“괜찮겠느냐.”
그 물음에 단이의 두 뺨이 조금 더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빠르게 눈을 깜빡이던 단이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네, 하고 대답하였다.
사실 결은 걱정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그녀를 탐하고 싶은 욕망이 너무도 깊어서.
그 넘치는 욕망이 또 그녀를 힘들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하나 가뜩이나 단이 앞에선 짧아지는 인내심을 그녀가 손수 뒤흔들고 있으니.
“그럼, 네가 원하는 대로.”
결은 애써 스스로를 억제하고 있던 빗장을 풀었다.
툭, 툭. 결의 젖은 옷들이 하나둘 바닥으로 떨어지자 단이는 눈 둘 곳을 찾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이미 숱하게 마주한 맨몸이었다.
마주하기만 하였을까. 실오라기 하나 막는 것 없이 그 품에 안기기까지 하였던 것을.
그럼에도 단이는 여전히 그의 맨몸을 마주하는 것이 스스러웠다.
이리 정분을 나눈 사내라곤 결이 처음이거니와, 사실상 일전에 정을 나눈 이후로는 그 몸을 가까이한 적이 없는 까닭이었다.
마침내 속적삼까지 벗어내자 근육으로 단단히 이루어진 몸이 드러났다.
짤막한 초 하나로 밝힌 불빛이 음양을 달리하여 그의 근육들을 더욱 두드러지게 만들었다.
결은 한 걸음 한 걸음 단이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단이가 조심스럽게 이불을 들추자 그 옆에 결이 앉았다.
두 온기가 느릿한 속도로 서로에게 섞여들기 시작했다.
하나 그리 넉넉한 크기의 이불은 아닌 터라.
두 사람이 꼭 맞붙어도 반대쪽은 이불이 덜렁 들리고 말았다.
결은 찬 기운이 들지 않게 이불을 조금 더 단이 쪽으로 덮어주었다.
“네가 조금 더 덮거라.”
“아니어요. 바닥이 따듯해서 저는 괜찮아요. 나리께서 조금 더 덮으시어요.”
양쪽으로 왔다 갔다 하는 이불에 괜히 훈기만 빠져나갔다.
무언가를 고민하는지 결이 말없이 이불을 바라보았다.
“아……!”
그러더니 단이의 몸을 가볍게 안아들어 제 무릎 위에 앉히는 게 아니겠는가.
그러곤 마치 포대기를 하듯 단이의 위로 이불을 덮어 감쌌다.
“이리 하면 이불이 부족하지는 않겠지.”
과연 결의 말대로 이불은 빈틈없이 두 사람의 몸을 꼭 감싸주었다.
하지만 서로 최소한의 옷만 갖추어 입은 상황에서 얇은 천은 오히려 감각을 더욱 예민하게 만들 뿐이었다.
여실하게 느껴지는 존재감에 단이는 의지와 상관없이 그의 품에 안기던 날이 떠올랐다.
공연히 몸에 힘이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단이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며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결은 그런 단이의 귓가에 나른한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긴장하지 말거라. 어찌하지 않을 테니.”
그 말에 귀와 목덜미까지 달아오른 것은 예견된 수순이었다.
머릿속 생각을 전부 들킨 것만 같아 부끄러움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단이는 고개를 푹 숙이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제, 제가 무슨 긴장을 하였다고 그러시어요…….”
“많이 한 것 같은데.”
결이 이불 아래 드러난 흰 살결을 엄지로 느릿하게 문지르자 가냘픈 어깨가 흠칫 떨려왔다.
빠르게 오르내리는 속눈썹은 요동치는 마음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심장소리가 이불 속에서 짙은 열기와 함께 더해졌다.
비단, 단이만 긴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란 뜻이었다.
“나와 이리 있는 것이 싫은 것이냐.”
쿵쿵 세차게 뛰는 심장으로 어지러운 가운데 들린 말은 단이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런 것 아니어요!”
빠르게 고개를 저으며 결과 눈을 맞추었던 단이는 다시 홍조를 띠며 수줍게 말하였다.
“어찌 싫을 수 있겠어요.”
“…….”
“감히 꿈에서 바라기에도 과분한 행복인데…….”
결과 정을 통하였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지만, 여전히 단이의 마음속엔 이 행복이 언제까지 이어질까 하는 걱정이 남아 있었다.
선정 옹주가 떠났다 하여 자신의 신분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으니.
한낱 다비로서 양반인 결을 마음에 품는다는 것 자체가 감히 괜찮을까 싶던 것이다.
정을 통한 뒤로도 그녀가 일정 선 이상 결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또 결이 자신을 품지 않아도 서운함을 비칠 수 없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언제든 그를 보내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것.
말간 두 눈동자에 금세 근심이 어렸다.
그 어두운 빛을 전부 눈에 담은 결이 단이의 얼굴을 감싸 자신을 보게 하였다.
“단이야.”
“……예, 나리.”
“그 누구도 너에게서 나를 앗아가지 못할 것이다.”
“…….”
“그 무엇도 내게서 너를 앗아가지 못하는 것처럼.”
결에게 신분이란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었다.
그녀가 이방인이었던 것도 아무 상관이 없었는데, 하물며 그깟 신분이 어찌 그의 마음을 가로막을까.
설령 그녀가 백정의 딸이라 하더라도 결은 그녀를 곁에 두고 사랑할 자신이 있었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그녀에게 가벼이 입을 맞춘 결이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내게는 그 누구보다 고귀한 너다.”
그럼에도 그 신분이란 것이 너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면.
“나의 세상에선 네가 내 주인이라는 말, 허투루 한 것이 아니다.”
그 신분의 족쇄를 풀어 나와 같은 곳에 올라오게 할 생각이었다.
그 편이 너를 더 행복하게 만들 수 있을 테니.
“그러니 아무 걱정 말거라. 이 행복은 온전히 너의 것이니.”
“…….”
“내가 그리 되도록 지켜줄 것이니.”
단이의 눈동자가 옅게 떨려 왔다.
내내 가슴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불안까지 전부 녹게 만드는 말이었다.
밤바다처럼 검은 눈동자에 머물러 있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내 행복을 지켜줄 사람.
모든 것을 버리고 나의 것이 되어주겠다는, 나의 유일한 세상.
단이는 고개를 들어 결에게 입을 맞추었다.
수줍게 맞닿았다 떨어진 입술은 그에게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이고도 진솔한 허락이었다.
잠깐의 틈도 아쉽다는 듯, 곧 결이 파도처럼 낮게 밀려왔다.
부드럽게 입술을 머금던 그는 숨결과 함께 단이를 파고들었다.
애초에 가로막는 것이 없었으니 손길은 더욱 자유로이 그 위를 유영하였다.
아직 젖어 있는 속속곳 자락에 그의 긴 손가락이 감겨들었다.
마치 깨지기 쉬운 도자기를 어루만지는 듯 조심스러운 손길에 단이는 온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 같았다.
서로를 갈망하는 열기에 촉촉하게 남은 물기마저 살갗 위에서 증발하듯 사라졌다.
일렁이는 촛불을 따라가듯 두 사람의 그림자가 바닥으로 길게 드리워졌다.
구름 위에 누운 듯 포근한 이불이 등에 닿음과 동시에 견고한 몸이 안락하게 몸을 눌러왔다.
촉, 촉. 입술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어김없이 붉은 꽃이 피어오르니.
차도 없는데 온 방이 향긋한 내음으로 가득 차는 듯하였다.
등골을 타고 뜨거운 숨결이 흘러내릴 때마다 단이는 바르작 몸을 떨었다.
“나리…….”
어지러운 숨결 가운데 애틋하게 새어 나온 부름이 결의 입술을 다가오게 만들었다.
그녀의 유약한 숨결과 함께 입술을 또 한 번 머금은 결이 애정 가득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걱정 말거라.”
더없이 소중한 나의 여인.
“죽음조차도 너와 나를 갈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니.”
모든 걸 바쳐서라도 지켜내고 싶은 나의 전부.
내 삶의 모든 중심이 너에게 있다.
“그러니 나를 믿어다오. 나는 절대로 널 떠나지 않을 것이다.”
하여 네가 없으면 나 또한 존재할 수가 없다.
우리가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나는 기꺼이 이 저주도 평생 끌어안고 살 수 있다.
너를 만나기 위해서라면 이깟 저주마저도 나에겐 감미로운 것이다.
우리의 연은 처음부터 그렇게 깊이 얽혀 있는 것이었다.
너는 곧, 나의 구원이니.
“단이야.”
땀에 엉기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귀에 걸어 준 결이 단이의 작은 얼굴을 감쌌다.
그러곤 온 진심을 담아 말하였다.
“너를 사모한다.”
한 자 한 자 그녀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질 수 있도록.
그 누구도 감히 쉽게 지울 수 없도록.
“내 모든 삶을 다 바쳐서, 너를 아주 깊이 연모하고 있다.”
연모라는 말만으로 이 마음을 전부 표현할 수 없으나, 애석하게도 이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연모뿐이라.
다행히 그 마음이 온전히 전해진 건지 단이가 눈물진 눈가에 어여쁜 미소를 그렸다.
“저도요. 저도 나리를 사모하여요.”
이 삶은 이미 오래전부터 당신께 속해 있었으니.
그러니 나의 사랑, 나의 세상.
이 행복을 부디 끝까지 지켜주시길.
내가 영원토록 당신의 곁에 있을 수 있도록.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입술을 찾아들며 하나가 되었다.
옆방에 다른 객들이 있다는 사실도 그들의 열기를 식히기엔 부족하였다.
하여 숨죽인 신음은 이불 밖을 새어나가기도 전에 서로에게 스며들었으니.
밤이 깊도록 고요한 가운데, 애타는 한숨 소리만 오래도록 열락을 품었다.
***
낮의 참상마저 전부 암흑에 뒤덮인 산.
스산한 부엉이 울음소리가 연달아 을씨년스럽게 수풀을 헤집는 가운데, 한 사내가 시린 입김을 낮게 내뱉으며 걸어 나왔다.
어둠 속에 완전히 스며들 만큼 온몸을 두른 검은 천 사이로 형형한 두 눈동자가 드러났다.
바로 낮에 기습을 꾸몄던 자객 중 하나였다.
그는 혹여나 증거가 될 만한 것이 있을까 싶어 마지막까지 숲에 남아 수습을 하던 차였다.
‘조선의 왕도 별거 아니네. 기습을 당하니 꽁지 빠지게 도망가는 꼴이란.’혼자 쿡쿡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린 자객이 자리를 떠나려던 순간.
휘익!
“억……!”
어디선가 갑자기 날아온 화살이 자객의 왼쪽 가슴을 정확히 관통하였다.
살려 달라 구걸 한 번 해보지 못한 자객은 눈조차 감지 못한 채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자객이 손끝에 이는 마지막 경련을 끝으로 숨을 거둔 후.
차갑게 식어가는 몸 위로 또 다른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림자의 주인, 성조는 허리를 숙여 자객의 첩개(貼介)에 담긴 화살 중 하나를 꺼내 살폈다.
붉은 화살 깃.
그 아래 적혀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숫자 오(五).
“…….”
숫자를 확인한 성조가 자객의 몸에서 첩개를 떼어 등에 메었다.
그는 시신을 끌고 가 수상해 보이는 옷가지를 전부 벗기고 문신의 흔적까지 전부 지웠다.
그러곤 깊은 바윗골 아래로 떨어트려버렸다.
현장을 떠나는 그의 등 뒤에서 붉은 깃 화살 네 대가 절그럭절그럭 기이한 소리를 내다 이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