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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 아찔하게 흐르는-94화 (94/100)

94화

방 안에 자욱하게 피어오른 향이 환자 특유의 냄새를 조금이나마 지워주고 있었다.

성조는 낮게 숨을 내쉬며 결에게 손을 내밀었다.

“좀 일으켜 주겠나? 손님이 왔는데 누워서 맞이하는 것도 예가 아닌 것 같아서 말이지.”

“우리 사이에 차릴 예가 뭐 있다고.”

“언제부터 예를 차렸나 싶겠지만, 지금은 좀 차리게 해주게. 볼 날이 얼마나 남았다고 마지막까지 이런 모습을 보이게 하는가?”

자조적인 농담에 결의 눈빛이 사뭇 가라앉았다.

성조 역시 아버지인 정회와 함께 유배형이 과해졌다.

제아무리 결을 돕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회합에 든 것이라 하여도 그 과정에서 사건을 은폐시키려 한 죄가 있었으며, 준백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그를 도우며 몇 가지 국법을 어긴 사실도 드러난 까닭이었다.

무엇보다 성조 스스로가 법대로 처벌받기를 원하였다.

자신이 남아 있으면 또다시 작은 불씨가 될지도 모른다며, 아예 뿌리까지 전부 뽑을 것을 청한 것이었다.

하나 현재 몸 상태가 위중한 탓에 집행은 잠시 유보된 상태였다.

치료를 마치는 대로 정회를 따라 그 역시 유배길에 오르게 되니, 이리 만날 수 있는 날도 얼마나 남았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은 부러 착잡한 마음을 숨기며 성조를 조심스럽게 부축하였다.

자리에서 힘겹게 일어난 성조는 벽에 등을 붙인 채 숨을 골랐다.

준백에게 당하였던 내상이 꽤나 심각했던 탓에 이리 앉는 것조차 힘들어진 몸이었다.

그러면서도 죄책감에 어두워지는 결의 얼굴을 힐긋 보고는 부러 웃는 성조였다.

“매일 누워만 있으니 아주 좋군. 방 안에서만 놀고먹는다는 게 이리 좋을 줄 알았다면 내 진즉에 관직 따위 때려치우고 드러누울 것을 그랬어.”

“……광에 가둬놓으면 문짝을 뜯어서라도 나가던 놈이.”

“내가 그랬었나? 그땐 참 혈기 왕성했군그래. 크큭, 아…… 맘껏 못 웃는 건 좀 힘들구먼.”

통증에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입가에 내건 웃음만큼은 끝까지 놓지 않는 성조였다.

습관처럼 웃던 성조의 눈동자가 이윽고 단이에게로 향했다.

단이는 아까부터 눈물을 참느라 인사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입술만 꾹 깨물고 앉은 차였다.

결을 구하려다 몸이 심하게 상한 성조를 보니 괜스레 여러 감정이 복잡하게 뒤엉키는 까닭이었다.

한때는 성조를 원망하기도 하였다.

그의 부재가 길어질수록 혹여나 결까지 속인 건 아닐까, 정말로 벗을 해하려는 마음을 가진 건 아닐까 의심이 들어 그를 미워하기도 하였다.

차라리 미리 말씀이라도 해주시지.

아무도 다치지 않게, 모든 일이 잘 해결될 수 있게만 빌 수 있도록 언질이라도 주시지.

무슨 좋은 말을 들으려고 그걸 다 숨기시고서.

무슨 좋은 일을 바라시고 그걸 다 짊어지고서…….

눈물을 억지로 가두느라 붉어진 눈동자엔 원망인지 안타까움인지 모를 것이 잔뜩 묻어났다.

성조는 그런 단이를 보며 또 한 번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내가 그리도 미우냐? 잘하면 눈빛으로 나를 찌르겠구나.”

그 말에 꾹꾹 참고 있던 눈물이 기어이 범람하고 말았다.

후드득 떨어지는 굵은 눈물방울에 두 사내의 낯빛도 애타게 변하였다.

“너를 울리게 할 정도냐? 나의 존재가, 너에게 그리도 악독해진 것이냐?”

단이는 더 이상 울음을 참지 못하고 구슬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트렸다.

그러곤 고개를 크게 가로저으며 목멘 소리로 입을 열었다.

“죄송하여서, 그럽니다…….”

“네가 나에게 죄송할 것이 무어 있다고.”

“나리께서 저희를 배신하신 줄 알고, 정말로 서결 나리를 위험하게 만드시는 줄 알고, 엄청 원망하였는데…… 욕도 하고, 막 다치시라고 저주도 하고 그랬는데…….”

히끅거리면서도 술술 불어놓는 고백 위에 짧은 실소가 얹어졌다.

성조는 웃음기를 머금은 눈으로 결을 보다가 다시 단이에게 시선을 두었다.

“차에만 능력이 있는 줄 알았는데, 네게 신기도 있는 것이렷다? 서결, 아주 무서운 아이를 곁에 두었구먼.”

“그만 울거라. ……그 정도 욕은 먹어도 싼 놈이니.”

“뭐? 지금 보니 병문안이 아니라 욕을 하러 온 것이로군.”

결은 대답 대신 단이의 눈물만 정성스레 닦아주었다.

그만 울거라, 괜찮다.

나직이 달래는 목소리는 세상 어떤 소리보다 편안하고 부드러운 것이었다.

피도 눈물도 없다던 북귀가 자신의 정인이 흘리는 눈물에는 저리 안절부절못하는 모양이라니.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성조는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였다.

‘보기 좋네.’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애초부터 자신이 탐낼 만한 자리가 아니라는 생각도.

이제야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던 작은 미련까지 전부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성조는 더없이 안온한 눈길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한동안 서럽게 흐느끼던 단이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들어 그런 성조를 보았다.

“예전에 그리 말씀하셨죠. 언젠가 큰 잘못을 하시거든, 용서해 달라고요.”

훌쩍이며 떨리는 숨을 다듬은 그녀는 남은 눈물을 닦아내고서 말하였다.

“용서해드릴게요. 이리 다치신 것.”

“…….”

“그리고 나리 자신을 위험하게 만들면서 그 나쁜 사람들과 함께 계셨던 것도 다.”

그 말에 성조의 눈빛이 묘하게 변하였다.

예기치 못한 말에 당황한 듯, 혹은 설명 못 할 감정이 휩싸인 듯 그의 눈동자가 갈 길을 잃었다.

표정을 갈무리한 그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하였다.

“겨우, 그런 작은 것을 용서받으려고 쓴 소원이 아닌데.”

“저에겐 이것이 가장 마음을 아프게 하였던 잘못입니다.”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이며 고민하던 성조가 양심의 가책을 이기지 못하고 죄를 털어놓았다.

“네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것에 나의 아버지가 연관되어 있다. 네 부모의 원수가 바로 우리 가문이거늘…….”

“그건 나리의 잘못이 아니잖아요.”

“…….”

“그러니 나리께서 그 일로 용서를 비실 이유 또한 없습니다.”

이 세상에 구원이란 게 있다면,

“이제, 나리께서만 나리를 용서하시면 되겠네요.”

감히 너라고 말하여도 될까.

뜻하지 않은 용서에 메말라 있던 성조의 눈가에서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 수 있었다.

단이에게 용서를 받음과 동시에 비로소 성조가 스스로를 용서하였음을.

그 오랜 죄책감과 숱하게 스스로를 괴롭히던 자괴감으로부터 드디어 해방되었음을.

성조는 떨리는 입술을 꾹 맞다문 채 지그시 눈을 감았다.

울음을 머금은 입가에 전과는 다른 미소가 피어났다.

억지로 짓는 미소가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온 미소였다.

“단이 너는…… 내 인생에 참으로 과분한 차벗이었다.”

성조는 두 사람을 한눈에 담으며 환하게 웃었다.

“두 사람이 오래도록 행복하길, 진심을 다해 빌겠네.”

일렁이는 물빛이 어렸으나,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미소였다.

***

새해가 밝았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하여도 온 나라를 들썩이게 만들던 소란은 묵은해와 함께 사라졌는지,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한양 땅은 평안하기만 하였다.

빠르게 기력을 회복한 성조는 기약한 대로 유배길에 올랐다.

반란군을 숙청하는 데 큰 도움을 준 것이 참작되어 편의를 봐준 바, 전례 없이 장 1백은 면하게끔 해주었다.

실상 유배라기보다는 요양이어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만큼 모두가 성조의 공을 높이 보고 있다는 뜻이었다.

본래 받아야 할 죗값보다 더 높게 받은 만큼, 아마 예정보다 더 일찍 돌아올 것이란 예측이 여기저기서 조심스럽게 들려왔다.

그렇게 모든 것이 차츰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이른 새벽.

일찍이 자리에서 일어난 단이는 문을 열고 밤사이 방 안에 들여놓았던 신발을 섬돌 위에 다시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무사히 야광귀를 보낸 것이 기분 좋아 신을 향해 싱긋 웃어 주기도 하였다.

마당으로 내려서니 저 멀리 덕원이 대문에 세화를 붙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왕이 신하들에게 나누어준 설 그림이라더니, 과연 멀리서 보아도 그림이 무척이나 좋아 보였다.

멀찍이서 덕원과 눈이 마주쳐 꾸벅 허리를 숙인 단이는 곧 다신당으로 차를 준비하러 갔다.

다탁을 들고 사랑이 있는 곳으로 향하니, 미리 밖에 나온 결이 손수 중문을 열어 그녀를 안으로 들였다.

단이는 결을 보자마자 배시시 웃으며 새해 인사를 건네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어요, 나리.”

단이의 청아한 목소리에 결이 함께 입가를 늘였다.

“내 올해는 네 목소리로 인하여 운수대통하겠구나.”

그 말에 단이가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청참(聽讖)은 바깥을 돌아다녀야 하는 것 아니어요?”

“부러 이곳 안을 거닐었으니, 내게는 청참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럼 저도 올해 청참은 나리의 목소리로 하겠습니다. 저도 운수대통이어요.”

함께 마주 웃은 두 사람이 곧 방 안으로 들어갔다.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는 하루의 시작이었지만, 새해 첫날이라는 사실이 단이를 들뜨게 만들었다.

아직 햇살을 품지 않은 깨끗한 공기가 폐부를 채우는 것이 좋았고, 시리지만 머리를 맑게 해주는 찬바람도 좋았고, 어제와 같으면서도 어쩐지 달라 보이는 저 하늘도 좋았다.

하나 무엇보다 단이가 설레는 이유는 바로 결 덕분이었다.

해가 바뀌어도 이 남자와 함께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감사함.

변함없이 내 옆에 있어 줄 것이라는 믿음.

그 믿음을 아주 당연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저 대단한 사내 덕분에.

“오늘은 차가 특히 더 부드럽구나.”

“물을 덜 끓이고, 차 우리는 시간을 조금 줄여 보았어요.”

“……훨씬 좋구나.”

결이 새삼스러운 눈길로 찻잔을 보다가 다시금 차를 음미하였다.

과거의 잔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요즘 단이와 함께 물을 마주하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단이를 구하기 위해 물에 뛰어들었던 경험 덕분일까.

할 수 있다는 용기와 단이의 무한한 응원이 더해져, 결은 나날이 자신의 상처를 마주하는 것에 거부감이 없어지는 중이었다.

비록 처음부터 완벽하게 마주할 수는 없었지만 조급하게 굴지는 않기로 하였다.

오랫동안 상처를 끌어안고 살아온 만큼, 그것을 다시 지워나가기까지 그만큼의 시간이 걸릴 테니.

결은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나아가면서 조금씩 물에 대한 공포를 지워나가는 중이었다.

이따금 힘이 들 때에도 괜찮다는 단이의 다독임에 금세 마음이 진정되곤 하였다.

“와아, 우리 나리 이제 묽은 차도 잘 드신다.”

어린아이처럼 느릿한 감탄사를 뱉는 단이에 결이 답지 않게 뿌듯한 얼굴을 하였다.

잘한다, 잘한다 칭찬을 들으니 공연히 더 마음이 어려지는 것일까.

“말로만 하는 칭찬은 그리 와닿지 않는데.”

“그럼 어떤 칭찬을 원하시어요?”

결은 대답 대신 턱을 살짝 들었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선 고운 붉은 입술이 자연스럽게 시선을 끌어당겼다.

그러면서도 표정은 세상 진지하다는 빛을 보이니.

그 태연한 얼굴에 단이는 가슴속이 간질거려 웃음이 나왔다.

단이는 얼른 결의 뺨을 감싸 그 위에 쪽 수줍은 소리를 내곤 손을 거두었다.

그러자 결이 한쪽 눈썹을 까딱이며 볼멘소리를 내었다.

“너무 짧다. 나를 대견하게 여기는 마음이 그리도 짧단 말이냐.”

태산 같은 나리, 세상에서 제일로 듬직하신 나리.

그런 나리께 이런 귀여운 면모가 있다는 것을 그 누가 알까.

푸스스 웃음을 흘린 단이가 전보다 조금 더 길게 입을 맞추었다.

맞닿은 입술 위로 조금 전 결이 머금던 차의 향과 온기가 서서히 스며들었다.

잇새로 말랑한 과육을 희롱하던 결은 더 깊은 곳으로 향을 밀어 넣었다.

몇 번이고 맛을 보고 향을 취하여도 늘 새롭고 황홀한 것이 그 안에 있는 까닭이라.

한동안 단이에게 잔뜩 취해 있던 결이 곧 아쉬운 숨을 늘이며 그녀의 눈을 마주 보았다.

어느새 포근히 젖은 눈동자에 낯설면서도 익숙한 제 얼굴이 보였다.

이전에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던 행복한 사내가 그 안에 들어 있었다.

그 사내를 기꺼이 품어주는 사랑스러운 여인이 자신의 앞에 있었다.

결은 그녀를 두 눈 가득 담으며 밀어를 속삭였다.

“올해도 이 집에 너의 다향이 가득하였으면 좋겠구나.”

단이는 자신의 뺨을 감싼 결의 손에 얼굴을 기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이어요. 나리께서 제 차에 싫증을 내시지 않는 이상.”

“네 차를 마시고 싶을 때마다 마셨다면 지금쯤 다신당은 이미 비워졌을 것이다.”

네가 내려주는 차를 마시는 동안, 나는 아마 평생 갈증과 해갈 사이를 오가게 될 테니.

결은 다시금 고개를 숙여 단이가 줄 수 있는 가장 달콤한 것을 들이마셨다.

슬그머니 풀어지는 옷고름에 단이가 이미 열기가 들어차고 있는 눈으로 그를 만류하였다.

“나리, 조금 후에 주파 할아버지께 가시어야 하잖습니까…….”

“오늘 중으로만 가면 되지 않겠느냐.”

“하여도…….”

유약한 목소리는 곧 숨결과 함께 결의 입속으로 사라졌다.

정월 초하루의 아침은 1년 중 가장 늦게 찾아오는 터라.

하여 결은 촛불도 도로 끄고서 남은 어둠을 조금 더 그들의 시간에 붙들어 놓았다.

잠시 후, 단이가 자신의 선물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 더욱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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