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그 몸으로는 에이프릴이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없긴 하지.”
알렉시스 공작의 한마디에 식사 중이던 사람들의 시선이 죄다 에이프릴에게로 향했다.
리안과 바라크, 집사장과 식기를 내려놓고 있던 집안의 사용인들까지 전부 말이다.
에이프릴에게 시선을 주지 않는 건 알렉시스
공작 단 한 사람뿐이었다.
나마저도 식사를 하면서 에이프릴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에이프릴의 편을 들고 싶어도 그럴 상황이 안 되었기에 바라크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식탁 위에 있는 에이프릴의 손이 둥글게 말아 쥐어지는 걸 물끄러미 바라봤다.
에이프릴이 공작저로 돌아오게끔 만든 건 나였지만, 바라크가 그렇게 별장에만 있으라고 권한 데에는 전부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결국 말을 듣지 않고 공작저로 쳐들어오더니 나쁜 일만 당하지 않나.
“에이프릴이 상황을 이해해 주었으니…….”
비죽 웃음이 흘러나오려는 걸 나는 애써 눌러 삼켰다.
“에이프릴이 호전될 때까지는 이리나.”
공작이 나를 조용히 호명했다.
식기를 내려놓고 고개를 들자, 리안과 에이프릴, 그리고 나와 똑같은 청회색 눈동자가 내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공작의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는지 들끓는 바라크의 노을색 눈동자도 뒤이어 눈에 들어왔다.
“그래 왔던 것처럼 네가 사람들 앞에 나서다오.”
“…예, 아버지.”
‘아버지’라고 죽어도 부르기 싫지만, 별수 있나.
이 상황에서 에이프릴과 그 번견의 기분을 더럽게 만들기 위해서는 ‘아버지’라고 부르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인 것을.
놀라워하다가 기뻐하는 기색을 드러내고 있는 알렉시스 공작을 향해 난 빙긋 웃었다.
그래, 기분이 한껏 고조되어야 밑바닥으로의 추락도 커지는 법이니까.
공작저에 있는 이들 모두가 가지각색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에이프릴과 바라크는 분노했고, 공작은 애써 기쁨을 숨기려 했으며, 집사장과 사용인들은 조금 당혹스러운 기색이었다.
내가 공작저로 처음 들어왔을 때와는 달리 복잡미묘하고 걱정 가득한 리안의 눈빛은 그저 역겹기만 할 뿐이었다.
나는 속내를 감춘 채, 과거 그들의 가족이었을 시절 지었던 미소를 얼굴 위로 그려내었다.
* * *
“도착했습니다.”
마차의 문이 부드럽게 열리자 보이는 건, 물이 한 번도 마른 적 없는 공작가의 분수대였다.
분수대 가장 꼭대기의 백조 조각상을 보자 내가 드디어 라이즈 공작가에 돌아왔음을 실감하게 되었다.
리안이 먼저 내리고는 여느 귀족가의 아가씨를 에스코트하듯, 그가 자연스럽게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리자, 사용인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들 사이로 몇몇 익숙한 얼굴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와 리안이 타고 온 마차 뒤를 따라온 클리프를 비롯하여 공작가의 사용인들은 3년 전과 크게 바뀌지 않은 채였다.
“오셨습니까, 도련…….”
날 발견한 하녀장의 진한 갈색 눈동자가 흠칫한 기색을 보였다.
하녀장인 카나는 똑같이 생긴 에이프릴과 나를 구별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다른 사용인들은 몰라도 하녀장은 내가 라이즈 공작가의 진짜 아가씨인 에이프릴이 아니라는 것쯤은 바로 눈치챘을 것이다.
“도련님.”
한 박자 늦게 도련님이라는 단어를 내뱉은 하녀장과 달리, 내가 도착하리라는 걸 미리 들은 듯 집사장은 늘 봐왔던 단조로운 얼굴로 리안을 맞이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서재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와 리안을 기다리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도련님, 도대체…….”
더듬더듬 말을 잇는 하녀장은 나에 대해서 묻고 싶어 하는 모양새였다.
“아버지부터 먼저 뵙겠네.”
“예.”
“가자, 이…….”
일주일간 자연스럽게 불렀던 ‘이리나’라는 이름이 리안의 입에서 무심결에 튀어나올 뻔했다.
리안의 뒤를 따라가면서 오랜만에 들어간 공작저는 백팔십도 바뀌어 버린 별장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화려한 장식품과 미술품들로 가득 차 있는 홀은 누구의 취향인지 모를 일이었다.
이 집안, 세 부자의 취향은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걸리적거리는 걸 딱 질색하는 공작과 공자들이기에 이런 취향은 하나뿐이었다.
그 애 취향이겠네. 보통 집안을 꾸미는 것도 가문의 안주인이 할 일이었으니까.
안주인이었던 공작부인이 죽자마자 자연스럽게 에이프릴이 꾸미게 된 거겠지.
나를 보고 수군거리는 낯선 사용인들을 무시하면서 익숙하게 위층으로 올라가 알렉시스 공작의 서재 앞에 섰다.
“아버지, 접니다.”
똑똑. 마호가니 색의 문을 가볍게 두드린 리안이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녹슨 소리 하나 없이 부드럽게 문이 열리면서 보이는 건 라이즈 공작가의 현 가주, 알렉시스 힐 라이즈였다.
“열아홉 번째 네 생일날 정식으로 입양 절차를 밟을 것이다.”
그리고 한없이 달콤한 꿈을 꾸게 해주었던, 한때는 내 아버지였던 이이기도 했다.
기억 속에 남아 있던 모습처럼 책상 앞에서 업무를 보고 있는 모습이 아니라, 흔들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은 긴장한 리안 힐 라이즈만큼이나 색다른 모습이었다.
공작가의 홀과 달리 서재는 공작의 취향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처럼 앤티크한 분위기를 가진, 간소함 그 자체였다.
X자로 걸려 있는 검 두 자루와 불씨가 꺼져 있는 난로, 그리고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까지.
거추장스러운 장식품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방이기도 했다.
“……이리나.”
의자에 앉아 있던 공작의 시선이 내게로 칼날처럼 와 꽂혔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조금 더 길어진 은회색의 머리카락과 빛을 잃지 않은 청회색의 눈동자까지.
스쳐 보았을 땐 여전히 냉랭하고 변한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모습보다 조금 더 여윈 얼굴이었다.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공작님.”
“…….”
“저를 찾으셨다고요.”
속내를 꾹꾹 눌러 삼키면서 애써 웃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어서 시골구석에서 살고 있는 날 부득불 찾아내어 데리고 온 건지 모르겠다.
그러잖아도 시골에서는 볼 수 없는 고위 귀족의 등장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는데, 날 데려가려고 하니 시시콜콜 캐묻는 이웃 주민들로 인해 피곤했던 일주일을 떠올렸다.
“널 다시 공녀로 대우하기 위해서다.”
그 한마디면 내가 냉큼 좋다고 따라나설 줄 알았던 리안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가당치도 않은 말이었다.
지난 8년 동안 이리나 데빈이 아니라, ‘에이프릴 힐 라이즈’로 살게 만들었으면서.
약속이라는 걸 단 한 번도 지킨 적 없던 공작가였는데 이번이라고 지킬 리가 있겠나.
하지만 공작가로 돌아가지 않았으면 하는, 마지막까지 아버지와 함께했던 알리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공작가로 돌아가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는 이런 날이 오기만을 기다렸기 때문이다.
언젠가 공작가의 등에 칼을 꽂을 기회가 생긴다면 그때는 절대 놓치지 않을 것이라고.
“그간 잘 지냈느냐.”
잘 지내지 못했을 게 분명한 시간인데 왜 이런 쓸데없는 물음을 던지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새삼 공작이 대단히 뻔뻔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내 아버지를 죽게 만들었으면서 어떻게 이렇게 당당하게 다시 나를 공작저로 불러들일 수 있는지를 말이다.
개국공신의, 명문가라고 소문이 자자한 고위 귀족들은 죄다 이런 걸까.
조소가 일순 떠오를 뻔했지만 꾹 참았다.
“그럭저럭 지냈습니다.”
잘 지내지 못했다라는 말은 자존심이 상하였고, 그렇다고 해서 잘 지냈다라고 말하기에는 내 얄궂은 자존심이 용납지 못했다.
“공작님께서는 그간 잘 지내셨나요?”
마찬가지로 같은 질문을 했지만, 그에게서 시원한 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지난 시간이 마찬가지로 힘들었다는 걸 말해주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친딸과 함께한 지난 시간이 행복하지 않았느냐고 묻고 싶을 정도의 긴 침묵이었다.
“……그래.”
“공자님께서 지난 일주일 동안 귀가 따갑도록 설명해 주셨습니다.”
“…….”
“저를 찾으신다는 것도, 그리고 제 시간을 보상하고 싶어 하신다는 것도.”
“그래.”
첫 번째 대답이 늦었다면, 지금의 대답은 망설임도 없이 빠르게 나왔다.
“이리나.”
조용하고 나직하게 불리는 이름이 낯설다.
나는 꽤 긴 시간 동안 내 이름을 가진 적이 없었다. 그랬기에 공작이 ‘이리나’라는 이름을 입에 담았을 때는 제삼자의 이름을 들은 듯한 느낌이었다.
“예, 공작님.”
두 번 다시 아버지라 부르지 말라고 했던 지난날의 명에 따라 착실히 ‘공작님’이라고 부를 때마다 그는 종종 마차 안에서 봤던 리안과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죄책감 어린 얼굴.
“네게…….”
입술을 무겁게 달싹이던 공작이 숨을 짧게 들이마셨다.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기 싫기라도 한 듯, 얼굴 위로 드러났던 죄책감이 사라졌다.
“부탁이 있다.”
“하세요.”
그래, 순순히 보상해 주겠다는 이유로 부를 것이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어마어마한 부탁을 하려고 이렇게까지 망설이고 있는 건지.
“네가 다시 한번 딸이 되어주면 좋겠구나.”
누군가가 알람시계를 딸깍 누르고 시간을 멈추게 한 느낌이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서재가,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 그리고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방 안의 공기가 그런 착각을 일게 만들었다.
“딸이요?”
날 똑바로 향하고 있던 청회색의 눈동자가 눈꺼풀이 덮이면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똑바로 바라보지 않은 채 그가 입술을 열었다.
“1년만, 에이프릴로서 이곳에서 지내다오.”
저 말을 듣고 놀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염치없다는 걸 알지만…….”
차가운 물이라도 뿌린 것처럼 싸늘해진 서재에 공작의 목소리만이 느리게 울렸다.
“부탁하마.”
“…그 부탁을 받아들인다면.”
나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있던 공작이 고개를 들었다.
“제게 뭘 해주실 건가요, 공작님?”
나로서는 아주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