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대감과 저의 질긴 악연, 이만 끝내러 왔습니다.”
결의 손끝에 달린 활시위는 당장이라도 화살을 날릴 듯 팽팽했다.
준백은 한껏 당황한 눈으로 결의 어깨너머를 보았다.
활짝 열린 문 너머, 널브러진 사병들과 붉게 물든 바닥이 보였다.
근정전 앞을 지키고 있던 무수한 병사들이 결 하나에게 모두 당한 것이다.
“제기랄……!”
준백이 이를 바득 갈며 검을 고쳐 쥐었다.
하나 여기서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그가 아니었다.
마른침을 삼킨 준백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이선을 인질로 잡아 그의 목에 검을 들이대었다.
“윽……!”
“한번 쏘아 보거라. 어디 나만 죽을쏘냐!”
준백은 이선을 방패로 삼아 완전히 몸을 숨겼다.
맞추고자 한다면 그의 팔을 저격할 수 있겠으나, 그랬다간 임금의 옥체까지 상하게 할 위험이 있었다.
이선이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쳤으나 오히려 날카로운 검날이 그의 목에 긴 상처를 낼 뿐이었다.
결은 여전히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긴 채 긴장을 유지하였다.
순간의 방심이 곧 돌이킬 수 없는 실수로 변할 수 있었다.
결이 쉽사리 활을 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챈 준백이 이선을 결박한 채로 천천히 옆으로 움직였다.
“어차피 너희는 끝났다. 밖을 둘러싼 군대 외에도 이 조선을 둘러싼 내 사병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느냐.”
“대감께서 얼마나 준비하셨든 그 수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
“어차피 쓸어버리면 그만일 뿐.”
잔챙이들 따위 쉽게 물리칠 수 있다는, 오직 결만이 가질 수 있는 자신감이었다.
결의 실력은 준백도 부정할 여지가 없는 터라.
‘무엇보다 저놈 손에 들린 저 검…….’낯익은 적운검 외에 다른 하나는 분명 비상시국일 때 임금이 장군에게 하사할 수 있는 상방검이었다.
군사 지휘권을 일임하여 임금의 허락 없이도 모든 군사를 통솔할 수 있다는 검.
그것이 결의 손에 간 것이다.
여기서 계속 버티는 것은 쓸데없는 시간 낭비였다.
결이 저 검을 들고 왔다는 것은 바깥 상황이 썩 제 뜻대로 돌아가고 있지 않다는 뜻일 테니.
‘그래 봤자 우리 쪽 사병의 수보다 많지는 않을 것이지만.’우선은 밖으로 나가 자신의 군사들이 모인 곳으로 결을 유인하는 것이 더 유리했다.
준백은 이선의 목을 검으로 겨눈 채 근정전 입구로 향했다.
임금이 제 손에 있는 한 아무도 자신을 처치하지 못할 것이라 강하게 믿고 있는 듯하였다.
결 또한 그가 걸어가는 방향을 따라 화살의 방향을 움직였다.
이대로 준백을 놓칠 순 없었다.
기회는 단 한 번뿐.
일생을 건 모험, 도박과도 같은 화살에 결은 모든 것을 걸 생각이었다.
활시위가 끊어질 듯이 빠듯하게 당겨졌다.
금방이라도 시위를 놓을 듯한 결의 자세에 이선의 낯빛에 두려움이 어렸다.
흔들리는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한 결이 이선을 향해 눈빛으로 뜻을 전하였다.
‘전하, 부디 저를 믿어주십시오. 저를 처음 한양으로 부르셨던 그날과 같이, 저를 한 번 더 믿어주십시오.’결의 시선이 아무도 없는 텅 빈 방향을 가리키다 돌아왔다.
결의 활에만 집중한 준백은 보지 못한 신호였다.
이윽고 터질 듯 부풀어 오른 긴장이 내부를 가득 채운 순간.
“으아악!”
결이 몸을 틀어버림과 동시에 이선이 있는 힘껏 준백을 옆으로 밀쳤다.
그와 동시에 활 끝에 걸린 화살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갔다.
“윽……!”
화살은 정확히 준백의 어깨를 관통하였다.
한순간 크게 휘청거린 준백은 죽을힘을 다해 근정전 밖으로 도망쳤다.
결이 황급히 그를 향해 두 번째 화살을 쏘려 하였으나, 하필 그의 시야에 쓰러진 이선이 들어왔다.
“전하!”
빠르게 그에게 달려가 상태를 살폈다.
준백을 밀치면서 검에 더 베인 것인지, 목을 틀어막은 이선의 손 틈에서 붉은 피가 조금씩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선은 한 손으로 상처를 막으면서 결을 향해 남은 팔을 내저었다.
“나는 괜찮다. 그저 살짝 베인 것이다. 그대는 어서 가 반역자를 쫓아라, 어명이다!”
다행히 목숨이 위험할 만큼 깊이 베인 것은 아닌지, 목소리에 기백이 어려 있었다.
여기서 준백을 놓치게 된다면 어떤 후환을 남기게 될지 모른다.
결은 주저하는 마음을 다잡으며 고개를 숙였다.
“명, 받잡겠나이다.”
그러곤 서둘러 준백이 도망친 방향을 향해 달려갔다.
그 사이 말을 타고 자리를 벗어나던 준백은 이를 악물며 어깨에 박힌 화살을 부러뜨렸다.
“내가 여기서 죽을 성싶으냐! 어림도 없지!”
아직 역전의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이날을 위해 지난 십 년간 사병들을 키워오지 않았는가.
사대문 안을 지키고 선 병사들과 도성 밖을 둘러싼 병사들까지 합하면 이깟 궐 하나 쓸어버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궁지에 몰려 혼비백산한 나머지 준백이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었으니.
“이게…… 대체 어떻게…….”
결이 근정전 안까지 들어왔다는 것.
그것은 곧 그의 앞을 가로막은 모든 이들이 사라졌다는 뜻이었다.
준백이 탄 말은 영제교를 채 지나기도 전에 자리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흥례문 앞을 틈 하나 없이 까맣게 메운 무수한 군사들.
그 앞에 선 결의 외숙부 민지청과 진위.
저 가운데 자신의 사병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의 사병들이 모조리 사멸되었다는 건 피로 칠갑한 저들의 갑옷이 증명하고 있었다.
유일하게 자신과 같은 길로 왔던 이라곤 단 두 명.
한성조와 한정회, 두 부자뿐.
“저 여우 같은 놈들이…… 감히! 감히!”
분노에 가득 찬 원성이 하늘을 뒤흔들었다.
그러나 준백의 발악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거대한 폭풍, 폭풍을 품은 사나운 파도, 파도를 내리치는 성난 바다.
그 모든 것을 품은 결이 적운검을 높이 든 채 준백을 향해 달려갔다.
아버지의 원통하고도 억울한 한과, 가족들의 사무치는 혼과, 간악한 계략 앞에서 무참히 목숨을 잃은 나의 소중한 군사들의 원을 담아.
그리고 목숨보다 더 소중한 나의 여인, 단이의 삶을 뒤흔들려 하였던 죗값을 담아.
오늘 너를, 결단코 처단하리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뒤를 돌아본 준백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발버둥을 쳤다.
그러나 악에 받친 끔찍한 비명은 곧 흩뿌려진 붉은 피로 인해 끊어지고 말았다.
채 반격을 할 겨를도 없이 단칼에 생동을 잃은 것이다.
“컥, 커헉…….”
목구멍에서 몇 번 피 끓는 소리를 내던 준백은 얼마 안 가 힘없이 말에서 떨어졌다.
축 늘어진 준백의 앞으로 결이 천천히 걸어 나갔다.
뜻을 알 수 없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바닥에 쓰러진 준백을 보던 결이 이내 고개를 돌려 먼 허공을 보았다.
허무하리만치 적막한 공기가 땅을 뒤덮었다.
이리도 쉬운 일을 하지 못해 그토록 오랜 시간을 버텨왔던가.
이리도 허망한 복수를 위해 그토록 오랜 시간을 버려왔던가.
갈망해 마지않던 순간이건만.
비로소 이루었다는 성취감과 동시에 온몸을 휘감은 텅 빈 공허함이 결을 잠시 공허에 빠지게 만들었다.
안도와 허탈.
더 이상 비극을 반복하지 않을 것이란 희망과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대한 절망.
상반된 두 감정이 휘몰아쳐 시간도, 공간도 잊게 만들었다.
그 방심이, 문제였을까.
“서결!”
모든 소리를 지운 공간 속에서 유일하게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든 찰나.
“…….”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 멀리에 있던 성조가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그것도 고통으로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한 채.
“…….”
갑자기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아니, 모든 게 멈춘 가운데 성조만 움직이는 것 같았다.
결은 굳은 눈동자를 천천히 밑으로 내렸다.
얼마 내려가지 않은 눈동자는 성조의 등 뒤로 단검을 꽂은 준백의 팔 위에서 멈췄다.
굳은 눈동자가 부정하듯이 흔들렸다.
다시 고개를 들자 제 어깨를 짚고서 간신히 버티고 선 성조가 보였다.
그 너머로 정회를 비롯한 다른 군사들에게 준백이 붙잡히는 게 보였다.
갑옷 안에 몇 겹의 가죽을 덧댄 덕에 결의 공격으로부터 간신히 목숨을 건졌던 것이다.
하나 악독한 원념으로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다 실패한 준백은 온몸으로 피를 흩뿌리는 악귀 같은 형상으로 발광을 하였다.
다시 앞을 보자 성조가 입가에 피를 흘리며 웃고 있었다.
모든 것이 한없이 느린 속도로 결의 눈에 새겨졌다.
“……한성조!”
시간이 다시 제대로 흐르기 시작한 건 성조가 결국 중심을 잃고 쓰러졌을 때부터였다.
간신히 그를 부축한 결은 어찌할 줄을 모르고 떨리는 눈동자로 벗을 바라보았다.
“이게 뭐 하는 짓이냐. 네가 왜…… 네가 왜!”
다그치며 외친 목소리가 주체할 수 없이 떨려왔다.
성조는 기침인지 실소인지 모를 것을 간헐적으로 뱉으며 힘겹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벗……이잖은가.”
“…….”
“예부터 맷집은, 자네보다 내가 더 좋았네. 약한 벗은…… 보호해 줘야지.”
이 와중에도 실없이 농담을 한 성조가 극심한 고통을 참지 못하고 인상을 구겼다.
결은 다급히 성조의 등 뒤를 살폈다.
제법 깊게 박힌 단검에선 연신 피가 타고 흘러내려 뚝, 뚝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성조는 낮게 신음을 흘리며 너스레를 피웠다.
“맨날 휘두르기만 했지, 이리 맞아 보니 더럽게 아프군그래. 훈련 삼아 난도질한 나무한테 미안해질 지경이야.”
“……쓸데없이 헛소리하지 말고 말 아껴. 의원에게 데려갈 것이니 정신 붙들어라.”
결은 울컥 감정이 북받치는 것을 꾹 삼키며 짓씹듯 말하였다.
하나 성조는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움직여 미약한 말소리를 흘려보냈다.
“서결…….”
“…….”
“겉만 단단한, 이 바보 같은 결아.”
마치 어린 시절처럼 결을 친근하게 부른 성조가 안 웃느니만 못한 슬픈 미소를 지었다.
“이리 편히 부르면 좋았을 것을……. 너만 보면 자꾸만 죄책감이 밀려와, 나 스스로 너를 멀리하게 만들었구나.”
“네가 왜 죄책감을 가져. 네가 뭘 잘못했다고, 너한테 무슨 죄가 있다고.”
“아버지의 죄.”
“…….”
“너와 네 가문을 그리 만들었던…… 우리 아버지의 죄.”
안간힘으로 미소를 붙들고 있던 성조의 표정이 서럽게 허물어졌다.
“나는 이번에 모두를 속인 것이다. 영상도, 나의 아버지도, 그리고…… 너도.”
“…….”
“나의 모든 행동 가운데, 너를 죽이고 싶다는 마음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는 할 수 없으니까.”
성조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나는 너를 죽도록 미워하였다. 한평생 결코 뛰어넘을 수 없는 너를…… 미워하고, 또 미워하고, 더 할 수 없이 미워하고.”
너를 볼 때마다 들던 죄책감과 안쓰러움, 그것을 부정하고 싶었던 이기적인 열등감, 애초에 제 몫이 아니었던 선택들에 대한 분노.
그 모든 것의 중심이었던 너를 향한 잘못된 원망.
“그럼에도…… 너를 도무지 놓을 수가 없어서.”
그리고 언제나 그 모든 것들보다 우위에 있던, 너를 향한 우애.
감히 이런 것도 사랑이라 일컬을 수 있다면, 나는 단연코 한평생 너를 흠모하였다 말할 수 있었다.
피를 나눈 가족만큼, 아니.
피를 나눈 가족보다 더 의지하고 모든 걸 걸었던 나의 유일한 벗.
끝까지 함께하고 싶었던…… 서결.
이 정도면 더 이상 너에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될까.
이 지독하리만치 무거웠던 죄책감을 이제는 놓아도 될까.
“이런 비겁한 방법으로나마, 너한테 용서를 구해 보려고.”
비로소 마음이 후련하였다.
이 끔찍한 아픔으로 죗값을 치른 것 같아서.
때마침 가까이 다가온 정회가 쓰러지듯이 그들 옆에 무릎을 꿇었다.
절망으로 무너진 아버지의 얼굴이 흐릿해진 성조의 눈동자에 비쳤다.
“부끄러울 만큼 염치없지만…… 우리 아버지, 용서해 주면 좋겠다.”
초점조차 제대로 잡지 못한 눈동자가 다시금 허공을 헤매다 간신히 정회에게 가닿았다.
저렇게 일그러진 아버지의 표정은 처음 본다.
뒤늦게야 아버지에게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정회에게 시선을 둔 눈가에서 고여 있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버지께서 죗값은 끝까지 치르신다 하시었으니, 네 마음속에 있는 그 울분과 원망만이라도…… 풀어주면 좋겠다.”
너 자신을 갉아먹지 않기 위해서라도.
네 마음이 더 이상 지옥을 걷지 않기 위해서라도.
내가 이리 목숨을 다하여 마지막으로 빈다.
행복해라. 너는.
아무도 미워하지 말고, 원망하지 말고.
그냥 다 잊고, 그렇게 행복하기만 해라.
내 몫까지.
“딱 한 번만, 널 이겨 보고 검을 놓고 싶었는데.”
아…… 아쉽다.
세상 모든 것을 다 놓아 버린, 동시에 가장 편안한 웃음이 성조의 입가에 번졌다.
흐릿해진 다갈색 눈동자가 서서히 눈꺼풀 뒤로 사라졌다.
“한성조, 한성조!”
비통한 울부짖음이 허공으로 높이 치솟았다.
그 서러운 소리가 하늘까지 뒤흔들었는가.
굳은 듯 하늘을 메우고 있던 먹구름이 부서져 하얀 눈으로 내리기 시작했다.
소란도, 절망도, 어지럽고 참혹한 것이라면 뭐든 덮을 기세로 펑펑 쏟아져 내렸다.
그렇게 붉게 물들었던 아픔들이 서서히 고요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