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역공녀에게 후회는 필요 없습니다 (6)화 (6/109)

6화

“베트리체 경.”

안쪽 문이 살짝 열리면서 들리는 황태자의 비서 목소리에 황태자의 직속 근위대원인 아도니스의 자세가 처음으로 흐트러졌다.

“예.”

“잠깐 안으로 들어오세요.”

피곤에 찌든 레르비앙은 불면증이 다시 도진 얼굴이었다.

이 한 달 동안은 꽤 반질반질했는데. 예민한 편인 레르비앙이 저런 얼굴을 할 정도라면 이유는 한 가지겠지.

황태자의 약혼녀인 에이프릴 공녀가 다시 돌아왔다는 것.

“예.”

명령이니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기는 하지만, 아도니스 베트리체는 황태자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는 걸 꺼려했다.

여자가 집무실을 드나든다는 점 때문에 힐난 섞인 눈빛을 종종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부르셨습니까?”

레르비앙이 자신과 대화하려고 집무실로 들어오라 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아도니스가 바로 맞은편에 앉은 페르포네를 똑바로 바라봤다.

아도니스는 페르포네의 밑에 있으면서 처음으로 ‘생긴 대로 논다’라는 말이 나쁜 말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다정다감한 얼굴대로, 페르포네의 성격 역시 다정다감 그 자체였으니까.

황태자인 페르포네의 밑에서 일한 2년 동안 그가 화내는 모습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일만 하다 보니 심심해져서요.”

눈을 내리깐 채 봉투를 만지작거리고 있던 페르포네가 고개를 들고는 가볍게 미소 지었다.

“숨도 돌릴 겸 대화나 할까 싶어서.”

레르비앙 경이 피곤한 이유는 불면증 때문이 아니라, 혹시 페르포네님 때문인 게 아닐까?

그런 의구심이 들 때 질문이 불쑥 튀어나왔다.

“아도니스 경은 오늘 바라크 경을 봤나요?”

“아뇨, 아직 못 봤습니다.”

“그래요? 수도에서 봤다고 사람들이 떠드는 걸 들었거든요. 유달리 예민해 보인다는 이야기도 들리고.”

“유달리 예민해 보인다고요……?”

어쩐지 이해가 안 된다는 아도니스의 고갯짓에 페르포네가 긍정했다.

“전하, 바라크 힐 라이즈는 늘 그런 성격이었습니다.”

무어라 말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이던 페르포네가 멈칫하다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긴 하네요.”

반박하려고 해도 반박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자신이 어린 시절부터 봐온 것도 있었고, 사람들에게 들은 것도 많았으니까.

“공녀도 돌아왔다고 하는데 왜 출근을 여즉 안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요.”

“…….”

“두 사람은 또 아카데미 동기일 테니 아는 게 있나 싶기도 하고.”

각부의 수재들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만큼 접점은 있을 테니 말이다.

“황실에서 바라크 경 성질머리가 더… 아니, 좀 그렇다는 걸 모르는 이가 없을 텐데, 뭐가 궁금한 건지 모르겠네요.”

그리고 그런 레르비앙의 말에 아도니스는 공감하면서 동시에 다른 생각을 했다.

바라크의 성질이 더럽다는 말로 표현이 될까? 그보다 더한 표현을 쓸 수 있다면 더한 표현을 말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좀 이상하긴 하죠. 공녀께서 돌아왔는데 리안 경은 가라앉은 분위기고, 바라크 경은 아직도 황실로 복귀하지 않고 있으니 말입니다.”

페르포네가 크게 동감한다는 얼굴이었다.

“공녀가 돌아왔다는 사실은, 데미안의 귀에도 들어갔겠죠?”

“아무래도 들어갔다고 봐야겠죠.”

북부 대공가의 정보력은 무시 못 할 것이었고, 또 에이프릴 힐 라이즈가 수도로 온 지는 벌써 이틀째였으니까.

“우리 사촌께서는 어떻게 반응하실지 모르겠네.”

“사촌이라뇨.”

레르비앙이 노골적으로 언짢은 얼굴을 했다.

“사촌이죠.”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금빛 눈을 깜빡이는 페르포네를 보자니 속이 타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그래, 데미안이 형식상으로는 고모와 고모부의 자식이니 사촌이 맞겠지만, 실제로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인데 사촌은 무슨!

대공가의 입양아이기에 귀족들 사이에서 입지가 약한 게 다행이었다.

페르포네가 조금이라도 황제와 비슷한 낌새를 보인다면 귀족들이 하나같이 대공가로 줄을 섰겠지.

황제가 제정신이 박힌 인물이었다면 이런 쓸데없는 걱정 같은 건 하지 않았을 텐데.

한숨이 나오려는 걸 레르비앙이 꾹 눌러 삼켰다.

“그래서 초대하실 겁니까?”

갑작스러운 초대라는 단어에 아도니스의 녹안이 흠칫했다.

그리고 그때서야 페르포네의 손에 있는 서신 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공작가의 인장이 찍힌 서신.

“한 번 초대는 해야지.”

페르포네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해야 할 말도 있으니까.”

해야 할 말?

의아해하는 아도니스와 달리, 페르포네가 무슨 말을 할지 아는 레르비앙이 멈칫하고는 그녀에게 나가라는 눈짓을 보냈다.

아도니스가 조용히 집무실을 나서자, 레르비앙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받아들이겠습니까?”

“어쩌겠어요.”

아도니스를 다정히 바라봤던 시선이 다시금 서신으로 향하고 있었다.

“본인이 받아들이기 싫다 해도 받아들여야죠.”

다정한 목소리와 달리 내뱉는 한마디는 차갑게 끊어내는 말이었다.

부드럽지만 단호한 한마디에 레르비앙이 걱정 가득한 숨을 내뱉었다.

그 한숨에 펜을 멈추지 않은 채 페르포네가 짧게 웃었다.

“걱정이 되는 눈치네요.”

“아무래도요. 공녀께서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할 테니까요.”

“…….”

“아시잖습니까. 공작가에서 공녀를 얼마나 싸고도는지를요.”

대책 없는 과보호라며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게 일상다반사였다.

제 자식 안 귀여운 부모가 어디 있겠냐마는 공작가는 유달리 심했다. 특히 공작부인이 죽기 직전에는 공녀를 아주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대하기도 했었으니까.

몇몇 나이 지긋한 귀족들은 공작 부부가 하는 행동이 자식을 망치는 지름길이라고 수군거리고는 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공녀와의 결혼에 뜻이 없는 것을요.”

제 결혼이지만 별 관심이 없다는 듯 시큰둥한 페르포네의 모습에 레르비앙이 입맛을 쩝 다셨다.

공작가의 공녀가 불편한 것과 별개로 아쉬운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공작가만큼 페르포네에게 힘이 될 존재도 또 없을 테니까.

황태자를 사위로 들인다면 페르포네가 황위를 승계받을 수 있도록 공작가에서 크게 도움을 줄 것이다.

로지안이 제아무리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는 정부라고 해도 공작가가 나서서 밀어준다면 어찌할 방도를 못 찾겠지.

이제는 페르포네를 설득하는 것도 포기한 레르비앙이 울상을 지었다.

황실 사람들은 페르포네 디니아 다우스가 마냥 말랑하고 부드러운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는 부드러움보다는 강인함과 단단함이 더 잘 어울리는 이였다.

멀쩡한 놈이라고는 없는 황가에서 유일하게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이가 그였으니까.

“과거에는 공녀와 잘 지내지 않으셨습니까.”

“과거에는 그랬었죠.”

“그런데 지금은 왜 이렇게 거리를 두려고 하십니까?”

그 물음에 페르포네의 손이 우뚝 멈추었다.

아도니스나 레르비앙을 향할 때는 늘 부드러운 미소가 남아 있었는데, 지금은 그 흔적도 찾을 수가 없었다.

지금은 왜 이렇게 거리를 두려고 하느냐라…….

말을 한다면 믿기라도 할까. 공녀가 보낸 초대장을 곁눈질했다.

“그런 것까지 궁금한가요, 레르비앙 경?”

“예?”

“레르비앙 경이 나한테 이렇게까지 궁금한 게 많을 줄은 몰랐네요.”

능글능글한 미소를 가득 담아 묻는 페르포네에 레르비앙이 질린 듯이 고개를 저었다.

말하기 곤란할 때면 페르포네가 이렇게 반응한다는 걸 잘 알았다.

그리고 이건 미친 인간밖에 없는 황가에서 페르포네가 살아남는 방법이기도 했다.

“별로 안 궁금합니다.”

“그래요, 나도 경이 별로 안 궁금해하면 좋겠습니다.”

딱 잘라 대답하는 황태자에 그가 속으로 입술을 비죽였다.

그래도 몇 년 동안이나 오른팔로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신하로서 생활했는데 제게 마음 한 번 주지 않는 페르포네가 조금은 야속했다.

“레르비앙 경이 일이 없다면 대신해서 초대장 작성할래요?”

“공작가로 보낼 초대장 말입니까?”

“예, 이틀 후 티타임이 어떠냐고요.”

“……알겠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인 뒤 그가 조용히 집무실을 나섰다.

탁, 하고 문이 굳게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그는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일에서 시선을 떨어뜨렸다.

편히 의자에 기댄 채 천장에 달려 있는 앤틱한 샹들리에를 보다 눈을 느리게 감았다.

“그런데 지금은 왜 이렇게 거리를 두려고 하십니까?”

그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내가 알던 에피가 아닌 거 같으니까.”

에이프릴 힐 라이즈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공기가 자신이 알고 지내던 에이프릴 같지가 않으니까.

“꼭 다른 사람 같으니까.”

자조적인 웃음과 함께 의자에 기댔던 등을 떼어내고 공작가의 초대장을 다시 확인했다.

―친애하는 약혼자, 페르포네 님에게.

제국의 태양과 함께하길 바란다는 인사말로 시작하는 서신의 구구절절한 내용을 한 줄로 축약하자면, 공작가로 자신이 돌아왔는데 왜 연락이 없냐는 거였다.

다른 사람 같다는 말은 단순하지만, 황실에서는 꺼낼 수 없는 말이었다.

몇 년 동안이나 제 곁을 지켰던 심복, 레르비앙에게도.

“미친놈 보듯 볼 게 뻔하지.”

피곤한 기색을 감추기 위해 페르포네가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런 말을 내뱉었다간, 황실에 정상인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미친놈들뿐이라고 떠들어댈 테니까.

‘보고 자란 게 황제이니 황태자도 제정신일 리 없지.’

‘여태까지 제정신을 유지한 것도 대단한 일입니다.’

그렇게 신나게 떠들어댈 귀족들과, 미친 게 분명하다는 제 소문에 만족스럽게 웃어댈 아버지의 정부를 떠올리자 창자가 비틀리는 느낌이었다.

페르포네의 입술 끝이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그러니 말할 수 있을 리가.”

페르포네는 황실의 그 누구도 믿지 않았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