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가족이라 생각했던 이들에게 배신당한 것이 그저 밉다는 말로 쉽게 표현되는 것인가?
8년을 함께 지내왔음에도 변명 한 번 하지 못하게 만들고, 그래도 오라비라 믿었던 이에게는 손목까지 잘릴 뻔했으며, 하물며 친아비까지 죽게 만들었는데…….
그저 야속하고 밉다는 말로 설명이 될까? 세상의 모든 악의란 악의를 전부 모아도 부족한 게 내 마음이었다.
“그래도…….”
“집사장.”
뒤에 나올 말이 뻔하였던지라 듣고 싶지 않다는 의미로 그를 불렀다.
과거 잘 따랐던 노인은 이제 귀까지 먹어가는지 내 말은 들리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이번 한 번만 이해해 주십시오.”
집사장이 하고 싶은 말은 그런 거겠지.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 그렇지만 그 이유는 지금 말할 수 없다, 이런 말들.
합당한 이유가 있다면 가족을 그리 내쳐도 되는 것인가 반문하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삼켰다.
공작가에 정이 떨어지기 전에 이 말을 들었더라면 또 달랐을지 모르지.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어른들이 아이를 달래는 듯한 사탕발림에 창자가 저 밑에서부터 비틀리는 느낌이었다.
“조금만 이곳에서 견뎌주세요. 1년이 지나면 공작님은…….”
패트릭이 짧게 숨을 들이켰다.
“아가씨께 합당한 대가를 받으실 겁니다.”
“합당한 대가라…….”
리안은 공작이 날 이곳에 부른 이유도, 그리고 1년이라는 기간에 대한 것도 몰랐지만 패트릭은 알고 있는 듯한 눈치였다.
“궁금하고 기대도 되네.”
공작이 나를 부른 이유와 1년이 지난 이후에 공작이 내게 줄 합당한 대가까지도.
그게 제법 괜찮은 대가일 테니 이렇게까지 말을 하는 거겠지.
살짝 애원까지 하는 눈치에 입술 끝을 부드럽게 말아 올린 뒤 고개를 끄덕였다.
“공녀님을 위협했던 내게 줄 합당한 대가가 무엇인지.”
그리고 공작이 1년 뒤에도 그 마음을 계속 유지하고 있을지도 말이다.
* * *
왜 이렇게 이상하지.
크게 변한 것 없는 공작가를 둘러보면서 느껴지는 미묘한 비틀림에 절로 인상이 써졌다.
공작가로 돌아온 걸 몇 사람이 봤고, 수도에서 소문이 널리 퍼졌을 게 분명했다.
소문이 퍼지는 건 반나절이면 충분하니까.
그리고 지금은 반나절은 무슨, 하루가 꼬박 지난 셈이었으니 수도 사교계의 중심에 있는 이들에게도 공작가의 공녀가 돌아왔다는 말이 전부 돌았을 것이다.
한데 한미한 가문의 영애도 아니고, 공작가의 공녀가 돌아왔는데도 이렇게 조용하다고?
“달리 내게로 온 서신이 없다고?”
“예, 아가씨.”
공작가에서 내 전담으로 붙여준 하녀에게 물어보자,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공녀로 대우하겠다는 말이 틀리지 않았는지 모두가 나를 진짜 에이프릴로 대하고 있었다.
궁금한 것이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에이프릴이 무엇 때문에 별장에 있는지에 대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어째서 약혼자인 페르포네에게서 연락이 없는지였다.
다른 이들을 만나게 된다면 왜 에이프릴이 별장에 있는 것인지 알게 될 일이었는데 왜 말을 해주지 않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패트릭에게 물어보아도, 카나에게 물어봐도 다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입을 다물 뿐이었다.
“달리 연락을 기다리시는 분이라도 계신가요?”
하녀가 꽤나 공손한 자세로 내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노골적으로 페르포네의 연락을 기다린다고 하면 다른 속내가 있다고 의심을 하겠지.
하지만 연락이 오지 않는 부분은 영 마음에 걸렸다.
다른 이들에겐 연락이 오지 않아도, 적어도 황태자인 페르포네에게서는 연락이 와야 했다.
비단 그와 에이프릴이 약혼으로 묶여 있어서가 아니라, 그에게 있어 가장 친한 친구가 바로 나였고, 내게도 가장 친한 친구가 페르포네였으니까.
게다가 내가 어린 시절에 페르포네를 구해주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이렇게 조용할 수가 없었다.
황태자에게서 연락이 늦는다는 건 황실의 의견으로 봐야 하나?
“아니, 됐다. 깃펜과 종이 좀 준비해 줘.”
“알겠습니다, 아가씨.”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고 연락도 없다면 내가 직접 알아보는 수밖에.
에이프릴이 페르포네를 처음으로 마주하고 돌아왔던 날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하얗던 두 볼이 잘 익은 복숭아처럼 분홍빛으로 물들고, 달콤한 꿈이라도 꿨던 것처럼 몽롱했던 눈동자까지.
첫눈에 반한 소녀라는 모습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너랑 전하는 그럼 친구인 거야?”
“으응.”
물었던 말에 대한 답을 듣고 아주 기쁘다는 듯이 환하게 웃던 얼굴까지.
하긴, 에이프릴이 페르포네를 보고 반하지 않는 것도 이상하지. 페르포네는 실제로 동화 속에 나오는 왕자님의 표본 같았으니까.
황금을 그대로 녹인 듯한 금색의 머리카락도, 벌꿀처럼 다디단 금빛 눈동자나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모두에게 다정한 모습까지.
제정신이 아닌 황제와 정부의 존재를 차치하더라도, 황실의 유일무이한 적통 계승자라는 점도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모든 귀족가의 영애들에게 이상향 같은 존재였으니까.
내가 이 집에서 쫓겨난 지 1년 만에 페르포네와 약혼을 진행한 걸 보면 그 애의 마음도 영 급했던 듯했다.
로비에 걸려 있는 작고한 공작부인의 초상화를 바라보며 비죽 웃고 몸을 돌렸다.
페르포네에게서 보낼 서신의 서두를 어떻게 해야 날 만나주려나.
편지의 서두를 생각하면서 내 방을 향해 몸을 돌린 그 찰나, 공작가 안으로 들어오기 직전 문의 바닥에서 환한 빛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가씨.”
환한 빛이 들어오자마자 멀리서 다급히 뛰어온 패트릭이 내 어깨를 감싸 쥐며 말했다.
“방으로 들어가시죠.”
“왜?”
“일단 방으로 들어가시면 제가 따로…….”
나를 어르고 달래면서 마주치지 않게 노력할 상대는 이 집에서 하나뿐이었다.
바로 공작가의 미친 망둥이.
“집사장이 이렇게 반응하는 걸 보면 바라크 오라버니가 오신 모양이네.”
“아가씨.”
바닥에서 올라오는 환한 노을빛은 나한테도 익숙했다.
하긴, 공작이 있다고는 하지만 리안도 없는 이 상황에서 바라크가 온다면 난리가 일어날 게 분명했다.
집안 시끄러울 일을 최대한 뒤로 미뤄보겠다는 모습에 내가 가볍게 대답했다.
“어차피 한 번은 겪고 넘어가야 할 일이야.”
“바라크 도련님이 흥분하셔서 아가씨께 실수라도 하실까 걱정됩니다.”
내가 다칠까 봐 걱정된다는 말이었지만, 과거처럼 날 걱정하고 생각해서 하는 말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과거와는 달라졌기 때문이다.
안절부절못하는 패트릭을 뒤로하고 있을 때, 노을빛이 점점 사그러들기 시작하자 보이는 건 빛처럼 반짝이는 머리카락이었다.
“집사, 아버지는…….”
바라크가 입고 있던 로브를 하녀에게 쥐여준 뒤 음울한 목소리로 말하려고 했다.
“뭐야.”
나와 눈이 마주치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그러잖아도 날카로운 느낌을 주던 눈빛이 날 발견하자마자 사납게 구겨졌다.
예전엔 날 향하던 저 얼굴이 무섭게 다가올 때가 있었다.
저 표정을 어떻게든 풀어보고자 노력했던 순간도 있었고.
그리고 저 표정을 만들지 않으려면 내가 그의 시야에 없어야 한다는 것도 잘 알았기에 늘 내 방으로 도망치고는 했었다.
“저게 왜 여기에 있어?”
“도련님.”
살벌한 바라크의 목소리에 패트릭이 그를 진정시키려고 다가갔다.
이 집에서, 내가 오라버니라는 호칭으로 그를 다시 부르게 될 줄이야.
“오랜만이에요, 오라버니.”
일그러진 그의 얼굴과 대조될 정도로 환히 웃는 모습으로 그를 맞이했다.
표정을 구길 대로 구긴 미청년의 얼굴을 명화 감상하듯이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와는 대화조차도 할 생각이 없는지 날 바라보고 있던 바라크가 주위를 둘러봤다.
“집사, 저게 왜 여기에 있냐고 물었다.”
바라크의 성질머리를 다 아는 집안 사용인들은 숨만 죽인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누가 나서서 말을 한다면, 바라크의 성질머리를 그대로 다 받게 될지도 모를 판인데 일개 사용인들이 나서서 말해줄 리가 없었다.
다들 자리에 있는 패트릭이 어떻게든 해결해 주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저게.”
짓씹듯이 한마디를 내뱉는 바라크가 주먹을 꽉 쥐었다가 폈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위협적인 모습이었다.
늑대 수인인 알리샤도 저 정도로 참을성이 없지는 않은데.
“도련님, 우선 진정하시…….”
패트릭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자 바라크의 눈매가 매섭게 치켜올라 갔다.
제 할아버지뻘도 더 되는 패트릭을 잡아먹을 것처럼 굴고 있는 그에 속으로 혀를 짧게 찼다.
고작 내가 온 것 때문에 패트릭한테까지 앞뒤 안 가리고 살벌한 모습을 보일 줄이야.
누구든 한 명 피를 봐야 그만둘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 결국 내가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공작님께서 부르셔서 왔습니다.”
“뭐?”
“제가 왜 여기에 있는지 궁금해하시는 것 같아서요.”
“아버지께서 너를 불렀다고?”
“예.”
허, 바라크의 입에서 헛웃음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