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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역공녀에게 후회는 필요 없습니다 (7)화 (7/109)

7화

이른 새벽이니만큼 사용인들과 공작가의 기사들 대다수가 수면을 취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그리고 공작저 내에서도 날 향한 관심이 조금 덜한 시간이기도 했고.

“이 개구멍은 아직까지 있네.”

3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이 존재하는 공작가의 개구멍으로 빠져나가면서 짧게 중얼거렸다.

하긴, 개구멍이 왜 개구멍이겠나.

들키지 않으려고 만들었으니 개구멍이지. 공작가에서 3년 동안 이걸 못 찾았다는 점이 우습긴 했지만.

에이프릴을 찾고 난 뒤로, 공작가에서 지내는 게 숨막힐 때면 한 번씩 이 개구멍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가고는 했었다.

어떨 때는 신전에 가기도 했고, 또 어떨 때는 말을 빌려 근교로 멀리 나가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의 공작가는 에이프릴이 있는 것도 아닌데 숨이 막혔다.

에이프릴에 대해서 알려주는 것 하나 없이 그저 ‘얌전히’만 있기를 바라는 게 영 거슬리기도 했고.

본가에서 나올 때 챙겼던 아티팩을 목에 걸고는 수도에서 말을 빌려주는 곳으로 향했다.

“이상하긴 하네.”

공작가 전체가 이상하지만, 그중 가장 이상한 바라크 힐 라이즈였다.

공작과 언쟁했을 게 분명했고, 언쟁이 끝나면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나한테 와서 온갖 행패를 부릴 줄 알았는데.

“의외란 말이지.”

그날 바로 저택을 빠져나가서는 그 뒤로 돌아오지도 않은 상태였다.

늦은 시각이지만, 시가지에 아직 불이 꺼지지 않은 상점이 몇 있었고, 가판대도 몇몇 개 눈에 들어왔다.

개중 내 눈을 사로잡는 게 하나 있다면.

―라이즈 공녀의 불운한 마차 사고.

신문사 로고 밑에 있는 1면의 화려한 타이틀이었다.

내가 뚫어져라 보고 있자 가판대 주인이 돌돌 만 신문으로 툭툭 가판대를 쳤다.

“5센트야. 돈 내고 읽어.”

나는 5센트를 지불하고 신문을 들고 눈으로 빠르게 읽어 내렸다.

공녀가 한 달 전 별장으로 가는 길에 마차 사고를 겪었고 치료를 위해 별장에서 요양하는 중인데, 약혼자인 페르포네는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다는 단조로운 기사였다.

“그럼 별장에 있다는 게.”

치료 때문이었어?

웃음이 나올 기사가 아닌데도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래, 3년이란 시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자신을 부른 데는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그들이 지난날을 후회해서 나를 부른 거라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날 일주일 동안 설득하려고 했던 이유가 뭔가 했더니 이런 거였네.

동시에 공작가의 인간들이 변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에이프릴이 페르포네 황태자를 크게 마음에 두고 있다는 건 나도, 수도 사람들도 잘 알고 있으니만큼 공작가에서도 애가 탔을 것이다.

나한테 1년간 대역을 부탁한다는 건 에이프릴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다쳤다는 소리겠지.

성력을 이용하면 금방 나을 수도 있겠지만, 또 그만큼 뒷소문이 날 게 분명할 테니까.

“황태자 전하께서 파혼 요구를 할지도 모르겠네.”

“뭐?”

가판대 주인은 내 말에 놀란 듯 날 쳐다봤다.

“아뇨, 잘 봤습니다. 신문.”

신문을 가판대에 대충 내려놓고는 마차 대여소 쪽으로 성큼 걸어갔다.

황제의 정부인 로지안은 공작가의 영애를 황태자비로 들이고 싶어 하지 않았다.

로지안이 후계를 볼 수 없기에 황제가 죽고 난 뒤에도 본인의 권력을 유지하려면 제 입김이 닿는 귀족가의 영애를 황태자비로 들여야만 했다.

그리고 공작가는 제국에서 대공가를 비롯해 자신의 입김이 닿지 않는 곳이었다.

그래서 크게 다쳤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로지안 쪽에서 트집 잡아 파혼을 요구하겠지.

다만 의아한 건, 약혼녀가 다쳤다는데 서신 한 장 보내지 않는 건 페르포네답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마차 대여소에 도착하자 마부에게 돈을 건네주었다.

“대릴 마을로 가주세요.”

꺼낸 금화에 마부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닫혀 있는 마차 문을 활짝 열었다.

“타십쇼. 다른 마부들보다 더 빨리 도착하게끔 도와드리겠습니다.”

기분이 좋아서 싱글벙글 웃는 마부를 뒤로한 채 마차에 올라탔다.

* * *

“하…….”

상처 많은 굵은 손이 앞에 있는 약통으로 향했다.

사람에게 수면욕은 기분 욕구 중 하나인데, 잠만 자면 꾸는 악몽에 앨런이 볼 안쪽을 꽉 씹었다.

이곳에서 지낸 지가 2년이었고, 동시에 엉망진창이던 몸이 원래대로 돌아온 지가 2년이었다.

그저 괴롭기만 한 악몽에 수면제를 한껏 들이켜면 아무런 꿈도 꾸지 않고 잘 수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눈을 감는 순간 기억은 늘 3년 전을 떠올렸으니까.

운 좋게 신전에서 도망쳐 나왔고, 이리나를 만남으로 신전의 약물 실험으로 인해 만신창이가 됐던 몸을 고쳤지만, 신전에서 겪은 일들에 대한 트라우마는 여전했다.

성력이 모든 걸 고쳐준다는 걸 알지만, 정신적인 건 고쳐줄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게 2년 전이었다.

이제 숙면을 취하는 걸 포기한 앨런이 각성제를 먹기 위해 약통으로 손을 뻗을 때였다.

딸랑, 하는 종소리에 그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빠르게 약제실을 벗어났다.

“나 왔어.”

피곤함과 짜증스러움으로 가득 찼던 앨런의 얼굴이 가게 안으로 들어온 이를 발견하자마자 순식간에 환해졌다.

지옥 같았던 시간 속에서도 결국 살아갈 수 있게끔 만들어준 상대.

자신의 유일한 구원자.

“아가씨!”

노을빛이 살짝 도는 연베이지색의 머리카락이 출렁거리며 길게 내려오고, 이리나의 노을빛 시선이 자신을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2년 전, 신전에서 도망쳐 나왔던 자신을 살려준 은인.

이리나 데빈.

앨런의 시선이 목에 걸려 있는 아티팩 쪽으로 시선이 슬쩍 갔다.

“정말 보고 싶었어요, 이리나 님.”

‘이리나 님.’

나는 어머니의 얼굴을 하면서 제 이름을 들을 때마다 절로 흠칫했다.

약제실 안에서 후다닥 뛰어나와서는 웃고 있는 앨런을 보며 입고 있던 로브를 벗었다.

목에 걸고 있는 아티팩을 만지작거렸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모습으로 변할 수 있도록 해준 아티팩이었다.

외양은 완벽하게 바뀌었지만, 목소리는 그대로인 부분이 아쉬운 점이기는 했다.

“여기엔 왜 이렇게 안 오셨어요? 제가 싫어지셨어요?”

얄궂은 농담을 하는 앨런에 내가 표정을 살짝 구겼다.

나보다 키가 조금 더 큰 앨런이 대형견처럼 ‘헤헤’ 웃는 모습에 고개를 저었다.

쟬 처음 주웠을 때는 저런 모습이 아니었던 거 같았는데.

“실없는 소리 하긴.”

둘만 있을 때는 ‘이리나’라고 부르는 걸 허락했지만, 남들의 이목이 있는 상태에서 그 이름을 꺼내지는 않았다.

그건 친아버지나 알리샤로부터 오랫동안 받아왔던 교육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정확히 따지자면, 공작가로 들어가기 전날 밤에 친아버지인 다니엘이 해주었던 말이 있었다.

“절대로 남들 앞에서 엄마, 아빠 이름을 꺼내면 안 돼, 이리나.”

“네가 공작가로 들어간 이후에는 그분들을 네 친부모라고 생각해야 한다.”

“이리나, 내가 갖고 있는 성력을 네게 주마. 절대로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 이 능력을 쓰지 말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이 능력을 보여서도 안 돼.”

“오로지 너만을 위해 이 능력을 써야 해.”

유약하기만 하던 친아버지가 보여주었던 몇 안 되는 강인한 모습이기도 했다.

아버지와의 마지막 날 밤이었기 때문인 건지, 아니면 도망자 신세라는 고백과 함께 들었던 말들이 충격 그 자체였기 때문인지 시간이 이만큼이나 지났는데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날 멀뚱히 보고 있는 앨런에게 물었다.

“도대체 누가 날 보자고 하는 건데?”

화제를 바꾸기 위한 질문이었는데, 앨런은 어쩐지 서운한 얼굴을 했다.

생긴 건 페르시안 고양이처럼 도도하게 생겨서는 짓는 표정이나 하는 행동은 어째 대형견이었다.

테이블 위에 올려둔 물을 대충 한 모금 마시면서 로브를 벗자, 그가 집사처럼 로브를 받았다.

종종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그는 내 밑에 있는 사람처럼 굴고는 했다.

2년 전 아버지 기일에 주워버린 앨런과의 만남이 이렇게 길게 이어질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만났을 때만 해도 다가가면 이빨을 드러내는 승냥이 같았던 게 지금은 이렇게 대형견으로 바뀔 줄이야.

“은혜를 갚게 해주세요. 일하시는 데 제가 도움이 될 거예요.”

아버지는 성력을 타인을 위해서 쓰지 말라고 했지만, 결국 쓸 수밖에 없었다.

여자 둘이서 생계를 이어가는 건 무척이나 힘들었기 때문이다.

수인에 대한 차별이 남아 있다 보니, 수인인 알리샤를 고용하려고 하는 곳은 많이 없었던 데다, 폐인 생활을 하던 내가 돈을 벌었던 것도 아니었다.

공작가에서 쫓겨난 뒤로 집 안에서만 생활하던 1년 동안에도 아버지의 약값으로 인해 생긴 빚의 이자는 눈더미처럼 불어나고 있었다.

그걸 겨우겨우 막고 있던 것도 알리샤였다.

그리고 아버지가 날 위해서만 사용하라고 했던 성력은 빚을 갚고,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좋은 수단이었다.

“우리 석 달 만에 만났는데 어떻게 본론부터 꺼내세요?”

붕어처럼 입술이 툭 튀어나온 앨런이 짧게 구시렁거렸다.

그럼 무슨 말을 해야 하는데? 애초에 일 때문에 온 건데.

알 도리 없는 얼굴을 하고 있자 앨런이 제법 실망한 기색이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뭐 잘 지냈냐, 어떻게 지냈냐, 보고 싶었다, 요즘 만나는 사람은 있냐 정도는 물어보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 건 나중에 해도 되는 이야기잖아.”

그게 뭐 당장 중요하다고.

게다가 쓸데없는 사담을 주고받다 보면 관심과 호감이 생기는 거니까.

앨런과 함께 지낸 지 곧 있으면 3년 정도 되는 시간이지만 아직까지 서로에 대해서 모르는 게 많았다.

“편지로 말했던 나를 찾는다는 놈이 누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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