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그랬더니 막 이렇게 몸을 움직이는 거 있지요?”
“벌써부터 빨리 세상에 나오고 싶나 보구나.”
“그런가 봐요. 그래서 찻잎 종류에 대해서도 계속 설명해 주고 그랬어요.”
“자, 아.”
결이 숟가락 가득 순무 씨 죽을 퍼 입 앞에 대주었다.
한창 재잘재잘 떠들던 단이는 자연스럽게 그것을 받아먹었다.
괜찮다고 하여도 도무지 결이 숟가락을 내어주질 않으니, 결국 단이도 체념하고 결이 주는 대로 먹게 된 것이었다.
결은 마치 어린아이를 먹이듯 속도까지 맞추며 열심히 죽을 입에 넣어주었다.
고소하면서도 입안이 개운해지는 맛에 예정보다 오래가고 있는 입덧도 말끔히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단이는 또 한 번 결이 떠먹여준 죽을 삼키며 마음을 놓은 듯 웃었다.
“그래도 옹주 아기씨께서 건강히 다시 돌아오셔서 다행이어요.”
“많이 걱정하였던 모양이로구나.”
“예. 옹주 아기씨께선 괜찮다고 하셨지만 어쨌든 몸이 상하신 채로 온양행궁에 가신 것이었으니까요. 예정보다 돌아오는 날을 더 늦추시기도 하였고…….”
작년 일만 생각하면 아직도 열이 오를 정도로 남준백이 너무도 미웠다.
결뿐만 아니라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전부 그 사람 하나 때문에 고통을 받았으니.
그나마 준백이 목숨으로 죗값을 치렀다기에 다행이라 여기는 것일 뿐.
만에 하나 아직까지도 살아 있었다면 정말 나쁜 마음을 먹고 매일 저주를 퍼부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쁜 생각은 그만.”
표정에 드러난 분노를 알아챘는지, 결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의 마음을 진정시켰다.
단이는 입술을 맞물며 시무룩하게 말하였다.
“그렇지만 아직도 옛날 일을 생각하면 저도 모르게 화가 나는 것을요.”
“이미 고여 썩어가는 것에 계속 눈길을 두면 너 또한 발목이 붙잡히게 된다.”
내가 언젠가 그러하였던 것처럼.
너로 인해 깊은 웅덩이에서 벗어나기 전까지, 그리 괴로워하였던 것처럼.
“우리는 계속 흘러가야지. 지나간 것은 뒤에 놔두고서.”
그 말에 무언가를 깨달은 단이가 눈빛에 품었던 나쁜 마음들을 얼른 지워냈다.
선정을 만나 예전 일은 다 잊고 앞으로만 생각하자고 제 입으로 말해 놓고, 돌아서서 자신이 같은 실수를 범하고 있었다.
그래.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흘러가야지.
곁에 남은 사랑하는 사람들만 바라보며.
이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일궈나갈 행복한 미래만 생각하며.
“그리고 나쁜 생각은 우리 백호한테도 좋지 않을 테고.”
결이 단이의 입가에 살짝 묻은 죽을 손끝으로 밀어 닦아주었다.
자연스럽게 그것을 붉은 입술로 가져가는 그의 모습에 단이는 일말의 남은 화도 잊고서 얼굴을 붉혔다.
“그런 건 그냥 닦으시지…….”
“무엇 하러. 내 아내의 입에 묻은 것인데.”
“아니면 서방님 몫도 가져와달라 부탁드릴까요? 아까 보니 꽤 많이 만들어 놓은 것 같던데.”
“난 이리 먹는 것이 더 맛있다.”
결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또 한 번 죽을 떠 입 앞에 대주었다.
입술에 묻지 않게 조심해서 먹어야 하나.
아니면 일부러 입술에 좀 묻혀가며 먹어야 하나.
순간 엉뚱한 생각의 기로에서 갈팡질팡하며 단이는 또 한 번 숟가락을 입에 물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어김없이 입가에 죽이 묻었다.
일부러 그랬다기엔 분명 조심하는 입술이었지만, 또 실수라기엔 약간의 고의가 묻어난 모양이었다.
그것을 본 결이 마치 놀리듯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단이는 부끄러운 마음에 눈을 빠르게 깜빡이면서도 조금은 뻔뻔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서방님께서 죽 맛을 궁금해하시는 듯하여…….”
결국은 실수보다 고의가 더 짙었다는 고백이었다.
낮게 웃음을 흘린 결이 귀엽다는 듯 아내를 바라보았다.
그러곤 단이가 어찌할 새도 없이, 그릇 대신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서 깊이 입을 맞추었다.
행여 배 속 아기에게 무리가 갈까, 임신 사실을 알고 나서부턴 합궁조차 자제하였던 결이었다.
그러니 참아온 열기가 얼마나 짙고 깊을까.
입술을 탐하는 지금도 손은 단이의 유려한 선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옷 위를 스치는 뜨거운 손길에 단이의 숨도 조금씩 달뜨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옷고름을 잡아당길 듯 말 듯 하는 결의 손길에 단이는 애가 탔다.
끝 간 데 없이 달아오르는 몸에 결의 옷자락을 그러쥔 작은 손이 바르르 떨려왔다.
결이 불어넣어 주는 숨결로 겨우 숨을 고른 단이가 물기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안아주세요, 서방님…….”
단이의 몸을 배회하던 손이 우뚝 멈췄다.
결은 터질 듯한 욕망을 애써 억누르며 머뭇거리는 눈길로 불룩한 배를 바라보았다.
“백호에게 무리가 가지 않겠느냐.”
단이의 두 뺨이 전보다 더 붉어지더니, 예기치 못한 말을 흘렸다.
“의원님께서…… 이 시기 때엔 괜찮다고 하시었는걸요.”
“…….”
“부모가 함께 행복하여야 아이도 편안할 거라고, 그러니 억지로 참으려 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녀가 직접 의원에게 물었든, 혹은 의원이 주의사항 차 일러주었든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단이가 그 말을 귀담아듣고 이리 전한다는 것이었다.
한 가닥 남아 있던 인내심마저 툭 하고 끊기고 말았다.
“……힘들면 꼭 말해야 한다.”
단이는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하며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곧 두 사람의 몸이 바닥 위에 나란히 포개어졌다.
아직 저녁노을이 하늘에 다 퍼지지도 않았건만.
공기 중을 떠도는 더운 기운으로도 모자라서 부부는 서로의 온기를 간절하게 찾아들었다.
애타게 원하는 손길 속에서도 결은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최대한 그녀를 배려하고 조심하려 노력했다.
하여 단이는 자신이 깨지기 쉬운 찻잔이 되었다는 착각까지 들었다.
때로는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강한 자극보다 온몸이 녹을 만큼 따스한 부드러움이 더 깊게 밀려드는 법이니.
단이와 결은 그 어느 때보다 안락한 절정에 빠져 서로를 꼭 끌어안았다.
나른해진 숨을 길게 내뱉던 결은 여운을 느낄 새도 없이 단이의 몸을 이불로 꽁꽁 감쌌다.
땀에 젖은 몸이 식어 한기를 느낄까 걱정된 탓이었다.
이불만으로는 부족한 건지, 아니면 돌돌 말린 모습이 귀여운 건지.
결은 이불에 폭 감겨 있는 아내를 품안 가득 감싸 안았다.
단이는 마지막까지도 자신을 아끼는 결의 모습에 감동하여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덥습니다, 서방님.”
“그래도 목욕물이 전부 데워질 때까지는 이러고 있거라. 여름 감모는 더 위험하다 하였으니.”
결은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낸 자리에 입을 맞추곤 다시금 틈 없이 아내를 안았다.
그리하여 결국 단이는 정방에 갈 때까지도 이불로 둘둘 말린 채 결에게 안겨서 가야만 했다.
단이를 바닥에 내려준 결이 먼저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곤 뒤를 돌아 단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들어오거라.”
“저도…… 함께요?”
“그래. 함께.”
잠시 머뭇거리던 단이는 결이 내민 손을 잡고 욕조 안으로 발을 들였다.
두 사람은 속적삼만 입은 차림으로 함께 따듯한 물에 잠겼다.
임산부에게 좋다는 것들을 넣어놓은 주머니 덕분에 몸이 편안해지는 향긋한 향이 느껴졌다.
결은 뒤에서 단이를 끌어안은 모양새로 앉아 손으로 조심조심 그녀의 몸에 물을 끼얹어주었다.
쪼르륵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물소리에 집중하던 단이가 꿈결처럼 몽롱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요즘 종종 그런 생각이 들어요. 만일 심 다점에서 서방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저는 어떻게 지냈을까 하고요.”
“……그다지 상상하고 싶지 않은 일들을 생각했구나.”
단이는 싱긋 웃으며 결의 손을 잡았다.
“그랬다면 아마 이런 행복은 평생 모르고 살았겠지요? 언제나 같은 하루를 살아가면서 아까운 시간들을 흘려보냈을 것이어요.”
몸을 반쯤 돌려 결과 눈을 마주친 단이가 반달 같은 눈을 하며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 제게 주어진 이 삶이 너무도 감사해요. 감히 감사하다는 말로는 전부 표현할 수 없을 만큼요.”
그녀의 얼굴에 피어난 미소가 결의 입가로도 번졌다.
가슴이 뻐근해질 만큼 행복감이 드는 것은 그도 마찬가지였다.
결은 앞서 실컷 희롱했던 입술에 다시금 부드러이 입을 맞추곤 그녀가 자신에게 편히 기댈 수 있도록 어깨를 감쌌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
“내 삶은 너를 만나고 난 후에야 비로소 완성이 되었다.”
그러니 단이를 만나지 않았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없다면 곧 그 자신도 없게 되는 것이니.
태초에 주어진 운명 자체가 서로를 만나기 위해 달려온 것이라 믿고 싶었다.
“백호가 태어나고 나서도 내게는 네가 제일 우선이다.”
“백호가 들으면 아버지께 서운하다고 할 것이어요.”
“아무리 그래도 이건 어쩔 수 없다. 백호가 태어나면 너는 너 자신조차 돌보지 않고 아이를 기를 것이니, 내가 너를 더욱 챙겨야지.”
자식이 아무리 귀하다 한들 결로선 단이가 더 우선일 수밖에 없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라 하여 정이 가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백호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고 몸이 가벼워지는 기분인데, 어찌 부성애를 느끼지 않는다 할 수 있을까.
다만 벌써부터 매사에 지극한 모성애를 보이는 단이라.
행여 그녀가 무리를 하게 될까 결은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이 작고 여린 몸으로 해산의 고통을 오롯이 감당해야만 한다는 사실이 미안하고 또 미안한 마음이었다.
“그러니 부디 네 몸을 잘 보전하거라. 약조해 주겠느냐.”
어깨에 닿은 입술에서 결의 걱정스러운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잠시 안쓰러운 눈빛으로 결을 바라보던 단이는 그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말라는 듯.
전부 다 잘될 거라는 듯.
“서방님만 곁에 계셔 주신다면, 그리고 우리 백호를 위해서라면 저는 전부 이겨낼 수 있습니다. 하니 아무 걱정 마시어요. 저희 셋, 분명 무사히 잘 만날 수 있을 것이니.”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주는 거대한 위로가 파도처럼 밀려와 가슴을 적셨다.
진득하게 남아 있던 한 줌의 걱정마저 물결에 밀려 사라졌다.
몸집은 작아도 이럴 때만큼은 단이가 더 어른처럼 느껴졌다.
“그래. 남은 달 잘 채워서 무사히 백호를 만나자꾸나.”
결은 단이를 안은 팔에 조금 더 힘을 주며 좋은 생각만 하기로 다짐하였다.
태교를 함에 있어 아비의 역할 또한 매우 중요하다 하였으니.
어느 때건 좋은 생각과 마음가짐, 행동으로 모범을 보여야 복중 아기에게도 좋은 영향이 간다 하지 않는가.
그러니 걱정보다는 기대를 품고 맞이할 아기를 기다리자.
그것이 단이를 지키는 데에도 더 좋을 것이니.
목욕을 마치고 정침으로 돌아온 두 사람이 일찍이 잠자리에 들려고 준비하던 중, 누군가 찾아왔는지 밖에서 대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가 기다리길 잠시.
곧 정침 밖에서 덕원의 인기척이 들렸다.
“무슨 일인가.”
“제주도에서 이것이 왔습니다.”
덕원이 내민 것은 대나무 껍질로 얽어 만든 약초함이었다.
이따금 주고받은 편지를 통해 단이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성조가 그녀를 위해 제주의 특산품 등을 보내준 것이다.
“그놈이 유배가 아니라 유람을 갔구나.”
미간을 좁힌 결이 질투 어린 혼잣말을 읊조렸다.
아닌 게 아니라 말이 유배일 뿐, 성조는 그곳에서 새로운 터를 잡았다며 매 편지마다 신난 마음을 잔뜩 써 보내곤 하였다.
아마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근 1, 2년 내에 곧 한양으로 오게 될 것 같았다.
선물이 썩 마음에 들진 않았으나 육지에선 쉬이 구할 수 없는 귀한 것들이라.
결은 질투심을 잠시 내려놓고 덕원에게 함을 부엌에 놔두어라 일렀다.
“무슨 일이시어요?”
“성조가 너에게 선물을 보내줬다 하는구나.”
“성조 나리께서요?”
“제주도에서 좋다 하는 것들을 보낸 모양이니, 내일 찬찬히 살펴보자.”
단이는 놀란 눈을 깜빡이다 이내 해사하게 웃었다.
뜻을 알 수 없는 그녀의 웃음에 결이 의아한 눈빛을 띠었다.
“어찌 그리 웃느냐.”
“우리 서방님, 나를 아직도 이리 어여삐 봐주시는구나 싶어서요.”
“무슨 그런 당연한 말을…….”
단이는 결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아무리 감춘다 한들 그의 낯빛에 드러난 질투를 단이가 모를 리 없었다.
그녀는 기분 좋은 웃음을 쿡쿡 흘리며 결의 뺨에 쪽 입을 맞추었다.
“우리 얼른 자요, 서방님.”
뒤늦게 자신의 마음을 들켰다는 걸 알아챈 결이 못 이기겠다는 듯 실소를 흘렸다.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으나 어찌하겠는가.
이것이 솔직한 마음이거늘.
“그래. 자자.”
포근한 이불 아래 나란히 누운 부부는 오늘도 행복한 단꿈에 함께 젖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