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늦은 밤.
촛불 여러 대가 불을 밝히고 있는 준백의 사랑방 다탁 위에 활과 화살이 든 첩개가 올라왔다.
그것을 힐긋 내려다본 준백이 다시 눈을 들어 맞은편에 앉아 있는 성조를 보았다.
“이게 무엇인가?”
“낮에 있던 소란 중에 중요한 물건을 하나 잃어버려 찾던 중에, 재미있는 것을 하나 발견하여 대감께 보여드리고자 가져왔습니다.”
일렁이는 촛불에 성조의 얼굴 위로 음영이 드리웠다.
느긋하게 띤 호의적인 미소가 언뜻 서늘하게 보였다.
준백이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자 성조가 첩개를 조금 더 앞으로 내밀며 권하였다.
“꺼내 보시지요. 대감께서도 아주 마음에 들어 하실 겁니다.”
한쪽 눈썹을 까딱거린 준백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첩개를 들어 살폈다.
그런데 안에 들어 있는 화살 중 하나를 꺼내어 살피던 준백의 낯빛에 얼핏 금이 갔다.
붉은 깃에 숫자 오(五).
바로 오늘 유렵에서 결이 썼던 화살이었다.
‘이게 왜…….’동시에 결을 함정에 빠트리기 위해 자객단에게 나누어준 화살이기도 하였다.
첩개 안에 든 화살은 유렵에서 결이 쓴 화살과 구분하기 힘들 만큼 똑같은 것이었다.
처음엔 그저 수사에 혼동을 주기 위한 장치로 쓸 생각이었으나, 난동 가운데 결이 이선의 곁을 비운 것은 하늘이 도운 셈이었다.
그 틈을 타 이 화살로 왕을 겨냥하기까지 하였으니.
계획대로라면 수일 내로 의금부가 결을 잡아들일 것이었다.
감히 임금을 시해하려던 반역죄로 말이다.
한데 그 과정에서 성조가 계획을 알아차린 것이다.
이것이 어떤 변수로 작용할지 모르기에 준백은 최대한 표정을 갈무리하며 모르는 척 입술을 떼었다.
“오늘 유렵에서 쓰인 화살 같은데……. 그러고 보니 자네가 오늘 홍색 조였지. 자네 것인가?”
그 말에 성조는 짧은 실소를 머금으며 제 앞에 놓인 잔을 들었다.
아직 김이 피어오르는 차를 천천히 입안으로 흘려보낸 그는 역시나 감정 하나 비치지 않는 얼굴로 말하였다.
“제가 끝까지 남아 있지 않았더라면 큰일이 나실 뻔하였습니다.”
질문과는 전혀 상관없는 동문서답.
준백이 미간을 좁히며 무슨 뜻인지 표정으로 물었다.
“그 멍청한 놈이 밤이 깊도록 겁도 없이 사냥터에 남아 있더이다.”
멍청한 놈.
누굴 일컫는 것이냐 묻기도 전에 준백의 머리 위로 자객단이 떠올랐다.
오늘의 기습이 누구로부터 시작되었는지 성조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얼굴 근육이 굳어지는 것을 느낀 준백은 초조함이 드러나지 않게, 그러나 다소 어색함이 묻어나는 손길로 찻잔을 들어 마른 입술을 적셨다.
이번 일은 다른 대신들에게도 거의 알리지 않고 아주 소수로만 꾸민 일이었거늘.
‘거기서 말이 새어나갔을 리는 없는데…….’설마 저 화살 하나로 자신의 계획을 전부 꿰뚫었다는 말인가.
날 서린 눈동자가 그제야 벨 듯이 성조에게로 향하였다.
생각의 흐름을 모두 읽었다는 듯 성조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문제는 저와 그놈만 그곳에 남아 있던 게 아니었다는 것이죠.”
애써 평정을 유지하던 준백의 표정이 한순간에 굳어졌다.
더 이상의 여유는 사치였다.
준백은 결국 시치미 떼던 것을 멈추고 시인하는 뜻을 보였다.
“……그게 누구였는가.”
“아마 놈을 호랑이로 착각한 사냥꾼이거나, 혹은 주상 전하 쪽 사람이겠지요.”
“상대를 보지 못했다는 뜻인가?”
“근처에서 비명이 들리기에 가 보았더니 이미 놈이 쓰러져 있었습니다. 심장 한가운데를 단 한 발로 명중한 것을 보아 보통 실력은 아닌 듯했습니다.”
새삼 섬뜩할 게 없는 대화인데도 준백은 이상하게 가슴 한쪽이 서늘해지는 것 같았다.
아마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저 새파랗게 어린놈의 눈빛 때문이리라.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는 것일까.
협박이라도 한다면 당장 이 자리에서 죽이리라.
그리 생각하며 방석 아래 숨겨두었던 단도를 집으려던 찰나.
“걱정 마십시오. 다행히 누군가 오기 전에 제가 시신을 수습하였으니.”
“……자네가 수습하였다고?”
“저희 쪽에서 먼저 발견했으니 망정이지요.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기라도 했다면 대감께서 곤란해지실 것이 아닙니까?”
성조는 오히려 당연한 일을 했다는 듯 말하였다.
편을 가르는 단어 선택에서조차 그는 완벽한 준백의 사람이었다.
“비가 온 뒤라 강물이 불어나고 유속이 빨라져서 저쪽에서도 쉽게 시신을 찾아내진 못할 겁니다. 만에 하나 발견하더라도 그저 재수 없게 강물에 빠진 사람 정도로 생각할 테지만요.”
그러면서 철저하게 뒤처리를 하였다는 확신까지.
한껏 그를 의심하였던 준백은 한순간 긴장을 풀며 단도를 쥐려던 손을 거두었다.
안도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실소가 새어 나왔다.
‘이제 정말로 북귀 놈에게 등을 돌린 것인가.’첩개를 들고 왔을 때만 하여도 역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막상 뒷일을 처리했다고 하니 내내 바위처럼 들어앉아 있던 언짢음과 찝찝함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이제야 성조가 완벽히 자신의 밑으로 들어왔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준백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성조의 잔에 차를 채워주었다.
“잘하였네. 역시 머리 좋은 사람을 곁에 두면 후환이 없군.”
“그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운도 타고난 실력이지. 사주팔자가 괜히 있겠는가.”
“대감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다니 영광일 따름입니다.”
성조는 깊이 고개를 숙이며 술잔처럼 차를 받았다.
납작 엎드린 높이와 반비례하게 준백의 입꼬리 또한 올라갔다.
짧고도 비밀스러운 다연을 마친 후.
성조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마지막 인사를 올리는데, 문득 준백의 질문이 그의 어깨를 잡았다.
“한데, 첩개 안에 든 화살은 이게 다였는가?”
내내 그린 듯 호선을 유지하던 입술 끝이 살짝 경직되었다.
곁눈질로 첩개 안에 든 화살의 수를 센 성조가 조금 더 입가를 늘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가 발견하였을 땐 안에 든 화살은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혹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니네. 생각보다 많이 썼다 싶어서. 괘념치 말게.”
성조는 곁눈질로 열린 문 너머 첩개를 보았다.
입구 위로 비죽이 튀어나온 화살의 개수는 총 세 대.
처음 사냥터에서 발견했던 것보다 하나가 부족하건만.
“……그럼 평안한 밤 보내십시오, 대감.”
성조는 별다른 말 없이 또 한 번 깊이 허리를 숙이고선 그대로 대문을 나섰다.
그러곤 말을 탄 채 유유히 자리를 떠났다.
사라진 화살의 행방 또한 그와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음…….”
몸을 감싼 부드러운 이불의 촉감이 잠기운을 서서히 몰아내었다.
단이는 천근같이 느껴지는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려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어슴푸레한 새벽빛이 창호지에 스며들어 있는 가운데, 짙은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조금 더 고개를 드니 결이 막 철릭을 걸쳐 입고 옷고름을 매고 있었다.
벌써 나갈 때가 되었는가.
얼른 준비할 요량으로 몸을 일으키던 단이는 이불 아래 드러난 맨살에 놀라 황급히 이불을 끌어당겼다.
뒤늦게 어젯밤 그의 품에 안겼던 일들이 떠올랐다.
처음이 아니긴 하여도 아직 맨살을 훤히 보일 만큼 낯이 두껍진 않은 터라.
흩어진 옷가지들을 찾느라 단이의 두 눈이 부산하였다.
때마침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뒤를 돌아본 결이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벌써 일어났느냐. 아침 먹을 것을 먼저 청한 뒤에 준비가 되면 깨우려 하였거늘.”
부드럽게 문지르는 손길에 홍조를 띤 뺨이 말랑하게 밀려났다.
단이는 수줍은 마음에 바닥만 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였다.
“여기 계시면 제가 얼른 주모에게 갔다 올게요.”
“이 차림으로?”
결이 이불에 꽁꽁 둘러싸인 몸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채 이불에 가려지지 않은 맨 어깨 위로 그의 눈길이 스쳐 지나갔다.
꼭 손길이 지나간 것처럼 홧홧한 느낌이 일어 단이가 슬그머니 이불을 더 끌어올렸다.
그 모습에 작게 미소를 그린 결이 단이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곤 이마에 입술을 붙인 채로 나직이 말하였다.
“다행히 열은 나지 않는구나. 혹 무리를 하였나 싶어 걱정하였는데.”
그 말에 어김없이 단이의 목덜미가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차가운 물에 빠졌다 나온 데다 초가 완전히 녹아 사라지도록 그의 품에서 벗어나질 못하였으니.
열병이 오르지 않은 게 천만다행일 정도였다.
이미 경험을 하였는데도 부족하였던 것인가.
아니면 아는 것이라 더욱 참지 못한 것인가.
처음과 달리 어제의 결은 끝을 알지 못하는 사람 같았다.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게 숨만 죽였다 뿐이지, 전보다 더 노골적으로 단이를 깊이 탐하던 결이었다.
때문에 단이는 어떻게 버텼는지, 아니. 버티기는 하였는지조차 잘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부디 간밤에 다른 방의 객들이 깊이 잠들어 있었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천천히 채비하고 있거라. 주모에게는 내가 다녀올 터이니. 옷은 여기 놓아두었다.”
단이의 이마에 또 한 번 간지러운 소리를 내며 입을 맞춘 결은 차곡차곡 포개진 단이의 옷을 옆에 놔주곤 방을 나갔다.
밤사이 보송하게 마른 옷가지가 그의 손길을 거쳐 구김살 하나 없이 단정하게 개어져 있었다.
전날 단이가 잃어버렸던 목도리도 함께였다.
자신이 먼저 일어나 했어야 하는 일이거늘.
죄송한 마음과 더불어, 자신을 위해 마른 옷을 개는 결의 모습이 떠올라 괜스레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까.
북방 귀신이라 불리며 끔찍한 저주에 걸렸다는 장군이 사랑하는 여인 앞에선 이리도 다정한 사내라는 것을.
틈 하나 없을 것처럼 강인해 보이는 사내가 사랑하는 여인 앞에선 그리도 쉽게 무너지는 사내라는 것을.
세상 더없이 부드러운 손길을 가진 사내라는 것을.
단이 외에는 모두가 평생 알지 못할 것들이었다.
오로지 단이만이 결을 그런 사내로 만들어 줄 수 있기에.
옷을 갈아입고 간단히 아침 식사를 마친 뒤.
두 사람은 곧바로 길을 떠나지 않고 조금 더 방에 머물렀다.
그들 앞엔 주모에게 부탁하여 받은 작은 물그릇이 놓여 있었다.
눈을 감고 있는 결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단이가 조곤조곤한 말씨로 말하였다.
“힘들면 무리하시지 말고 바로 고개를 돌리시어요. 절대 억지로 하시면 아니 되시어요.”
“걱정 말거라. 나 또한 버티고 싶다고 버틸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
“그릇은 앞에 놓아두었으니, 나리께서 괜찮으실 때 눈을 뜨시어요.”
결이 낮게 숨을 내뱉었다.
그 또한 많이 긴장이 되는 모양인지 쉬이 눈을 뜨지 못하였다.
괜찮다, 괜찮다.
몇 번이고 괜찮다는 말을 되뇌며 스스로를 달랜 결이 천천히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헤매듯 허공을 떠돌던 시선이 이윽고 손바닥만 한 물그릇에 닿았다.
습관처럼 움찔한 손을 말아 쥐며 결은 투명한 물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마치 그릇 안에 얇고 투명한 막이 씌워진 듯하였다.
하여 안에 물이 담긴 것인지, 아니면 원래 저렇게 생긴 그릇인지 잘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그때, 옆 칸에서 다른 객이 나왔는지 쿵쿵거리는 발걸음에 수면 위로 옅은 파동이 일었다.
“…….”
그제야 제대로 물을 인식한 몸이 다시금 긴장에 휩싸이기 시작하였다.
심장이 빠르게 뛰며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다 까맣게 죽기를 반복하였다.
그리고 다시 물.
그 가운데 서서히 번지는 피.
물그릇에서 넘쳐 나와 검은 동공까지 물들이는 짙은 핏빛에 그의 호흡이 거칠어지던 그때.
“저것은 그냥 물이어요.”
굳게 말아 쥔 주먹 위로 단이의 손이 얹어졌다.
차가운 강물 속에서 그의 정신을 붙잡던 따스한 목소리와 함께.
“나리를 결코 삼키지 않을, 우리가 마시면 그대로 사라져버릴 물.”
“…….”
“저것은 우리를 살리는 물이어요.”
결은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다시 눈을 뜨자 눈앞엔 처음과 같은 한없이 투명한 물만 보였다.
‘……가족들의 피가, 아니야.’
여전히 맥박은 불안정하게 뛰고 식은땀이 축축하게 배어 나왔지만, 예전처럼 발작을 일으키진 않았다.
그의 저주가 서서히 옅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말로 설명 못할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잘하시었어요. 정말 잘하시었어요.”
이 이상은 아직 무리인 것 같아 다시금 눈을 감으니, 단이가 그의 얼굴을 감싸 안으며 가만가만 등을 다독여 주었다.
“이렇게 하시면 돼요. 앞으로도 하나하나 천천히, 이렇게 이겨내 가시면 되어요.”
단이 또한 감정이 동하여 목소리 끝이 살짝 떨려왔다.
비로소 결이 과거의 아픈 기억으로부터 한 발짝 나아간 것 같아 더없이 기뻤다.
“……고맙다, 단이야.”
단이가 아니었다면 감히 상상도 못 했을 일이었기에.
결은 한참을 그렇게 단이에게 안긴 채 이 순간을 가슴에 깊이 새겼다.
“이랴!”
이윽고 두 사람을 태운 흑마가 한양을 향해 힘차게 내달렸다.
이제 모든 것이 잘 될 것만 같았다.
하나 이들에게 남겨진 길은 그리 평탄하지만은 않았으니.
“나리……. 저게 대체…….”
도성 문을 앞두고서 결의 흑마가 급히 자리에 멈춰 섰다.
서결을 잡기 위한 의금부 관원들이 그 앞을 지키고 선 까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