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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역공녀에게 후회는 필요 없습니다 (5)화 (5/109)

5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3년이나 지난 지금 널 부를 이유가 뭐가 있어서!”

“믿기지 않으시거든 직접 공작님께 직접 여쭤보시죠.”

“…….”

“아니면 집사님에게 여쭤보셔도 상관없고요.”

바라크도 알긴 알 것이다. 내가 공작가에 당당히 서 있는 이유는 알렉시스 공작이 나를 불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는 걸.

“참고로 저를 데리고 온 사람은 리안 오라버니세요.”

숨을 고르면서 평온을 유지하려고 하던 그의 몸이 일순 멈추었다.

시선을 돌리고 있던 바라크의 노을색 눈동자가 삐거덕거리며 내게로 향했다.

“형이, 너를 데려왔다고?”

“예.”

한마디로 공작과 리안만 알고 바라크는 모르는 일이었다.

하물며 집사인 패트릭까지 알고 있는 사실인데, 바라크 하나만 바보 된 꼴이었고.

그 말에 흙 묻은 신발로 내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온 바라크가 손을 뻗으려고 하던 그 순간이었다.

“도련님!”

패트릭이 다시 한번 그의 앞을 막아서려고 했지만, 눈이 반쯤 돌아간 공작가의 미친 망둥이가 그를 밀치고는 내 멱살을 콱 잡았다.

“너 같은 찌꺼기를 아버지가 다시 불러들였다는 게 말이 돼?”

“그러게요. 저 같은 찌꺼기가 필요하다면서 부르시더라고요.”

손목이 날아갈 뻔한 적도 있었는데, 멱살 잡힌 게 무어라고.

“도련님, 이거 놓으시고.”

살벌한 분위기가 지속되고 있을 때, 그의 팔목을 잡아 밀어낸 건 카나였다.

“말씀 조심하세요.”

“비켜.”

“공작님께서 아가씨를 공녀님으로 대우하라 하셨습니다.”

“아가씨는 누가 아가씨야! 라이즈 공작가의 공녀는……!”

“에이프릴 힐 라이즈.”

분에 찬 목소리와 달리 내 목소리는 차분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바라크라면 이런 내 상태에 더 열받아 할 게 분명했다.

감정 조절도 못 하고 열 내고 있는 그를 보니 배를 붙잡고 깔깔 웃고 싶은 마음이었다.

“에이프릴 공녀님만이 이 공작가의 유일무이한 아가씨죠.”

“네가 감히 누구 이름을 입에 담아.”

다시 한번 거칠게 행동하려는 바라크를 카나가 나를 숨기며 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불만이 있으시거든 공작님께 직접 말씀하십시오, 도련님.”

이 집안에서 가장 엄하고 융통성 없는 사람을 고르라고 한다면 단연 하녀장인 카나일 것이다.

나쁜 말로 표현하자면 그녀는 융통성이 없이 고루하지만, 그 말의 또 다른 의미는 원칙만을 준수하고 자신보다 강하다는 이유로 무릎 꿇지 않는 강인함과 용맹함도 가졌다는 의미이다.

“하녀장, 네가 모셔야 할 사람은 저 계집이 아닐 텐데.”

“그렇다고 둘째 도련님을 가장 우선시하는 것도 아닙니다.”

“…….”

“안주인 마님께서 안 계신 이 저택에서 가장 따라야 할 사람은 공작님이시니까요.”

“도련님, 진정하시고 우선 공작님부터 먼저 만나고 오시죠.”

상황과 어울리지 않도록 패트릭의 온화한 목소리에 바라크가 입술을 세게 짓씹었다.

노을 같은 눈동자는 한낮의 태양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서재에 계십니다.”

“아버지가 너를 데리고 오라 했다 하더라도, 네가 그렇게 중요한 존재는 아닌 모양이지.”

공작가가 떠나가라 소란이 일어났는데도 얼굴을 내비치지 않는 알렉시스 공작을 염두해 두고 한 말인 듯했다.

딱히 부정할 생각은 없는 말이었던지라 그저 가벼운 미소만을 지었다.

아무런 반박도, 부정도 하지 않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그가 몸을 팩 돌리고는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런 바라크를 보고 나서야 홀에 있던 모두가 숨을 내뱉었다.

일괄적으로 들리는 숨소리에 야트막한 웃음을 터뜨렸다. 사람이 쉽게 변하지는 않지.

“오지 마셨어야 했습니다.”

정말 작은 목소리였지만, 바로 가까이 있는 탓에 못 들을 정도는 또 아니었다.

사용인들이 하나둘씩 떠나고 카나만 내 곁에 남은 상태였다.

바라크를 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엄한 얼굴로, 그리고 눈가를 살풋 찡그리고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게 나 때문인가. 아니면 바라크 때문인가.

“좋은 꼴도 못 볼 거라 말씀드렸었죠.”

“이 정도는 예상했으니까.”

“하…….”

눈을 꾹 감으면서 고개를 숙이는 카나의 모습은 굉장히 답답하다는 얼굴이었다.

“바라크 오라버니가 날 반겨도 이상할 텐데. 안 그래?”

농담처럼 작은 미소와 함께 던진 말이었다. 그리고 긍정을 바라는 질문이기도 했고.

아마 바라크가 그대로 나를 무시했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했다.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기라도 한가? 라고 생각했을 게 분명했고.

“오라버니께서 에이프릴을 귀하게 여기는 걸 모르는 이는 없을 테니까.”

에이프릴을 잃어버리게 된 원인이 바라크 때문이었으니까.

* * *

노크도 없이 쾅! 하고 열리는 문에 알렉시스 공작이 미간을 찌푸렸다.

멀리서 들리던 소란이 이제는 자신의 서재에서 마저 이어질 모양이었다.

화가 잔뜩 난 둘째의 모습에 공작은 바라크의 저 성질머리가 새삼 누구를 닮은 건지 참 궁금해졌다.

몇 년 전 세상을 떠난 제 아내도, 그리고 자신도 바라크 같지는 않았으니까.

“아버지, 저게 왜 이 집에 있어요!”

불과 몇 분 전 봤던 이리나 데빈을 다시 떠올렸다.

마지막 기억보다 야윈 몸, 잿빛이 살짝 도는 베이지색의 긴 머리카락, 어린 시절과는 완전히 다른 청회색의 눈동자까지.

옛날보다 훨씬 더 어른스러워지고 성숙해진 얼굴이었다.

“내가 오라고 했다.”

“아버지!”

하아. 귀 아프게 떠드는 바라크에 공작이 숨을 짧게 들이켰다.

“도대체 쟤를 왜 부르신 건데요. 3년 만에 갑자기 쟤를 부르신 이유가 있을 거 아닙니까!”

그래도 아버지 앞이라 숨을 고르고, 최대한 흥분을 가라앉히면서 말하고 있었지만, 목소리가 커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3년 동안 아무런 내색도 없다가 이렇게 갑자기 이리나 데빈을 불렀다고?

그것도 에이프릴을 계단에서 밀어뜨리고 위협까지 했던 그 애를?

에이프릴이 친딸이 아니기를 바랐던 그 애를?

“그리 흥분할 필요 없다. 어차피 1년만 공작가에서 지내게 될 테니까.”

“어차피 1년만이라뇨. 아버지, 1년만이 아니에요!”

알렉시스 공작이 있는 책상으로 단번에 다가간 바라크는 답답한 얼굴이었다.

1년 만이라니. 1년이나 되는 시간이었다.

앞으로 공작저에서 지내는 1년까지 포함하면, 그 계집애가 공작저에서 지내는 시간이 9년이나 되는 셈이다.

정작 제 동생이자 친딸인 에이프릴은 이 집에서 지낸 지 고작 5년밖에 되지 않는데……!

그러잖아도 본인이 이 집안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늘 불안해하는 애인데, 그 계집애가 여기 있다는 걸 에이프릴이 알게 된다면 무척이나 상처받을 것이다.

“1년이나 되는 시간 동안 그 애가 이 집에 있어야 되는 거라고요.”

바라크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

“저 계집애한테 약점이라도 잡히셨습니까?”

“언사를 삼가거라!”

아들이라고 봐주었더니 언행이 지나치고 건방지기 짝이 없었다.

날카로운 공작의 반응에 주춤하던 바라크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에이프릴은…… 다리 때문에, 아직까지 별장에 있는데.”

산사태로 일어난 사고 때문에 제대로 걷지 못한 지 한 달이 훌쩍 넘은 에이프릴을 떠올린 바라크가 절절한 얼굴을 했다.

그 사고로 인해서 가장 힘들어한 건 당사자인 에이프릴이겠지만, 그다음은 바로 그녀를 옆에서 보살핀 바라크였다.

동생을 잃어버리고 지낸 시간이, 에이프릴이 마땅히 누려야 할 것을 누리지 못했던 시간이 몇 년인데.

이제 막 행복해지려고 한 게 5년 전이었는데, 다시 그 계집애가 이 집에서 지낸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다리 때문이라는 거 알아요. 그래서 그 앨 데리고 온 것도 알겠는데, 저도 다리 고치는 방법 백방으로 알아보고 있으니까……!”

“…….”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아버지.”

바라크가 애원하듯 알렉시스 공작을 바라봤다.

친자식을 바라보는 눈빛이지만 빛 한 줌 없는 청회색의 눈동자에 바라크의 심장이 일순 철렁거렸다.

저 눈빛을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에이프릴이 집으로 돌아오고 싶어 합니다. 아버지도 보고 싶어 하고요.”

“그 애의 몸 상태와는 상관없는 결정이다.”

“아버지.”

이리나가 이 저택에서 벗어났던 3년 전, 알렉시스 힐 라이즈가 했던 눈빛이었다.

상대에 대한 애정도, 세상에 대한 감흥도 없는 그저 냉랭하기만 할 뿐인 청회색의 눈동자에 바라크가 표정을 굳혔다.

“무슨 말씀이세요.”

“방금 말했잖느냐. 몸 상태와는 상관없는 결정이고, 이리나는 이곳에서 1년 동안 생활할 거다.”

“…….”

“에이프릴의 대역으로, 그리고 공녀로.”

“그럼 에이프릴은요? 저 계집애 때문에 1년을 억지로 별장 생활이라도 하란 말씀이십니까?”

한마디, 한마디가 깨진 유리 파편처럼 날카로웠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저 계집애 때문에 이제는 친딸인 에이프릴을 버리시려고요!”

자리에 있던 알렉시스 공작의 무던한 심장을 후벼 파기 딱 좋은 한마디라고, 바라크를 따라왔던 패트릭이 짧게 생각했다.

“바라크 힐 라이즈.”

바라크를 풀네임으로 부르던 알렉시스 공작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허리께까지 오는 은회색의 긴 머리카락과, 날카로운 청회색의 눈동자에 바라크가 숨을 들이켰다.

기사로서는 은퇴했다고 하나, 젊은 시절 전장을 누비던 공작의 기백은 퇴색됨 없이 여전했다.

“네가 내 아들이라서, 네 무례를 용서할 거라 생각하지 마라.”

어떻게 핏줄에게 그렇게까지 차갑게 말할 수 있느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이리나는 이곳에 있을 것이고, 네 마음의 여부와 상관없이 대우받을 것이다.”

알렉시스 공작이 숨을 들이켜다 말고 마른침을 삼켰다.

“공녀로서, 내 딸로서.”

더는 집에 있고 싶지 않다는 듯, 바라크가 아랫입술을 물며 마법을 시전했다.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떴을 때, 방 안에는 바라크의 흔적도 없이 노을빛만이 잘게 남아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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