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비, 아찔하게 흐르는-91화 (91/100)

91화

이미 진시가 지난 시간대건만.

먹구름이 가득 드리워 하늘은 새벽처럼 어두웠다.

금방이라도 눈이 내릴 듯 차디찬 공기 중으로 혼란에 뒤엉킨 비명과 짙은 피비린내가 번져왔다.

혼비백산하여 달아나는 궁녀들과 내시들 사이를 준백은 말을 타고 느긋하게 가로질렀다.

앞을 막아서는 이가 있으면 단칼에 베어 쓰러트리고, 그를 붙잡으려는 이가 있으면 멀리서 화살이 날아와 옷자락 하나 건드리지 못하게 하니.

그가 지나가는 길목마다 지울 수 없는 핏자국이 낭자하였다.

금군들마저 잔악무도한 사병 부대에 처참히 찔리고 베어졌다.

준백의 앞을 막는 창검은 더 이상 없었다.

‘성 밖에 있는 군사들은 이미 우리 쪽에 막혔을 테지. 모아둔 사병만 해도 총 천 명이 넘으니.’그는 비릿하게 조소를 흘리며 이윽고 말에서 내렸다.

손에 들린 검이 시리게 빛났다.

준백은 그대로 걸음을 옮겨 이선이 있다는 근정전 안으로 들어갔다.

“멈추어라!”

곧 내금위장이 그 앞을 막아섰으나 준백의 뒤를 따라온 수십의 사병들이 그를 둘러쌌다.

제아무리 내금위장이 실력이 뛰어나다 한들 압도적인 수는 이길 수가 없는 법.

임금을 지키던 마지막 방패까지 결국 뚫리고 말았다.

이 난리 통 속에도 껍데기뿐인 용상만큼은 지키고 싶었는가.

모두가 죽어 나가고 있는데도 이선은 홀로 다른 세상에 있는 듯 고요히 눈을 감고 용상에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이 꼭 힘은 없으나 아집만 남은 왕의 표본과 같더라.

준백은 가엽다는 듯 낮게 웃음을 흘렸다.

“전하께선 어찌 그리 앉아 계시옵니까?”

지그시 감은 눈꺼풀을 서서히 들어 올린 이선이 그제야 준백을 바라보았다.

서로의 높고 낮음이 다르나, 오히려 올라선 자는 고개를 숙이고 있고 내려선 자는 빳빳이 목을 세우고 있으니.

이 역설적인 상황이 두 사람의 기이한 관계를 표면적으로 드러내는 듯하였다.

“당장 검을 들고 이 몸을 베시든가, 아니면 도망을 가시든가 하셔야지요.”

마치 어린아이를 훈계하는 것처럼 느긋하고도 여유로운 충고.

세자 시절의 자신을 대하듯이 말하는 준백의 태도에 이선이 턱에 힘을 주었다.

늙은 구렁이가 기어이 조선을 삼키려 입을 벌리는구나.

아직도 나를, 자신의 밑으로 보고.

그러나 이선은 섣불리 분노를 드러내는 대신 제 앞에 오만방자하게 서 있는 준백을 서늘한 눈으로 응시하였다.

“경이, 정녕 이 조선의 주인이 될 수 있을 것이라 믿는가.”

“임금의 자리는 하늘이 내리는 것이라 말씀하고 싶으신 겁니까.”

“그대에게 정녕 왕의 자질이 있는가, 그리 묻고 있는 것일세.”

준백의 눈썹 한쪽이 언짢게 까딱였다.

그 말인즉, 감히 나에겐 왕의 자질이 없다는 뜻인가.

명백한 무시에 준백이 으르렁거리듯 이를 드러내며 씹어뱉듯 말하였다.

“그 말씀 그대로 돌려드리지요. 그 왕의 자질이라는 것, 전하께는 있는 것이옵니까?”

“적어도 나의 백성과 신하들을 생각하는 마음만큼은 부족하지 않네.”

“측은지심만으로 어찌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입니까.”

“적어도 피 묻은 돌로 지은 성보다는 견고하겠지.”

준백의 얼굴이 맹수의 그것처럼 사납게 구겨졌다.

“주상!”

악에 받친 고함이 근정전을 뒤흔들었다.

그러나 모골이 송연해질 만한 악청구에도 이선은 눈 하나 깜짝 않고 그런 준백을 내려다보았다.

두 눈에 어린 것은 분명 딱한 심정이었다.

“경은 욕심에 눈이 멀어 너무 많은 피를 묻혔다.”

“제게 욕심이라면 옳지 않은 왕을 폐위시키고 새 나라를 세워 전보다 더욱 부강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말에 이선이 처음으로 실소를 흘렸다.

“경은 언제나 그렇듯 말만 번지르르하군.”

업신여기는 기색이 역력한 웃음에 준백의 눈매가 또 한 번 독사처럼 간악스럽게 변했다.

그는 광기가 형형한 시선을 이선에게 박은 채 목을 비틀었다.

“애초에 이 조선이란 나라가 피로 세워진 나라임을 잊으신 겁니까.”

“그 피를 지우기 위해 과인을 비롯한 모든 선대왕들께서 부단히도 애를 썼다.”

“깨끗하기만 한 땅은 아무런 영양분도 주지 못하는 법이지요. 적당히 비료가 썩고 물이 들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

“뭐, 겁 많으신 전하께선 평생 이해할 수 없으시겠지만 말입니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어차피 후대에 남을 것은 승자의 기록일 뿐, 패자의 논리와 주장 따위 그저 마지막 발악에 불과했다.

그러니 어리석은 왕이여.

자질을 운운할 시간에 풍전등화 같은 목숨이나 걱정하기를.

“이미 새 나라는 시작되었습니다.”

준백은 입꼬리를 비틀며 검을 바로잡았다.

“내가 이곳에 들어온 시점부터 말입니다.”

목숨 바쳐 당신을 지키겠다는 서결조차 없는 지금, 나를 막을 자는 아무도 없으니.

***

사병으로 꾸려진 군대를 세워 사대문을 모두 막은 뒤.

북쪽 숙정문으로 온 성조는 사뭇 긴장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의 명, 정확히는 준백의 명으로 함께 이곳 북문을 지키고 선 군사만 백에 달하였다.

저 중 자신이 미리 매수한 군사가 이십.

나머지 팔십 중 준백에게 따로 감시의 명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되는 군사는 적어도 삼십 이상.

즉 성문을 열기도 전에 저들의 손에 죽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었다.

‘죽으러 가는 길 한번 화려하게 장식하겠군.’성조는 혹여 달리 파고들 틈새가 있을까 하여 관병하는 척 성문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나 아무리 사병이라 하여도 이들 모두 오랫동안 체계적으로 훈련을 받은 자들이었다.

그 탓에 쉬이 흩트릴 방도가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결과 제대로 작전을 나눌 새도 없어 그가 어느 방향으로 도성에 진입할지도 알지 못하는 상황.

‘기적이라도 좋으니, 부디 결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어야 할 텐데…….’급하면 관세음보살 왼다더니.

스스로 덕과는 담을 쌓고 살았던 그도 이럴 땐 염치없게 하늘을 보게 되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적어도 어디로 돌아올지는 물어보고 보낼걸.’성조는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없는 발상이라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사실 계획을 나눌 만한 상황도 아니었거니와, 한시가 급한 탓에 그럴 여유조차 없었던 때였다.

진위가 거짓 역병으로 폐쇄된 마을에 갇혀 있음을 알게 된 뒤.

아버지를 통하여 이선에게 이와 같은 사실을 알린 성조는 덧붙여 결을 관병으로 둔갑시켜 역병이 돈다는 마을로 보낼 계획까지 세웠다.

그 와중에 다른 죄수를 결인 척 바꿔치기하여 함거로 보낸 것은 준백의 시선을 잠시나마 돌리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결은 무사히 도성 밖으로 나갈 수 있었고, 계획대로 무사히 움직였다면 이 시기쯤 한양에 도착했을 터였다.

한데도 아무런 움직임이 포착되질 않으니.

‘설마…… 실패한 건가.’불길한 예감에 성조는 초조함이 깃든 눈으로 쥐 죽은 듯 고요한 길을 보았다.

이대로 조선이 준백의 손아귀에 넘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하는 걸까.

착잡해지는 마음에 괜스레 고삐 쥔 손에 힘이 들어가던 그때.

휘익- 탁!

“헉!”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단숨에 대열에 서 있던 사병 중 하나를 꿰뚫었다.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쓰러진 사병에 나머지 병사들이 급히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설마.’성조는 재빨리 주위를 살폈다.

그러자 저 멀리 말을 타고 달려오는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진위!’진위가 저곳에 있다는 것은 필시 결이 계획에 성공했다는 뜻일 터.

순간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하늘이, 정말로 그들을 도와준 것이다.

술렁이는 병사들 가운데, 성조가 검을 뽑아 들어 하늘을 향해 뻗었다.

“전군!”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유쾌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감돌았다.

즐거운 듯이.

혹은 마지막을 예감한 듯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고도 동시에 마음에 드는 망나니짓을 시작할 시간이었다.

“엉망 한번 만들어보자!”

그러곤 눈 깜짝할 새 몸을 돌려 제 뒤에 줄지어 늘어서 있는 병사들을 단칼에 베기 시작했다.

성조의 움직임에 매수해 두었던 십여 명의 병사들 역시 아군의 가면을 벗고 공격을 가했다.

눈 깜짝할 사이 다가온 진위와 군사들 역시 준백의 사병들을 공격하였다.

갑작스러운 그들의 기습에 병사들의 대열이 급격히 흐트러졌다.

하나 우왕좌왕하기도 잠시.

“한 좌랑을 베어라!”

그들은 이런 상황을 예견이라도 한 것처럼 성조를 향해 달려들었다.

숙정문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한데 뒤엉켜 싸움이 일어났다는 소식에 다른 문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까지 이쪽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젠장……!”

파도처럼 밀려드는 거대한 적군에 성조는 조금씩 밀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진위와 다른 군사들이 합세했다곤 해도 자객으로 활동하던 기백의 사병들을 막기란 역시 무리에 가까운 일이었다.

필사적으로 그들을 뚫고 성문으로 직진하려 하였으나 문까지의 거리가 꼭 천 리처럼 느껴졌다.

“이야아악!”

그때, 한 병사가 성조를 향해 창을 내질렀다.

피하기엔 너무도 가까운 거리.

몸을 내어주는 한이 있더라도 병사 하나를 저승길 동무로 데려가겠다는 마음으로 검을 높이 들던 찰나.

챙, 촤악!

가슴 앞까지 왔던 창이 한순간 크게 호선을 그리더니 곧 붕 떠올라 땅바닥으로 내리꽂혔다.

턱 끝에서 뭉친 숨을 간신히 내뱉은 성조가 고개를 돌려 옆을 보았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성조가 한숨인지 헛웃음인지 모를 것을 흘리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겁나서 내뺀 줄 알았네.”

결이 돌아왔다.

한 손에는 적운검을, 다른 한 손에는 상방검을.

그리고 등 뒤에는 외숙부 민지청과 이선의 상방검으로 불러 모은 삼천의 군사들을 대동한 채.

앞서 군사들을 이끌고 성문을 뚫으러 가는 민지청과 진위의 뒤로, 결이 복잡하게 뒤엉킨 눈빛으로 무장한 성조를 보았다.

서로 다른 갑옷을 입고, 서로 반대편에 선 채, 같은 길로 나아가는 두 사람.

비록 갈래는 나누어졌으나 결국 우린 한곳에서 만나게 될 것이니.

“고생했다.”

부디 여기서 지지 마라.

함부로 목숨을 내걸지 마라.

조금만, 더 버텨줘라.

“곧 끝내고 올게.”

너에게, 두고두고 은혜를 갚을 기회라도 다오.

결이 성조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말하자 성조가 피식 실소를 내비쳤다.

“여유 부리지 말게. 이제 시작이니.”

“너야말로 방심하지 말고.”

두 사내는 끈끈한 눈빛을 주고받다 이내 등을 돌렸다.

성조는 웬만한 장수들 못지않은 실력이니, 그리 쉽게 당하지 않을 것이다.

결은 그리 믿으며 곧 군사들과 함께 성문으로 돌진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굳건하게 대열을 지키던 병사들은 결의 공격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그야말로 폭풍처럼 밀려든 결의 부대에 결국 굳건하였던 성문도 드디어 뚫렸다.

“어서 가서 전하를 지켜라!”

“예!”

결의 명령에 군사들이 쏜살같이 앞으로 진격하였다.

“어서 가게! 여긴 내가 맡고 있을 테니!”

성조의 외침에 결이 고개를 끄덕이곤 힘차게 박차를 가했다.

흑마는 피비린내를 따라 단숨에 내달려 궐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근정전 주위를 둘러싼 병사들이 곧 그를 향해 달려들었으나, 이들 역시 추풍낙엽처럼 찰나에 전부 쓰러지고 말았다.

마지막 병사를 베어낸 결이 뒤를 돌아보았다.

멀리 이선에게 검을 들이밀고 있는 준백이 보였다.

결은 곧장 등 뒤에서 활을 꺼내 그를 향해 화살을 쏘았다.

“……!”

순간 본능처럼 살기를 느낀 준백이 몸을 비틀어 가까스로 화살을 피했다.

결의 얼굴을 확인한 준백의 동공이 바짝 조여졌다.

“네, 네가 어떻게……!”

“대감과 저의 질긴 악연.”

결은 등 뒤에서 화살을 하나 더 꺼내어 활시위를 당겼다.

“이만 끝내러 왔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