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만물을 움트게 만들었던 햇볕이 조금 더 단단해져 어느덧 하지가 다가왔다.
슬그머니 올라가는 기온에 옷가지도 점점 얇아지고, 공기 중에 스며들기 시작한 물내음에 사람들은 장마를 대비하고자 작물들을 수확하고 모내기를 시작하였다.
1년 중 낮이 가장 길고 밤이 짧아지는 때라.
시도 때도 없이 쏟아지던 잠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게 된 단이는 홀로 마당에 나와 따사로운 햇볕을 즐겼다.
앞마당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종종색색의 꽃에 단이가 싱긋 미소 지었다.
가까이 다가가 향기를 맡던 단이가 배 속 아기를 향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백호야. 이 꽃들이 보이니? 전부 네 아버지가 너와 이 어미를 위하여 올봄에 심으신 것들이란다.”
결과 혼례를 올린 후부터 단이는 더 이상 훈련원 소다옥에 나가지 않게 되었다.
열흘에 한 번씩 충선에게 차를 배우러 술도가로 향하여도 이전만큼 자유롭지 않게 된 생활이었다.
거기에 백호까지 들어서면서 그나마 유일한 외출이었던 술도가까지 갈 수 없게 된 터라.
행여 단이가 답답해할까, 결이 정침 앞마당에 커다란 화단을 지어 단이가 좋아하는 꽃들을 한가득 심어주었던 것이다.
함께 있지 못하는 순간마저도 그의 사랑을 담뿍 느끼는 단이였다.
“참으로 예쁘지 않니?”
그러자 어느덧 여실하게 태가 나기 시작한 배 속에서 꿀렁거리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백호가 어미의 물음에 온몸으로 답을 하는 듯하였다.
“그래. 우리 이 꽃 실컷 구경하다 들어가자꾸나.”
단이는 소중하게 배를 감싸며 오래도록 꽃을 구경하였다.
그렇게 한참 동안 해바라기하며 마당을 거닐고 있는데, 문득 대문 밖에서 사람을 청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 서방님의 손님이 오신 것인가.
잠시 멈춰 서서 귀를 기울이고 있자니, 곧 보선 어멈이 무언가를 들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보선 어멈이 내민 것은 다름 아닌 편지 봉투였다.
“이거, 네게 전해주라 하던데. 밖에 웬 가마도 있고…….”
“저한테요?”
단이는 의아한 얼굴을 하며 봉투를 받아들었다.
고급스러운 색간봉투를 열어 안에 든 것을 꺼내니, 익숙한 필체를 새긴 서간지가 펼쳐졌다.
그 위에 적힌 내용을 읽어내려 갈수록 단이의 눈동자 역시 여러 복잡한 색으로 물들었다.
마침내 마지막 줄까지 읽은 단이가 봉투를 다시 갈무리하고서 보선 어멈에게 급히 말하였다.
“저, 잠시 어디 좀 다녀올게요!”
“어디를 가려고? 한창 몸 조심히 해야 할 때에.”
배시시 미소를 머금은 단이가 해맑게 말하였다.
“옹주 아기씨께요!”
선정이 드디어 한양에 돌아온 것이었다.
단이는 무조건 조심, 또 조심하라는 보선 어멈의 말에 손을 흔들어 주고는 종종걸음으로 대문을 향해 걸어갔다.
밖으로 나오니 화려한 가마 한 채가 기다리고 있었다.
단이를 발견한 천 상궁이 가볍게 입가를 늘이며 그녀에게 눈인사를 전하였다.
그녀는 가마의 입구를 손수 열어 안을 향해 손짓하였다.
“기다리고 있었소. 가마에 오르시오.”
“이 가마는…….”
“옹주 아기씨께서 숙인을 위하여 특별히 보내주신 것이오.”
단이가 양인 신분이 되었다는 것을 들었는지 천 상궁은 이전처럼 하대를 하지 않았다.
마냥 엄하게만 보였던 이전과 달리 바라보는 눈빛 역시 조금은 온화해 보였다.
단순히 신분의 변화 때문이라기보다는 반가움의 표시인 듯하였다.
낯설면서도 기분이 좋아지는 대접에 단이 또한 말간 웃음으로 화답하고서 가마 안에 들었다.
“홑몸이 아니신 분이니, 조심하여 가마를 몰거라.”
“예.”
천 상궁의 말에 가마꾼들이 여느 때보다 더 조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 상궁이 가마의 작은 창문에 대고 말하였다.
“혹여라도 불편한 것이 있으면 곧바로 말씀하시오.”
“예. 그러겠습니다.”
곧 가마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 타는 것이라 걱정한 것에 비해 가마는 아주 안정적으로 움직였다.
천 상궁이 그만큼 숙달된 가마꾼들을 불러 조심, 또 조심 시킨 덕분이었다.
그렇게 느릿느릿 안전하게 이동한 가마는 곧 옹주방 앞에 도착하였다.
땅에 가마를 내릴 때까지도 조심스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이윽고 천 상궁이 가마를 열어주었다.
실로 오랜만에 찾은 화선당이었다.
근 1년 만에 찾아온 탓인지 괜스레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이쪽으로 오시오.”
단이는 천 상궁의 뒤를 따라 옹주방으로 향하였다.
“옹주 아기씨, 숙인 홍 씨를 모셨사옵니다.”
“안으로 들이게.”
낯익은 목소리에 천 상궁이 문을 열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앞을 본 단이의 눈시울이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오랜만이구나, 단이야.”
기억 속 마지막 모습과 꼭 같은 얼굴의 선정이 그녀를 향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옹주 아기씨.”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를 부른 단이는 기어이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그간 편지로 소식을 주고받긴 하였으나 어찌 직접 얼굴을 마주하는 것만 같을까.
혹여 몸이 아픈데 괜찮다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닐지, 다음 번 연통에 또 돌아오는 날을 미룬다 하시진 않을지 숱하게 걱정하곤 하였다.
다행히 걱정했던 것보다, 아니. 마치 그런 일은 없었다는 듯 건강해 보이는 선정에 단이는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울먹이는 단이의 표정에 선정도 함께 감정이 북받쳤는지 눈물을 글썽였다.
두 여인은 한동안 말보다 더 깊은 눈빛을 나누며 그간의 안부를 주고받았다.
오랜만에 만난 만큼 나눌 이야기 또한 무궁무진하게 많았다.
이전에 편지로 들었던 이야기도 말로 전하니 또 새로운지라.
두 여인은 이미 알고 있던 일들도 마치 새로이 듣는 것처럼 새삼스러워하며 수다를 떨었다.
언제나 짙게 우린 잎차가 올라와 있던 다탁에는 달콤한 향을 풍기는 대추차와 쑥편이 자리하고 있었다.
전부 임산부에게 좋다 하여 선정이 특별히 엄선해온 것들이었다.
선정은 볼록하게 나온 단이의 배를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 이 안에 너와 서결 장군의 아이가 들어 있다는 것이지?”
“예, 옹주 아기씨. 백호랑이 태몽을 꾸어서 태명은 백호라 지었습니다.”
마냥 어여쁜 동생처럼 느껴졌던 단이가 벌써 어머니가 된다는 사실이 신기한 까닭이었다.
단이가 알려준 태명을 곱씹던 선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호, 참으로 좋은 태명이구나. 분명 건강하게 무럭무럭 자라서 나올 것이다.”
순간 배 속에서 백호가 발을 굴렀다.
선명히 느껴진 태동에 단이가 푸스스 웃으며 선정에게도 이를 알려주었다.
“옹주 아기씨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백호도 감사했나 봐요. 신나서 움직이네요.”
“그게 정말이냐?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내 말을 듣는다니, 참으로 놀랍구나.”
“활발한 아이라 그런지 말을 걸면 신기하게도 곧잘 움직이곤 하여요.”
“백호랑이면 사내아이 태몽이라 들었는데, 장군을 닮아 씩씩하게 자라날 모양이다.”
“그리된다면 참으로 좋을 것 같아요.”
“그리될 것이다. 암, 그렇고말고. 누구의 아이인데.”
선정의 덕담에 단이는 수줍게 웃으며 배를 감쌌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선정이 뒤늦게 무언가 생각난 듯 천 상궁을 불렀다.
“천 상궁, 내가 아까 말했던 것들을 가져와 주게.”
“예, 옹주 아기씨.”
곧 돌아온 천 상궁이 나인들과 함께 비단 보자기에 싸인 커다란 함을 여러 개 들고 돌아왔다.
한눈에 보기에도 어마어마한 양의 선물에 단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것이 다 무엇이어요, 옹주 아기씨?”
“회임 중에는 보양이 최우선이라 들었다. 순무 씨 가루는 죽을 해먹으면 어미에게 좋고, 죽순과 말린 해삼, 전복은 사내아이를 낳는 데 좋다고 하니 가져가서 먹도록 하여라.”
“이 귀한 것들을 제가 어찌…….”
“그저 소소한 선물이니 개의치 말고 받거라. 이곳 궐 안에선 아주 흔한 것이다.”
사실 소소하다고 치부하기엔 부담스러울 만큼 귀한 식재료였다.
특히 강화도에서 난 순무 씨로 만든 죽은 아기씨를 품은 왕비나 숙환으로 자리보전하는 왕대비에게만 올리는 특별한 음식이라 양갓집에서도 쉬이 먹기 힘든 것이었다.
선정 역시 이것을 구하기 위해 수라간 궁녀들을 며칠씩 괴롭히곤 하였으나, 이것만큼은 단이에게 비밀이었다.
그저 단이가 무사히 순산할 수만 있다면 저깟 순무 씨 따위 직접 키워서라도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한참 즐거이 시간을 보낸 후.
어느덧 하늘을 조금씩 물들이는 주홍빛과 함께 단이가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선정은 가마 앞에서 단이의 손을 꼭 잡은 채 말하였다.
“몸이 무거워 자주는 힘들더라도, 간간이 이렇게 나를 찾아와줄 수 있겠느냐?”
“옹주 아기씨께서 불러 주신다면 만삭에라도 찾아올 것이어요.”
손을 맞잡으며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눈빛엔 진심이 가득하였다.
여전히 착하고 순수한 단이.
그저 인사치레일 뿐이라 하더라도 선정은 진심으로 기뻤다.
“서결 장군에게도 안부 전해주고.”
“그리하겠습니다, 옹주 아기씨.”
그러다 불쑥 어떤 생각이 머리를 스쳤는지, 선정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더 이상 장군에게 마음일랑 일절 남아 있지 않다. 방금 것도 단순히 예의상 말한 것이니, 혹 기분이 나빴다면 내 사과하마. 전하기 싫다면 전하지 않아도 좋고.”
이미 편지로 몇 번이나마 전하였던 사과였다.
하지만 그저 글자 몇 줄에 어찌 그 미안한 마음을 다 담고, 또 용서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었을까.
행여 단이가 작년 일로 마음에 앙금이 남아 있진 않을까 하여 이따금씩 마음을 졸이던 선정이었다.
“예? 그것이 무슨…….”
순간 이해하지 못하고 되물었던 단이는 뒤늦게 그 뜻을 알아채고선 아, 낮은 탄식을 흘렸다.
혹 괜히 말을 꺼내어 긁어 부스럼을 만들었나.
갈팡질팡하며 초조해하길 잠시.
단이가 맞잡은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옹주 아기씨.”
“응?”
“저는 항상 옹주 아기씨께 감사한 마음만 갖고 있어요.”
그녀는 입가를 길게 늘이며 포근한 눈으로 선정을 바라보았다.
“하여 감히 바라건대, 옹주 아기씨께서도 제게 그런 좋은 마음만 간직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미안한 마음, 불편한 마음 같은 것 말고, 고맙고 귀한 마음만요.”
“…….”
“이미 다 지나간 일이잖아요.”
그 말에 선정의 눈동자가 옅게 일렁였다.
여러 감정이 스치는지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하던 선정은 이내 단이를 마주 보았다.
단이가 어떤 말을 전하고 싶은지 잘 알기에.
어떤 마음으로 이 말을 하는지 잘 알기에.
그녀의 말대로 과거는 지나갔으니 전부 잊고, 현재 남은 관계들만 소중히 여기는 것으로.
어떤 용서가 이보다 따스하고 사랑스러울 수 있을까.
“그래. 그리하마.”
선정은 일말의 불편한 마음도 남기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옹주 아기씨.”
허리 숙여 인사한 단이가 가마에 올라탔다.
선정은 몇 번이고 천 상궁에게 단이를 잘 데려다주길 당부하고서 멀어지는 가마를 지켜보았다.
순간 코 아래 스친 여름날의 습기 어린 바람이 아득한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한때는 뜨거웠고, 애처로웠으며, 생에 두 번은 없을 것이라 생각할 정도로 온 힘을 다하였으나…… 이제는 기억마저 거의 희미해져버린 어느 날의 감정.
죄책감이라는 흔적으로 남아 있던 그것을 선정은 오롯이 흘려보내기로 하였다.
지나간 과거 때문에 언뜻언뜻 머뭇거리기엔, 그들의 관계는 더없이 찬란하고 소중하였으므로.
“다음에, 또 보자꾸나. 단이야.”
선정은 세상 더없이 편한 미소를 머금으며 가마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었다.
저 아이의 품에 안길 사랑스러운 아기를 함께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