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비, 아찔하게 흐르는-89화 (89/100)

89화

빠르게 해가 기운 밤하늘 아래.

성조의 발이 답지 않게 마당을 서성거렸다.

작은 기척에도 멈춰 서서 귀를 쫑긋 세우던 그는 자신이 기다리던 소식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다시 마당에 의미 없는 발자국을 수놓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도련님, 도련님!”

초조해하던 성조의 발이 드디어 대문 안으로 달려오는 청지기를 보곤 우뚝 멈춰 섰다.

그는 청지기가 숨을 고를 시간도 주지 않고 다그치듯 물었다.

“어찌 되었는가, 좀 알아낸 것이 있는가?”

“허억, 헉…… 아이고, 숨차라. 잠시만요, 도련님.”

잠시도 늦으면 안 된다는 성조의 으름장에 어찌나 발이 닳도록 뛰어다녔는지. 청지기는 금방이라도 숨이 꼴딱 넘어갈 것처럼 거칠게 헉헉거렸다.

그 짧은 순간도 기다리기 힘든지 성조는 바짝 타는 입술을 깨물며 대답을 재촉하였다.

겨우 말을 뱉을 정도로 진정한 청지기가 고개를 크게 내저었다.

“없습니다.”

“없다고?”

“예. 진위 장군께선 이미 달포 전부터 훈련원에 등청하지 않고 계신다 하였습니다.”

“이유는 무어라 하던가?”

“국경선 감찰이라 하였습니다. 듣기론 평안도 쪽에서 변란이 일어나 병력 지원 요청이 있었다고 하는데, 조사차 떠난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 말에 성조의 두 눈이 심각한 빛으로 굳었다.

한동안 훈련원을 살필 여력이 없어 진위가 자리를 비운 것도 모르고 있었다.

기억하기론 최근 북방 경계선 쪽에선 어떠한 병력 지원 요청도 오지 않았다.

그런데 감찰이라니?

무엇보다 지방의 변란이라면 순무어사를 특사로 뽑아 보내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이래저래 석연찮은 부분들이 많았다.

그 의아함을 헤아린 청지기가 목소리를 한층 더 낮추어 말하였다.

“간신히 캐어 들은 이야긴데, 관련 기록을 대감마님께서 폐기하라 명하셨다 합니다.”

“……아버지께서?”

“예. 그저 대략적으로만 표기하고 자세한 이름 등은 절대로 남기지 말라고 하셨답니다.”

그제야 어긋난 톱니가 다시 맞물리는 기분이었다.

현재 훈련원의 총수를 겸하고 있는 관직은 좌찬성이었다.

그의 관리하에 있으니, 파견을 보내는 것 또한 임의로 조절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날의 읍소가 아버지에게 통했던 걸까.

정회 역시 뜻을 함께하고 있다는 생각에 성조는 한순간 기분이 묘해졌다.

‘이제 남은 것은 결이 무슨 연유로 진위를 북방에 보냈는지 알아내는 것인데…….’직접 결에게 가서 계획을 물어볼 수만이라도 있다면 좋으련만.

준백의 영역 안에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자신을 향한 그의 감시 또한 늘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태생이 의심 많고 경계가 심한 인물이라.

겉으로는 어느 정도 신임을 얻은 듯하였으나 아직은 조심해야 할 것이 많았다.

아무리 물심양면으로 그들을 돕는다 한들, 준백은 끝까지 의혹의 눈길을 거두지 않을 것이라.

하여 지금은 함부로 결과 소식을 주고받을 수조차 없었다.

어찌해야 좋을까.

빨리 뾰족한 수를 내어야 할 텐데 속이 어지러운 까닭에 제대로 된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일단 알겠네. 수고했네.”

청지기를 안으로 들여보낸 뒤, 성조는 복잡한 생각을 정리할 겸 말을 끌고 밖으로 나왔다.

한참을 돌아다니던 끝에 멈춘 곳은 의금부 청사 앞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차마 들어갈 수도 없는 이곳을 찾아온 것이었다.

하나 건물에 답이 있는 것도 아니니, 막상 도착하여도 막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낮게 한숨을 내쉰 성조가 다시 고삐를 잡아 말을 돌리려던 찰나였다.

“혹 한 좌랑 되시오?”

청사 앞을 지키고 있던 당직원이 은밀히 소리를 죽여 물었다.

어찌 나를 찾는가. 성조가 사뭇 경계하는 빛을 보이며 그를 돌아보았다.

“그렇소만. 무슨 일이오?”

당직원은 연신 주위를 경계하다가 성조에게 황급히 작은 쪽지 하나를 건네었다.

“한 좌랑께서 찾아오시면 이것을 꼭 전해달라 하시었소.”

예기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성조가 종이를 받아들고도 의아한 표정을 풀지 못했다.

대체 누가?

게다가 자신이 올 것을 어찌 알고 이것을 준비해두었단 말인가.

“누가 전하라 한 것이오?”

“내용을 보면 아실 것이라 하시었소.”

당직원은 더 이상 해줄 얘기가 없다는 듯 고개만 한 번 꾸벅 숙이고서 다시 정면만 보았다.

뭔가를 더 묻고 싶어도 그 역시 알고 있는 게 많지 않아 보이는지라.

곧 성조는 장소를 벗어나 한적한 곳에서 받은 종이를 열어보았다.

익숙한 필체는 분명 결의 것이었다.

-진위는 약탈과 사냥꾼에 대해 조사하러 갔으나 시일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다. 여건이 된다면 혹 소식만이라도 부탁한다.

간결하게 쓰인 편지를 읽은 성조의 눈동자가 옅게 떨렸다.

편지 말미에 적힌 마지막 끝맺음.

-미안하다.

그것이 그의 눈동자에 시리게 새겨졌다.

무엇이 미안하다는 걸까.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이?

아니면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이?

그도 아니면…….

“……자네가 왜, 미안하다 하는 건데.”

어차피, 이리 될 운명인 것을.

우린 그저 그 거대한 소용돌이에 휘말려 벗어날 수조차 없는 것을.

굳게 손을 말아 쥐자 종이 역시 함께 구겨졌다.

모르겠다. 알 수가 없다.

무엇을 미안하다 하는 것인지, 또 이 감정을 어찌해야 좋을지.

확실한 것은 결이 보낸 편지로 말미암아 복잡하게 얽혀 있던 생각들이 정리되었다는 것이고, 그로 인해 자신이 어떤 계획을 짜야 할지 알았다는 것일 뿐.

“끝까지 망가져 보면 알 수 있겠지.”

이 빌어먹을 상황이 어떻게 끝나게 될지도.

성조는 볼품없이 구겨진 종이를 근처 횃불에 던져 태워버리고선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

며칠 후.

용상에 앉은 이선이 수심 깊은 눈으로 앞을 보았다.

모든 것을 체념한, 싸움에서 진 패자의 눈빛이었다.

“과인은, 서결 장군을…….”

그의 말을 들은 준백이 얇은 입술을 길게 늘였다.

승리자는 허리를 깊이 숙이며 비로소 오랜 숙원을 이룬 목소리로 말하였다.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전하.”

이외에도 이선은 최근 역병이 도는 마을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몇몇 관원들을 추가로 더 파견할 것을 명하였다.

곧 조정에서는 두 갈래 길로 나뉠 무리가 형성되었다.

한쪽은 유형(流刑)을 위한 무리.

그리고 다른 한쪽은 역병이 돌고 있다는 포천을 관리하기 위한 무리였다.

***

수일이 지나도록 결에 관해선 아무런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

또다시 혼자가 된 단이는 이전처럼 열리지 않는 대문만 바라보는 대신 쉬지 않고 몸을 움직였다.

아무도 시키지 않은 일까지 스스로 찾아다니며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그렇게 매 순간 빈틈없이 치열하게 보냈다.

겉보기엔 정말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다만 잠시라도 넋을 놓고 가만히 있으면 곧 불안이 온몸을 휘감았으니.

“나리…….”

결이 쓰던 사랑방을 청소하던 단이는 기어이 자각하게 된 현실에 참았던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언제나 나리께 차를 올리던 다탁은 아무리 쓸고 닦아도 빠르게 먼지가 쌓였고, 무예를 연습하시던 마당에는 황량한 바람만 쓸쓸히 지나가 그의 빈자리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세상이, 하늘이, 나의 전부가 사라졌다.

아무리 외면하려 해도 도무지 잊을 수가 없었다.

결국 안간힘으로 버티고 있던 이성도 무너지고 말았다.

“흐흑, 나리……!”

눈을 질끈 감고 두 손으로 입을 막아보아도 범람하는 눈물과 흐느낌을 감출 순 없었다.

처음엔 분명 희망이 있었다.

이번에도 며칠만 지나면 돌아오실 거라고, 이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전부 이겨내고 돌아오실 거라고 그렇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조악했던 그때의 모함과 달리 이번엔 부정할 수 없는 결의 실수가 분명 있었고, 하필이면 그것이 장수인 결에게 있어 가장 큰 흠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위기 시에 왕의 곁을 떠난 장수란 그 어떤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었으므로.

설령 왕이 허락한 일이라고 하여도 결과적으로 결이 떠난 후 왕이 다치게 되었으니, 지난번처럼 쉬이 책임을 피할 수 없을 터였다.

단이는 필사적으로 증언하였다.

산속에서 낯선 사람을 보았고, 또 자신을 지켜주던 다모에게 공격을 당하였노라고. 그리하여 결이 자신을 구하기 위해 강물에까지 뛰어들었노라고.

그러나 아무도 그녀의 말을 귀담아 들어주지 않았다.

도리어 계집종이 주인을 구하려 거짓 증언을 한다며 그녀를 벌하려고까지 하였다.

이번에도 결에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피해만 끼쳤다는 사실에 단이는 걷잡을 수 없이 괴로웠다.

왜 매번 이런 일이 일어날까.

자신은 정녕 결에게 해만 되는 사람일까.

끝도 없이 스스로를 괴롭히는 자책에 사로잡히면 모든 걸 놓고 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지쳐 쓰러질 때까지 울고 나면 불도 때지 못한 차디찬 바닥에 기진맥진하여 엎드렸다.

“나리…… 언제 돌아오시어요.”

단이는 너무 울어 붉게 부어버린 눈을 감으며 괴롭게 몸을 웅크렸다.

매서운 바람이 창호지를 뒤흔들며 그녀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완연하게 다가온 겨울에 모든 것이 생기를 잃고 쓸쓸함만 더해졌다.

온기를 잃은 바닥을 손으로 쓰다듬던 단이의 눈에서 또 한 줄기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리를 닮은 겨울이다.

차갑고, 서럽고…… 외롭고.

모두가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이제는 하나 남은 마른 잎마저 떨어트리려 하고 있었다.

이대로 영영 나리를 못 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아찔한 생각에 정신까지 아득해지던 그때였다.

“단이야, 단이야!”

보선 어멈이 혼비백산하여 내지르는 소리에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문을 열고 나오자 역시나 얼굴이 하얗게 질린 보선 어멈이 발까지 동동 구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단이는 덜덜 떨리는 두 손을 꼭 마주 잡으며 물었다.

“무슨 일이어요, 보선 아주머니. 어찌 그러시어요……!”

“도련님께서, 도련님께서 결국…….”

보선 어멈은 피눈물을 흘리며 울분에 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유형(流刑)을 받으셨다고 한다…….”

휘청, 중심을 잃은 단이가 결국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나리께서 유배라니.

한 번 가신다면 언제 다시 오실지 모르는 것이 아닌가.

“아니 되어요……. 아니 됩니다.”

멍한 눈으로 몇 번 고개를 내젓던 단이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가야 할 방향조차 알지 못한 채 무작정 대문 밖으로 뛰어나갔다.

이렇게 나리를 보낼 순 없었다.

죽어도 함께 죽고 살아도 함께 살지, 이렇게 나리만 사지로 보낼 순 없었다.

단이는 눈물로 뿌옇게 변하는 앞을 몇 번이고 닦아내면서 발길 닿는 대로 뛰었다.

머릿속에는 그저 무조건 결을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유배지로 떠나는 죄인의 길을 한낱 몸종이 어찌 막을 수 있겠냐마는, 지금 단이에겐 이성적인 사고 자체가 불가능했다.

어찌나 정신없이 달렸는지 신고 나왔던 신발은 전부 벗겨져 어느 순간 버선발로 흙길을 뛰고 있었다.

돌을 밟아도 아픈 줄을 모르고 뛰길 한참.

“서결 나리……!”

드디어 저 멀리 유배길을 떠나는 행렬이 보였다.

단이는 눈물을 흩뿌리며 결을 향해 달려갔다.

보통의 함거(檻車)라면 안에 탄 죄인의 모습이 훤히 보였으나, 결이 탄 함거는 나무 기둥이 빽빽이 들어차 있어 안이 잘 보이지 않았다.

좁은 틈으로 결의 인영을 어렴풋이 본 단이가 애타게 부르짖었다.

“나리, 아니 되어요! 이리 가시면 아니 되어요! 나리께서 무슨 잘못이 있으시다고, 대체 무슨 잘못을 하시었다고 이리 가시어요……!”

“저리 떨어지거라.”

함거를 이끄는 포졸이 단이를 밀어내었다.

팔을 뻗어 수레를 잡으려 하여도 그녀의 힘으로 포졸에게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았다.

“나리, 서결 나리! 아니 되어요, 나리! 이것 놓아 주시어요, 놓으시란 말이어요!”

단이가 심하게 몸부림을 치자, 결국 어디선가 다른 포졸이 다가와 그녀를 끌고 어디론가 데려가기 시작했다.

“나리, 나리이!”

단이는 하늘이 찢어져라 울부짖으며 멀어지는 함거를 향해 손을 뻗었다.

닿지 않는 애타는 거리 너머, 함거 안의 그가 이쪽을 돌아보는 듯하였다.

정녕 이리 떠나보내야 하는가.

이리 떠나보낼 수밖에 없단 말인가.

이제야 겨우 행복해지나 싶었는데.

이제야 겨우, 나리의 미래에 내가 보이나 싶었는데.

“서결 나리!”

마지막 절규를 부르짖던 단이가 혼절할 듯 정신이 혼미해지던 그때였다.

“…….”

인적이 드문 도성 밖의 한적한 거리, 깜빡이는 눈꺼풀 속 흐릿한 눈동자가 그리운 얼굴을 담았다.

희미한 시야 때문에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하지 못하여 혼란스러워하길 잠시.

“단이야.”

이름을 부르는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에 단이가 두 눈에 힘을 주었다.

“서결…… 나리.”

“그래. 나다.”

눈앞에 결이 있었다.

죄인의 모습이 아닌, 역병 도는 마을을 관리하러 가는 관병의 차림으로.

바야흐로 역전을 위한 시작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