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단이야.”
귓가를 부드럽게 감싸는 목소리가 그녀의 의식을 붙들었다.
벌써 꿈속인가.
하여 나리께서 내게로 다시 오셨는가.
몽롱한 정신 가운데 단이는 결의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손을 뻗었다.
“나리…… 서결 나리…….”
“그래. 나다.”
단단하고도 따스한 온기가 단이의 손을 감쌌다.
꿈이라기엔 너무도 생생한 감촉.
점점 더 선명하게 느껴지는 감각에 단이가 두 눈에 힘을 주었다.
눈꺼풀에 밀려 눈물이 흘러내리자, 깨끗해진 시야에 결의 얼굴이 오롯이 나타났다.
“나리……. 나리!”
생각이란 걸 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결의 품을 파고들었다.
익숙한 체향, 익숙한 체온, 그리고 익숙한 품.
그 모든 것이 생생하게 온 감각을 일깨웠다.
부정할 여지도 없이 현실이었다.
“나리께서 어째서 여기에, 아까 분명 끌려가시는 걸 보았는데…….”
단이는 얼떨떨해하면서도 행여 꿈처럼 결이 사라질까, 결의 옷자락을 꼭 그러쥐며 그의 모습을 살폈다.
그는 함거 안에서 보았던 흰색 소복이 아닌 관병들이나 입을 법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등 뒤에는 그의 상징과도 같은 적운검 외에 낯선 검 하나가 더 메여 있었다.
일전에 이선에게서 받았던 상방검.
그가 새로운 전쟁을 준비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두 눈에 안타까움을 가득 담은 결은 단이를 애틋하게 바라보며 얼굴을 쓰다듬었다.
“놀라게 하여 미안하구나. 차마 너에게 언질을 줄 새도 없이 일이 진행되었다.”
“그럼 함거 안에 있던 사람은…….”
“다른 죄인이다. 아마 사람들은 그 안에 있는 이가 나인 줄 알겠지.”
결의 입으로 직접 설명을 들으니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단이는 다시금 울먹이며 결의 몸 상태를 살폈다.
“나리께선 괜찮으신 것이죠? 몸 상하신 곳은 없으시어요?”
“나는 괜찮다. 전하께서 나의 결백을 믿어주셨기 때문에, 도리어 나를 의금부에 두고 지켜주신 것이다.”
“다행이어요. 정말로 다행이어요, 흐윽…….”
마음이 놓이니 걱정으로 꽁꽁 뭉쳐 있던 것들까지 녹아 눈물이 된 걸까.
괜찮다, 괜찮다 하는 말에 더욱 감정이 북받쳐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범람하였다.
어린아이가 울듯이 서럽게 눈물을 터트리니.
“미안하다. 내가 다 미안하다.”
결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미안하다는 말과 눈물을 닦아주는 것뿐이었다.
하나 단이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함께해주고 싶어도 시간이 한정되어 있는 터라.
애가 타는 마음을 억누른 결은 단이의 어깨를 잡고 눈을 마주 보았다.
“단이야, 지금부터 내 말 잘 듣거라.”
단이가 어느 정도 울음을 그치자 결은 빠르게 말을 이었다.
“곧 도성 안이 시끄러워질 것이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짐을 꾸려 행랑아범과 보선 어멈을 따라 박 노인의 술도가에 가 있거라. 나머지 가솔들에겐 잠시 고향으로 피해 있으라 말하고. 술도가 쪽에는 미리 말을 전하였으니, 영감께서 너희를 잘 보살펴줄 것이다.”
결이 곧 먼 길을 떠난다는 건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절박해진 단이는 자기도 모르게 옷깃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주며 고개를 저었다.
“저도 나리와 함께 가면 아니 되어요? 저 나리랑 같이 있을래요. 저만 두고 가지 마시어요.”
“이번만큼은 아니 된다. 이전과는 달라. 너를 온전히 지키면서 일을 진행할 만한 여력이 없다.”
“차도 드시어야 하는데, 제가 없으면 어찌하시려고요…….”
결이 단이를 이곳까지 데려왔던 관병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하였다.
“급한 대로 신묘년 생의 다른 군사를 구하였다. 임시방편이지만 지금은 이 방법밖에 없어. 너를 그 위험한 곳에 데려갈 순 없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단이는 굵은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결의 옷을 꼭 쥐었다.
떼를 쓰면 안 된다는 걸 아는데도 마음이 쉬이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거대한 소용돌이가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안 까닭이었다.
하나 어찌 그를 막을 수 있을까.
폭풍 한가운데로 나아가겠다 한들, 파도치는 바다 한가운데로 나아가겠다 한들, 결이 가야 할 길이 그곳이라면 끝내 보내줘야 하는 것을.
그곳에 그의 운명이 있으므로.
이 모든 것을 끝마칠 문이 있으므로.
단이는 눈을 질끈 감으며 눈가에 가득 고인 눈물을 불안과 함께 꾹 밀어내었다.
그러곤 물빛 어린 눈으로 결을 바라보았다.
“……꼭, 다시 데리러 오실 거죠?”
결은 새로이 차오르는 눈물을 손끝으로 지워 주곤 고개를 끄덕였다.
“약조하마. 이번에도 무사히 돌아오겠다고.”
“…….”
“반드시, 너에게 돌아오겠다고.”
약조한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지켜주었던 결이었다.
하여 단이는 이번에도 이 약조 하나만 붙들고 모든 것을 견뎌보기로 결심하였다.
필사적으로 옷깃을 붙들던 손이 서서히 느슨해졌다.
기다리리라. 거친 파도를 뚫고 폭풍 그 자체가 되어 돌아올 이 사내를.
단이는 애써 입꼬리를 올려 그를 향해 웃어 보였다.
“돌아오실 때쯤 따듯한 차를 준비해 놓을게요.”
떠나는 발길 조금이나마 무게를 덜 수 있도록.
“다 식기 전에 돌아오시어요.”
너무 지쳐 걸음이 더디어질 때쯤 다시 한번 힘을 낼 수 있도록.
결은 그녀를 따라 미소를 띠며 그리하겠다고 약조하였다.
“부디 무사히 있거라. 곧 데리러 갈 터이니.”
“나리께서도…… 몸조심하시어요.”
그러곤 작은 몸을 품에 꼭 끌어안아 이 사랑스러운 여인의 온기와 향기를 가슴 깊이 새겨 넣었다.
반드시 돌아와야 할 지표를 각인시키듯.
내가 돌아올 곳이 바로 네가 있는 곳이기에.
곧 단이를 놓아준 결이 다른 관병들과 함께 말에 올라탔다.
마지막까지 단이의 얼굴을 눈에 담던 결이 곧 말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랴!”
힘차게 앞으로 달려 나가는 말들을 보며 단이는 힘껏 울음을 참았다.
그러곤 결이 시야에서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자 서둘러 발길을 돌려 집으로 향하였다.
결에겐 결의 일이 있듯, 자신에겐 자신의 일이 있었다.
‘이번엔 절대로 나리의 약점이 될 수 없어. 나를 지키는 게, 곧 나리를 지키는 거야.’단이는 황급히 집으로 돌아가 결이 당부한 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
준백의 저택 안, 깊숙한 곳에 위치한 어느 방.
회합에 속한 모든 이들이 모인 그곳엔 삼엄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모두가 엄중한 낯빛으로 무리 중 제일 상석에 앉은 이를 바라보았다.
굳은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던 준백이 이윽고 입술을 열어 낮은 음성을 뱉어내었다.
“드디어 대의를 이룰 때가 다가왔습니다.”
대의라는 두 글자에 공기 중으로 묵직한 긴장이 내려앉았다.
준백은 피부 위로 맞닿는 무게감을 고스란히 느끼며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 조선은 위와 아래가 뒤집히고 양과 음이 뒤섞인 혼란의 시대입니다. 앞으로 나아가야 할 임금은 계속해서 과거에 발이 묶인 채 우리 사대부들과 선을 그으려 하고 있고, 일개 장군이 임금의 신임만을 믿고 오만방자하게 문인을 누르려 하고 있습니다. 이를 어찌 감히 두고 볼 수 있겠습니까?”
사대부들이 옳소, 옳소 하며 동조의 뜻을 보였다.
그 가운데 성조 역시 겉으론 아무 내색 안 하며 그들과 뜻을 함께하는 듯 앉아 있었다.
“조선을 지금껏 이끌어온 것도, 지탱해온 것도 전부 우리 사대부들이 아닙니까.”
앞에 앉은 이들을 하나하나 바라보던 준백이 이윽고 성조와 눈을 마주쳤다.
그는 성조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입술을 움직였다.
“다시 일으켜야 합니다. 우리 사대부들의 조선을, 조선다운 조선을.”
‘사대부들의 조선’이란 말이 ‘나의 조선’이라 들렸다면, 그저 선입견에 얽매인 착각이었을까.
성조는 얼굴 근육이 굳어지려는 것을 최대한 참으며 경청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결이 진위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도성 밖으로 나갔으니, 최소한 그가 돌아올 수 있는 달포까지는 시간을 벌어 놓아야 했다.
이번 ‘대의’는 준백의 거대한 계획이자,
‘그래야 저 탐욕스러운 이무기가 조선을 집어삼키는 걸 막을 수 있을 테니.’동시에 그를 잡아들일 완벽한 함정인 셈이었다.
이 안에서 그가 해야 할 일은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의 이름을 가져다가 고스란히 이선과 결에게 바치는 것이었다.
자신 또한, 그 불구덩이 속에 함께 뛰어들며.
“이제 우리는 고지를 앞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가문과 목숨을 걸고 우리의 조선을 지켜내야 합니다.”
성조는 독사 같은 준백의 눈을 끝까지 피하지 않았다.
욕심의 크기로만 본다면 명나라까지 손을 뻗칠 위인이었지만, 감히 하늘이 허락지 않아 제 몸뚱이를 집어삼키게 될 터였다.
그리되도록 이 한 몸 태워 가장 큰불을 일으켜야겠지만.
“그래서 슬슬 각자의 역할을 정하면 좋을 것 같은데…….”
의미심장한 어조로 말끝을 늘인 준백이 얇은 입술을 더욱 길게 늘이며 말하였다.
“한 좌랑.”
난데없는 호명에 성조가 표정을 바로 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자네가 통로를 맡는 게 어떻겠는가?”
“통로라 하심은…… 정확히 무얼 말씀하시는 겁니까?”
“말 그대로 모든 성문의 개폐(開廢)를 자네가 맡아달라는 뜻일세.”
이번엔 성조도 표정을 쉬이 감추지 못하고 의아함을 그대로 드러내었다.
성문의 개폐를 맡는다는 것은 곧 언제든 바깥의 군사를 안으로 들일 수 있다는 뜻일 터.
행여 성조가 다른 뜻을 품고 있다면 이만큼 위험한 일도 없으리라.
그만큼 믿는다는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속셈을 갖고 있는 것인가.
그 속을 헤아릴 수가 없어 성조는 쉬이 그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제가, 감히 맡아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자네 정도면 충분하지. 재빠른 임기응변이 가장 필요한 곳이니.”
“…….”
“염려 말게. 자네를 도울 병력을 지원해 줄 터이니.”
헛짓거리를 하지 못하게 감시를 하겠다 이거군.
이미 피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일단은 받아들이고 대책을 찾아볼 수밖에.
성조는 경직된 입가를 풀며 고개를 숙였다.
“맡겨 주십시오.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래야지.”
준백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근처에 앉은 정회에게로 향했다.
입가에 뜻을 알 수 없는 묘한 호선을 그린 준백이 곧 다른 이들에게도 하나씩 해야 할 일들을 분배하였다.
좋지 않은 예감이 두 부자의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
한 달 뒤.
둥- 둥- 둥.
천지를 뒤흔들 듯이 울리는 무거운 북소리가 한양 땅을 가득 메웠다.
엄청난 수의 사병들이 함성을 내지르며 진군하자, 도성은 방어를 할 틈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회합이 준비한 사병들은 너무도 쉽게 궐의 문을 열어젖혔다.
한순간에 아비규환이 된 땅 위로 준백이 말을 타며 들어왔다.
철갑으로 무장한 그는 혼란이 도래한 광경을 눈에 담으며 입술을 비틀었다.
“조선은, 이제 나의 것이다.”
비릿한 조소를 머금은 그가 여유롭게 안으로 진입하였다.
사특한 기운이 곧 궐 내부를 모두 잠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