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하루에도 이른 어둠이 찾아들었다.
눈은 땅을 소복하게 뒤덮고도 여전히 가릴 것이 많은지 밤이 되도록 쉼 없이 내리고 있었다.
눈보라처럼 매섭진 않아도 안개가 피었다 생각될 만큼 자욱하여 사방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하얗디하얀 눈 더미에 소리마저 전부 덮이고 만 것일까.
귀를 기울이면 눈이 내리는 소리까지 들릴 것 같은 술도가 안.
단이는 흐르는 시간마저 잊은 채 결을 기다리고 있었다.
멀리서 함성인지 비명인지 모를 것이 아득하게 들려올 때마다 그녀의 여린 가슴도 쿵쿵 내려앉곤 하였다.
이제나 오실까. 저제나 오실까.
바람이 사립문 빗장을 흔드는 소리에도 벌떡벌떡 일어나 바깥을 확인하던 단이는 이제 완전히 지쳐 대청마루에 웅크려 앉아 있었다.
흩날리는 눈과 매서운 바람에 몸이 얼 법한데도 마음이 괴로운 것보다 몸이 괴로운 것이 차라리 나아 이곳을 고집하였다.
희망과 절망이 번갈아 찾아들며 완전히 녹초가 된 몸이라.
단이는 유일한 안식인 잠마저 들지 못한 채 힘겨운 시간을 버텨내었다.
“하여간 고집으로 산을 쌓을 것.”
언제 다가온 것인지, 충선이 단이 곁에 놓아둔 화로에 새 숯을 놓아주며 지청구를 대었다.
아무리 들어가라 하여도 말을 듣질 않으니.
하는 수 없이 한기라도 피하라며 화로를 놔준 그였다.
단이는 눈물이 말라붙은 눈을 들어 충선에게 물었다.
“아직, 소식은 없나요?”
“소식이 왔으면 내 무엇 하러 감추겠느냐. 얼른 나가라고 말해줬겠지.”
쉬이 오지 않을 소식에 저리 목을 매는 것이 안타까워 충선은 괜스레 말이 더 퉁명스럽게 나왔다.
사실을 알면서도 굳이 물었던 터라.
단이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서 다시 하염없이 열리지 않는 사립문만 바라보았다.
다시금 울컥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질끈 눈을 감았다.
울면 안 되는데.
울어서 해결될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혹시나 하는 불안한 마음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이 너무도 무거워 자꾸만 눈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나리께선 여진족의 잔악무도한 군대도 거뜬히 이기셨는데.
대체 반란군이 얼마나 거세기에 이리도 늦으시는 걸까.
할 수만 있다면 당장 산을 내려가 도성의 상황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하나 행여 그랬다가 적군에게 붙잡히기라도 하면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는 터라.
단이는 초조함에 몇 번이고 들썩이는 몸을 억누르느라 고역이었다.
지금 산 밑에선 나라가 뒤집어지고 있는데, 속세와 떨어진 이곳은 홀로 다른 세상에 있는 것인 양 고요하기만 했다.
혹 이곳만 시간이 멈춘 것이 아닐까.
하여 나리께선 진작 반란을 진정시키고 나를 찾으러 오시려는데 서로의 시간이 달라진 것은 아닐까.
그런 허무맹랑한 생각까지 하며 비관에 빠지던 그때.
푸르르-.
어디선가 말이 투레질하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간절한 마음이 만들어낸 환청인가.
아니면 바람 소리를 또 잘못 들었나.
허리를 쭉 세우고 사립문 너머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자니 또각또각 하는 말발굽 소리가 점점 선명해졌다.
마침내 희뿌연 눈안개 너머로 말을 탄 인영이 나타났다.
곧 검은 그림자 같던 결의 얼굴이 뚜렷하게 드러난 순간.
“서결 나리!”
단이는 신조차 제대로 신지 않고서 결을 향해 뛰어나갔다.
차디찬 눈에 발이 푹푹 빠졌지만 차가움을 느낄 새조차 없었다.
그녀는 말에서 내린 결의 품을 단번에 파고들었다.
“나리, 정말 나리 맞으시지요? 서결 나리 맞으시지요?”
결의 허리를 두 팔로 꼭 끌어안은 단이가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너무 많이 흘려 더 이상 나올 것이 없을 줄 알았던 눈물이 다시금 시야를 흐리게 만들었다.
단이는 연신 눈꺼풀로 눈물을 밀어내며 흐려지는 결의 얼굴을 보고 또 보았다.
“……어찌 우는 것이냐. 이리 데리러 왔거늘.”
결은 손을 뻗어 그녀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피와 먼지로 얼룩져 있던 손이 도리어 그 눈물에 씻겨 나갔다.
하나 몸에 밴 피 냄새가 이 가녀린 여인에게까지 옮겨갈까.
어깨를 잡고 조심스럽게 떼어내려 하니, 단이는 고개를 내저으며 더욱 결에게 안겨들었다.
“그냥, 보니까 안심이 되어서…… 이 순간이 안 올까 봐 너무도 겁이 나서…….”
자꾸만 터져 나오려는 울음에 가뜩이나 여린 목소리가 더욱 가늘게 흔들렸다.
그 모습이 꼭 북방으로 정벌을 떠났을 때와 겹쳐 보였다.
예나 지금이나, 너는 여전히 나의 안전을 위하여 눈물을 흘려주는구나.
그 마음이 너무도 사랑스러워, 결은 비로소 그녀의 작은 몸을 끌어안을 수 있었다.
그녀에게 옮겨갈까 걱정하였던 죽음의 냄새는 오히려 그녀의 향기로 인해 점차 옅어져 갔다.
“이제 다 끝났다.”
결은 안도의 눈물을 흘리는 단이의 몸을 더욱 단단히 끌어안았다.
끝났다. 그 한마디가 얼어붙어 있던 그의 마음에도 한 줄이 햇살이 되었던 걸까.
새삼스럽게 밀려온 감정들이 뜨겁게 녹아 눈물이 되어 흘렀다.
지독한 악연도.
발목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던 무거운 과거들과 언제나 등 뒤에 날카롭게 꽂히던 흉들도.
우리를 위태롭게 뒤흔들던 그 모든 칼날들도.
그리고 오래도록 우리를 괴롭히던, 나와 성조의 죄책감도.
“전부 다…… 끝났다.”
끝이 났다.
작은 싹 하나 남기지 않고 모두.
***
왕을 시해하려 역모를 일으켰던 반란군은 정회가 미리 챙겨두었던 회합록으로 인하여 모두 잡히고 말았다.
그와 함께 회합이 주로 사용하던 밀서 또한 여러 개가 드러났다.
이를 통해 결을 음해하려 하였던 흉계와 더불어 15년 전 결의 부친인 서현덕과 그 가족들을 몰살시킨 죄까지 전부 세상에 밝혀졌다.
이 일은 역모와 결부되어 그 죄가 더욱 무겁게 다뤄진지라.
지난날의 과오를 모두 바로잡는 것이 숙원이었던 이선은 그때의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게 하여 단 한 사람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하였다.
하여 조금이라도 계획에 가담한 자들은 가문이 멸하여졌고, 회합에 이름을 올린 것만으로도 그에 마땅한 형벌들을 받았다.
정회 역시 오랫동안 회합에 몸을 담으며 조선의 안전을 위협한 점에서 본래 사형을 받아야 마땅하였다.
하나 종국에는 반란 세력을 평정하기 위해 결의 군대를 도운 점, 그리고 이제껏 모아둔 회합록을 모두 넘겼다는 점에서 참작을 받아 제주도로의 유형(流刑)에 그쳤다.
처참했던 현장 가운데, 끈질기게 목숨을 부지하였던 것은 결국 하늘의 뜻이었을까.
준백에겐 구족을 멸함과 동시에 대역 죄인에게 내릴 수 있는 최대 극형인 거열형이 과해졌다.
15년 전 서현덕에게 역모의 누명을 씌운 것부터 시작하여 국법을 어기고 대규모의 사병을 키운 것, 사병을 여진족인 척 꾸며 같은 조선 민족을 약탈한 것, 또한 국가적 충돌이 일어날 수 있을 만한 여진족 사냥을 자행한 것 등.
그 죄질이 흉악하고 나라의 근간을 뒤흔들 수 있는 것이기에 가장 무겁게 다뤄졌다.
모든 악행의 손과 발이 되었던 음수가 예상외로 모든 것을 자백하면서 준백의 죄가 밝혀지게 되었다.
자결조차 하지 못하게 재갈을 물린 준백이 드디어 형장에 끌려왔다.
구름같이 모인 사람들 앞에서 준백의 손목과 발목, 그리고 목에 차례로 소와 연결된 밧줄이 묶였다.
사람이 원념과 악으로 뭉치면 정녕 악귀의 형상처럼 된다던가.
“으으아, 으아아아악!”
살아도 산 것이 아닌 것 같은 모습이 되어버린 준백은 입에 단단히 물린 재갈로 인해 짐승처럼 울부짖기만 하였다.
독기에 가득 찬 두 눈은 자신의 죽음을 구경하러 온 이들을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시뻘겋게 충혈된 눈이 어느 한 곳에 멈춰 섰다.
‘서결……! 서결!’흑마에 탄 결을 발견한 준백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곧 사지에 연결된 밧줄에 의해 결에게 닿지 못하고 다시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광증이 도진 사람처럼 격하게 몸부림을 치는 그의 모습을 결은 한없이 무감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아니, 너무도 많은 감정이 한데 엉키고 뒤섞여 결국 검은 눈동자가 되었다고 하는 편이 더 옳았다.
준백이 죽는다고 하여 지난 과거가 바뀌진 않을 것이다.
그는 앞으로도 여전히 물을 마주하기 두려워할 것이고, 죽은 가족들은 돌아오지 못할 것이며, 해마다 입동이 되면 온몸이 시려오는 외로움에 잠길 것이다.
그럼에도 이 순간을 그토록 기다려왔던 건, 나와 내 가족들의 고통을 저자가 아주 조금이나마 느끼길 바라서.
끔찍한 고통 속에서 아주 잠시나마 자신의 지난날을 돌아보기를 바라서.
자신의 죄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는 지옥에 가서나 알게 되겠지만.
나는 당신을 딛고 앞으로 계속 나아갈 것이다.
그러니 악에 잠긴 그대여.
이곳에 고여 썩어가기를.
평생 흐르지 못해 탁하게 죽어버린 물이 되기를.
그대의 죄가 모두 녹아 사라질 때까지.
둥-, 둥-, 둥-.
북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밧줄을 매어둔 소들이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주 느릿한 속도로 다가오는 죽음에 준백도 뒤늦게 공포에 떨기 시작했다.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어떻게든 벗어나려 애썼으나 이미 팔과 다리가 사방으로 팽팽하게 당겨진 뒤였다.
꿈에서 들릴까 무서울 만큼 끔찍한 비명이 온 땅을 뒤흔들었다.
전장에서 숱하게 구른 결조차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든 장면이었지만, 그럼에도 결은 준백의 마지막 모습을 끝까지 눈에 담았다.
그것이 준백에게 할 수 있는 가장 큰 복수라 생각하며.
마침내 악귀의 혼이 마지막 비명과 함께 허공으로 흩어졌다.
결은 단죄의 현장을 마지막까지 바라보다 이내 천천히 말의 머리를 돌렸다.
복잡한 감정이 소용돌이쳤지만 애써 그것을 외면하려 하지 않았다.
그저 가라앉으면 가라앉는 대로, 또 휘몰아치면 휘몰아치는 대로, 그러다 흘러가면 흘러가는 대로 놓아두기로 하였다.
어차피 이 감정들은 모두…….
“나리!”
저 여인을 보면, 햇살 아래 사라질 새벽이슬 같은 것들이니.
환하게 웃으며 달려오는 단이를 보자 자연스럽게 그의 입가에도 부드러운 미소가 피어났다.
품 안에 폭 안겨드는 작은 몸을 결이 포근히 감싸주었다.
단이는 해맑게 웃는 얼굴을 쏙 빼 들며 천진하게 물었다.
“훈련원에는 잘 다녀오시었어요? 이제 며칠간은 집에서 편히 쉬실 수 있는 것이어요?”
단이에겐 부러 준백의 처형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끔찍하고 추한 것일랑 듣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결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단이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래. 당분간 훈련원에는 가지 않아도 된다.”
“와아, 좋다.”
단이는 담백하게 말하곤 다시금 결의 품에 꼭 안겨들었다.
그 단순한 두 글자에 그녀의 마음이 듬뿍 담긴 것 같았다.
조금 전까지 마음속을 어지럽히던 감정들은 이제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 전부 사라진 뒤였다.
“참, 이따가…… 가실 것이지요?”
조심스럽게 묻는 단이의 말에 결의 미소도 흐려졌다.
표정을 가다듬은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저도 같이 가도 될까요?”
마음은 썩 내키지 않았지만 그녀의 발길을 막을 정당한 이유가 없었다.
결은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정오의 차를 마신 뒤.
두 사람은 함께 길을 나섰다.
그리 가볍지는 않은 발걸음과 사뭇 심각한 표정이 그들의 목적지를 대변하고 있는 듯하였다.
익숙한 듯 낯선 길을 걸어 마침내 두 사람의 걸음이 한곳에 멈추었다.
이윽고 열린 문 너머.
자리에 누워 있는 익숙한 얼굴이 그들을 반겼다.
“……참 잔인하네, 그려. 일어설 수 없는 병자 앞에 눈꼴 시리게 정인이랑 나타나고.”
성조였다.
그날의 참상 속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