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비, 아찔하게 흐르는-88화 (88/100)

88화

무거운 침묵이 편전의 바닥을 짓눌렀다.

누구 하나 쉬이 말을 꺼내지 않았지만, 공기 중에 부유하는 기운은 말보다 더 거센 의지를 갖고 이선을 압박하고 있었다.

기어이, 기어이 또 사달이 나고 말았다.

지난 기습 때 결이 그의 다비를 찾으러 간 사이, 그가 유렵 때 사용하였던 화살이 이선의 앞으로 날아왔던 것이다.

마치 결이 이선의 곁을 떠나기를 기다려왔다는 듯이.

간발의 차로 화살을 피하였지만 놀란 말이 몸을 틀면서 이선이 낙마를 하고 말았다.

이는 감히 임금을 시해하려 한 죄라.

신료들은 당장 역모죄로 결을 처형해야 한다며 강하게 주장하였다.

이선은 눈을 질끈 감으며 깊이 숨을 내쉬었다.

‘내가 내 손으로 결을 사지에 내몰았구나.’자신의 앞으로 날아왔던 화살이 결의 짓이라고는 추호도 믿지 않았다.

만일 결이 정말로 자신을 죽일 계획을 갖고 있었다면 굳이 자리를 벗어나서까지 공격을 하진 않았을 테니.

곁에 내금위가 있었다곤 하나 마음만 먹으면 그는 얼마든지 자신을 해칠 수 있었다.

하나 결에겐 그럴 만한 이유도, 또 여유도 없지 않았는가.

‘그는 분명 그때 다비를 구하러 갔었다. 그 계집종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끼지 않을 인데…….’그에게 다비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기에 보냈던 것이거늘.

설마 누군가 그 틈을 노려 이런 계략을 꾸몄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선은 좌우로 줄지어 선 신료들을 굳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모두들 타협의 여지는 일절 없다는 듯 눈빛이 견고하였다.

누가 누구를 죽이고자 하는 것인가.

마치 수백의 창과 방패를 앞에 둔 것처럼 숨이 막혀 왔다.

“전하.”

이선이 쉽사리 입을 떼지 못하자,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준백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절충장군 서결은 감히 전하의 안전을 위협한 자이옵니다. 추궁할 여지도 없이 명백한 증거가 나왔사온데, 어찌 망설이시는 것이옵니까?”

다음날 현장에서는 붉은 깃에 오(五) 자가 적힌 화살이 이선의 앞으로 날아온 것까지 합하여 네 대나 더 발견되었다고 한다.

한 신료는 자신이 저 화살에 맞아 팔이 다쳤다고까지 증언하였다.

누구는 활을 쏘는 결을 멀리서 보았다고까지 말하였다.

정황과 피해가 명백한 상황에서 이선은 무작정 결을 감쌀 수조차 없었다.

‘그나마…… 나에게 남은 것은.’이선의 눈동자가 향한 곳은 좌찬성, 정회의 얼굴이었다.

그의 아들이 전해 달라 부탁하였다며 남몰래 건네었던 기다란 함.

그리고 그 안에 들어 있던 열일곱 대의 화살들.

사용한 흔적이 전혀 없는 한 대의 화살을 제외하고 나머지 열여섯 대의 화살은 모두 화살촉 부분이 부러지거나 흙과 피가 묻어 있는 등 흔적이 남아 있었다.

피가 묻어 있던 것은 분명 유렵 때 결이 잡은 짐승에게서 뽑아온 것 같았다.

하나 나머지 깨끗한 화살은 어째서 함께 들어 있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결이 유렵 때 사용한 것이 분명한 화살들은 조사를 위해 의금부에 넘겼으나, 나머지 한 대의 화살은 묘한 기분이 들어 그가 직접 보관하고 있었다.

사용한 화살들과 전혀 사용한 흔적이 없는 새 화살.

‘내게 분명 전하고픈 말이 있는 것 같은데…….’아무리 생각하여도 뚜렷한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하니 이유를 알아낼 때까진 어떻게든 결정을 보류하여야 한다.

그래야 결을 빼낼 수 있는 틈을 만들어볼 수 있을 테니.

“아까도 경들에게 이야기했다시피, 서결 장군을 다른 곳으로 보낸 것은 나의 명이었다. 서결 장군이 과인을 해치려 하였다면 그곳에서 바로 검을 꺼내지 않았겠는가. 그날 서결 장군은 그 누구보다 성심껏 과인을 호위하던 자였다.”

그 말에 다른 신료가 당당하게 나서 반론하였다.

“누가 감히 전하의 앞에서 대놓고 검을 드러낼 수 있겠습니까? 만에 하나 일이 틀어질 경우를 대비하여, 일부러 몸을 숨긴 뒤 공격을 하였을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말이 되지 않는다! 경은 본인임을 밝히고 싶지 않았다는 이가 본인이 사용했던 화살로 공격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거야말로 어불성설이다.”

단번에 허점이 찔린 신료가 민망한 듯 입을 다물었다.

이선은 눈으로 신료를 책망하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차라리 누군가 서결 장군의 화살을 몰래 빼돌려 모함을 하려 했을 가능성이 훨씬 더…….”

그때, 무심코 던진 말이 그대로 되돌아와 이선의 뇌리를 강하게 쳤다.

사용한 흔적이 확실한 화살들 가운데 아무 흔적도 없는 깨끗한 화살 하나.

시선을 옮기자 내내 침묵만을 유지하던 정회가 전과 다른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이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거였군.’성조가 보내온 열일곱 대의 화살과 현장에서 발견된 네 대의 화살.

이 모든 화살의 수를 합하면 본디 유렵 때 나눠주었던 화살의 수를 넘어선다.

누군가 유렵 때 결이 사용한 화살과 똑같은 것을 준비하여 일부러 그인 척 기습을 꾸몄다는 뜻이 된다.

유일하게 새것 같던 그 화살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이미 서결 장군은 일전에 거짓으로 모함을 받아 한차례 고초를 겪은 일이 있다. 이번 일이라고 어찌 같은 상황이 아니라 할 수 있겠는가?”

“하오나 전하.”

“이번 일은 더욱 철저히 수사에 붙여 반드시 진위를 가려낼 것이니, 경들 또한 더 이상 사사로운 이유로 과인을 어지럽히지 말라.”

사사로운 이유.

이번 일 역시 대신들이 주도하여 모함한 것이 아니냐는 이선의 직접적인 경고였다.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전하.”

그 뜻을 알아챈 준백은 냉랭한 기운을 두 눈에 품은 채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깊이 얼굴을 숨긴 그의 입가에서 비릿한 조소가 번졌다.

시간을 벌어보았자 그 또한 낭비일 뿐이었다.

결이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도 없거니와, 설령 방법을 찾는다 한들 그땐 이미 늦게 될 테니.

대의의 날.

그날이 오면, 어차피 이선과 결 모두 그들의 손에 사라지게 될 것이었으므로.

***

탁, 탁, 탁.

바쁘게 땅을 짚던 긴 지팡이가 어느 대문 앞에 멈춰 섰다.

한 손에는 주파를, 다른 한 손에는 긴 지팡이와 묵직한 보따리를 든 노인, 충선이 삿갓을 들어 올렸다.

그는 쯧, 혀를 차며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았다.

“염병……. 늙으니까 쓸데없는 오지랖만 늘어 가지고. 그래도 주인이 자리를 비워 다들 상심이 클 테니……. 아니, 근데 그 상심을 내가 왜 달래? 어휴, 이 썩을 노인네.”

한참 혼잣말로 이랬다저랬다 불퉁한 말을 중얼거리던 충선이 이내 신경질적인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대문 앞으로 다가가 여전히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사람을 불렀다.

“이리 오너라!”

호통에 가까운 걸걸한 목소리에 곧 대문 너머로 종종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뉘시온데…… 아, 영감께서 오셨습니까.”

대문을 열고 나온 덕원이 충선을 알아보곤 허리를 깊이 숙였다.

“한데, 지금 도련님께서는…….”

“이미 소식 듣고 온 것이니 걱정 말게. 잠깐 애들 얼굴이나 보려고 온 것이니.”

“그럼 안으로 드시지요.”

“주인 없는 사랑에 들어갈 만큼 광증이 도지진 않았네. 시간 없으니 애들이나 빨리 불러주게.”

충선의 채근에 덕원은 하는 수 없이 손님을 세워두고 단이와 보선 어멈을 부르러 갔다.

잠시 후, 덕원과 보선 어멈의 뒤를 따라 나온 단이의 얼굴은 예상대로 많이 상해 있었다.

결의 추포를 가장 가까이서, 그것도 두 번이나 목격한 아이다.

하물며 이번엔 역모에 휘말렸다고 하니 더욱이 그 속이 타들어갈 수밖에.

세상을 잃은 듯 까맣게 죽어버린 두 눈동자는 제 앞에 누가 있는지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는 듯하였다.

“쯧쯧……. 그러게 내 가자 할 때 따라왔으면 좋았을 것을. 기어이 고집을 부리더니 이런 사달에 휘말리는구나.”

말은 모질게 하여도 얼굴엔 근심과 걱정이 가득이라.

충선은 보선 어멈과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는 단이에게 들고 온 보따리를 건네었다.

단이가 보따리를 받을 생각은 않고 멍하니 보기만 하니 충선이 미간을 확 구기며 팔을 까딱였다.

“늙은이 팔 빠지게 할 셈이냐? 얼른 받아라.”

“이것이…… 무엇이어요?”

“유자를 얇게 저며 말린 것이다. 겨울나기에 이만한 거 없다.”

유자라면 임금이 특별히 하사하거나 명나라 사신에게 선물할 정도로 귀한 과일이었다.

특히 제철인 요즘은 기운을 나게 하는데 특효약이었다.

충선 역시 쉬이 취하지 못하는 과일이었으나, 단이가 눈에 밟혀 결국 이리 가져오고 만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주파 할아버지.”

단이는 받아든 보따리를 하염없이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것을 달여 결에게 주면 좋으련만.

정작 차를 마셔야 할 이는 이곳에 없으니 더욱 마음이 침전하였다.

이 추운 날 옥에서 또다시 힘겨운 시간을 버텨야 할 터.

그런 결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그녀를 더욱 괴롭게 만들었다.

‘어쩌다 이런 일에 휘말려 가지고.’잔뜩 상심한 단이를 바라보는 충선의 속도 썩 좋지는 않았다.

마음 같아선 지금이라도 모든 걸 훌훌 잊고 제 뒤를 따라오라 하고 싶건만.

‘쥐방울만한 것이 고집은 황소고집이라.’충선은 괜스레 착잡해지는 마음을 나직이 욕지거리로 뱉어내며 빠르게 인사를 건넸다.

“이만 가봐야겠다. 괜히 늑장 부렸다가 해 떨어지고 산에 발길 묶일라.”

그 말에 보선 어멈이 눈썹을 좁혔다.

“또 어디로 가십니까? 곧 길도 얼 것인데.”

“당분간 좀 떠나 있을 생각이다. 이맘때쯤 한양에 있으면 괜히 속에서 욕지기가 올라와서. 전할 소식 있거든 도가꾼 놈들한테 말해 놔.”

“날도 점점 추워지는데, 댁에 계시지 않고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인데, 길에서 얼어 죽으나 집에서 혼자 죽나.”

“또 엄한 말씀 하십니다!”

보선 어멈이 타박을 하여도 충선은 귀찮다는 듯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주름진 눈은 곧 혼자 넋을 놓고 있는 단이에게로 향했다.

무어라 말을 해야 저 아이가 힘을 낼까.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스스로가 낯설면서도 차마 저 아이를 외면할 수가 없었다.

이런 게 죽은 벗에 대한 그리움일는지.

“몸 잘 챙겨라. ……곧 나오겠지.”

평생 빈말이라곤 해본 적도 없거늘.

충선은 어울리지 않게 단이를 위로하고는 터벅터벅 쓸쓸히 발길을 돌려 집을 나섰다.

만에 하나 재수 없게 결이 역모 판정을 받게 된다면 이 집에 있는 가솔들 또한 앞날을 장담치 못할 터.

“젠장, 지금이라도 데리고 나와야 하나.”

단이와 보선 어멈이 마음에 걸려 쉽사리 대문 앞을 떠나지 못하는데, 무심코 돌아본 시선에 낯익은 얼굴 하나가 걸렸다.

눈이 마주친 그가 급히 말을 돌리려 하자 충선이 부러 큰 목소리로 외쳤다.

“네놈이 여긴 웬일이냐?”

고삐를 잡아당기던 팔이 한숨처럼 힘을 잃었다.

성조가 사뭇 원망 어린 눈으로 충선을 보았다.

필요할 땐 그렇게 기생오라비인 양 사근사근 눈웃음을 치더니.

이젠 아예 대놓고 언짢은 얼굴을 드러낸다. 썩을 것.

‘듣자 하니 저놈이 요즘 붙어선 안 될 것 뒤에 붙었다던데…….’

충선이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에 잠긴 사이.

말에서 내려온 성조가 억지로 허리를 숙이고선 되물었다.

“그러는 영감께서는 어쩐 일이십니까.”

“떠나기 전에 곧 풍비박산할 집 구경하러 왔다. 너도 그러냐?”

양심이라도 찔리라고 일부러 비꼬듯이 말하니, 성조의 미간에 언뜻 금이 그어지다가 사라졌다.

예전엔 뭔 짓을 해도 속을 알 수 없을 만큼 표정 꾸미기에 능하더니.

짧은 새에 무슨 변화가 있었기에 이리도 불안정해졌나 싶었다.

그래도 염치는 남아 있는지 전보다 얼굴빛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곧 한숨인지 뭔지 모를 것과 함께 표정을 갈무리한 성조가 인사치레처럼 입을 열었다.

“영감께서는 어디 먼 곳이라도 가시는 겁니까?”

“포천에 가려 한다. 한양은 잠시만 있어도 지긋지긋해.”

포천이란 말에 성조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포천 말씀이십니까?”

“거기 노승 하나가 그나마 차 비스름한 걸 끓일 줄 알아서. 왜, 너도 추위니 뭐니 하는 이유로 노인네 앞길 막을 셈이냐?”

“그런 게 아니라, 지금 그쪽으론 가실 수 없을 겁니다.”

“내가 가겠다는데 누가 막는다고?”

“역병이 크게 돌고 있다 하였습니다.”

충선은 뭔 되지도 않는 소리냐며 인상을 구겼다.

“뭔 역병 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 내 도가꾼 놈이 얼마 전에 그곳에 술 배달을 하고 왔는데.”

그는 절대 그럴 리 없다며 손사래까지 쳤다.

“역병이 돌고 있었다면 놈이 내게 언질을 주지 않았을 리가 없다. 간이 콩알만 한 놈이라 조금이라도 옮겨 왔을 성싶으면 제일 먼저 집에 처박혔을 놈이야, 그놈이.”

“도가꾼이 돌아온 게 언제입니까?”

“나흘 전쯤에 돌아왔으니, 포천에서 떠난 건 늦어도 열흘 전이었겠지.”

성조의 눈동자가 차갑게 굳어졌다.

무언가 이상했다.

열흘 전이라면 역병으로 고을을 폐쇄하기 이틀 전이 아닌가.

한데 도가꾼이 역병 환자를 한 명도 못 보았다는 게 말이 안 된다.

아무리 마을 사람들이 쉬쉬거린다 하더라도 폐쇄까지 갈 정도면 이미 병이 어느 정도 퍼졌다는 뜻이니.

‘마을을 폐쇄해야만 하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가?’고심에 잠겨 있던 성조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영감. 우선은 떠나지 말고 댁에 안전히 계십시오.”

급히 충선에게 허리를 숙인 성조가 곧장 말에 올라타 어디론가 빠르게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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