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성력과 치유력을 신전이 독점하다 보니 내가 직접적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날 수는 없기에 대신 세워둔 것이 앨런이었다.
누군가가 치료로 인해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면, 앨런이 내게 서신을 보내는 형식이었으니까.
그리고 한 달 전부터 날 만나고 싶다고 재촉해 대는 인간이 있다는 말 때문에 오랜만에 온 곳이 이 가게였다.
“누군지는 잘 모르겠어요. 이리나 님 앞에서만 자기 정체를 밝히겠다고 했거든요.”
“흠…….”
내가 눈을 느리게 끔뻑였다. 공작가에서 한 푼도 받지 못하고 쫓겨났지만, 빚을 빨리 갚고 먹고살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입간판도 없는 가게에서의 일 덕분이었다.
‘치료’라는 일을 신전이 독점하고 있고, 성력을 가진 이가 극히 드문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바로 누군가를 치료해 주고 돈을 받는 일이었으니까.
내 아버지가 종종 알리샤와 어머니를, 그리고 나를 성력으로 치료했던 것처럼 말이다.
제국에서 라이즈 공작가를 모르는 이는 없었을뿐더러, 혹여라도 수도에 내려갈 일이 생겼을 때 공작가와 관련 있는 사람과 마주치게 된다면 그건 그거대로 큰일이었으니까. 이렇게 얼굴까지 바꾼 상태로 돈을 벌었던 거고.
알음알음 입소문이 나기 시작한 뒤로부터는 날 대신해 앨런이 치료하고는 했다.
앨런이 약초학에 대해 관심이 있고, 재능이 있다는 건 의외였지만.
내가 겉으로 모습을 드러낼 때는, 내가 갖고 있는 성력이 필요할 때뿐이었다.
앨런의 능력으로도 누군가를 치료할 수 없을 때 말이다.
보통 성력을 가졌다고 한다면 대가를 아무리 크게 치른다고 해도 치료하고 싶어 하는 이가 대다수였으니까.
대개 누군가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병을 가진 귀족이, 혹은 작위는 없지만 돈은 많은 거상들이 나를 찾고는 했다.
“그런데 제법 젊은 남자였습니다. 이십대 중반 남자가 성력을 찾을 만한 일이 있나?”
앨런이 외양을 설명했다.
“머리카락 색은 못 봤지만 노을색 눈동자에 좀 거칠고 투박한 목소리였어요. 말하는 걸 봐서는 성격도 제법 더러운 것 같았고요.”
어째 들을수록 바라크 힐 라이즈가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노을색 눈동자에 거친 말투, 그리고 더러운 성질머리. 딱 바라크이지 않나.
그렇지만 앨런이 바라크를 모르긴 어렵겠지.
제국의 유일무이한 공작가인데 모른다는 게 말이 안 되지.
“이십대 중반에 성력을 찾을 만한 사람이 있나?”
의자에 털썩 앉으면서 다리를 꼬았다.
대다수 성력이 필요하다고 찾아온 이들은 나이가 제법 있는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앨런이 어깨를 으쓱인 찰나, 문이 거칠게 쾅! 하고 열렸다.
사람이 다니지 않는 깊숙한 골목에 위치한 곳이기도 했지만, 새벽이라 그런지 더 요란스럽게 들렸다.
“고블린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쯧, 혀를 차면서 중얼거리는 손님에 피식 웃고는 고개를 느리게 돌렸다.
“저 사람이에요. 한 달 동안 찾……. 대표님?”
나를 대표님이라고 조심스럽게 부르는 앨런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가게 안에 윙윙 맴돌았다.
왜 저 자식이 여기에 있지……?
가게 안으로 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나도 아주 잘 아는 인물이었다.
거칠고 예민해 보이는 인상의 남자가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있었지만 그래도 퍽 준수한 남자.
“오늘 온다고 했지, 그 대표란 작자.”
바라크 힐 라이즈였다.
허.
“기본적인 매너는 지켜주시죠, 손님.”
성질머리가 바라크 같다고 생각했는데, 정말로 바라크일 줄이야.
그렇게 공작저에서 떠나더니 여기서 다시 볼 줄이야. 여전히 신경질적인 목소리였다.
“너 따위랑 말 섞자고 온 거 아니다. 그래서 대표는? 오늘 밤이면 만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이곳에 오기 전 신문을 읽었던 터라, 바라크가 여기까지 온 이유를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에이프릴 때문이군.
바라크 힐 라이즈의 인생은 에이프릴로 인해 돌아가는 걸 다시 한번 알 수 있었다.
고위 귀족이지만, 신전이 아닌 다른 곳에서 치료를 받는다는 사실이 드러난다면 신전의 눈 밖에 나게 된다.
두 번 다시 성력으로 치료받을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앨런에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에이프릴 하나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하는 바라크 힐 라이즈가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나를 보호하고 지켜줄 것처럼 가로막고 서 있는 앨런의 몸을 옆으로 밀었다.
“아가씨.”
내가 대표님이란 단어도, 다른 이들 앞에서 이름으로 부르는 호칭도 싫어하기에 선택한 호칭이 아가씨인 듯했다.
내 상태를 걱정하기라도 하듯 조심히 부르는 앨런에게 괜찮다는 의미로 가볍게 손짓했다.
전과 다를 바 없이 오만불손한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는 바라크를 향해 아무렇지 않은 척 자연스럽게 웃으며 다가갔다.
“공작가의 차남께서 이런 가게까지 어쩐 일로 오셨나요?”
“한 번도 본 적 없으면서 나를 잘도 알고 있군.”
“제국에서 라이즈 공작가 사람들에 대해서는 세 살배기 아이들도 다 알지 않습니까.”
아카데미에 검술로 수석 입학, 졸업을 하고 최연소 기사단장이 된 리안 힐 라이즈.
연금술과 마법에 큰 재능이 있어 황실 연금술부의 부부장이 된 바라크 힐 라이즈.
그리고…… 공작 부부가 여덟 살 때 잃어버리고 극적으로 찾은 딸, 에이프릴 힐 라이즈.
“제국민이라면 아무리 촌뜨기여도 다 아는 분들이죠.”
그리고 지난 시간 에이프릴 힐 라이즈로 살아온 나까지.
공작가의 차남이라는 걸 바로 알아챈 나를 이상하게 여길 이유는 없었다.
내가 한 말처럼 제국 전역에서 공작가의 이야기는 거의 한 권의 소설처럼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떠돌아다녔으니까.
앨런에 대한 생각을 거둬들이면서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래서 저를 찾아오신 연유는요?”
바라크는 선 채 나를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었다.
따로 보좌진이나 몸종도 없이 가게까지 찾아올 정도면 어지간히 급한 일이었겠지.
앨런이 아닌, 성력을 갖고 있는 날 찾아올 정도라면 에이프릴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걸 말해주는 것이었고.
한 달 전부터 나를 찾은 거라면 제법 오래 기다린 것이니 어지간히 성질이 났을 것이다.
“찾아오신 이유가 있으실 텐데. 어디가 많이 아프신가요?”
바라크가 친절했던 사람은 에이프릴이 유일했다.
나는 가짜였고, 에이프릴의 대역이었으니만큼 내게는 마음 한 번 주지 않았던 오라비였다.
그런 시간이 길었던 만큼 바라크 힐 라이즈는 아무에게도 다정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걸 위안 삼기까지 했었다.
진짜 공작가의 딸이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네가, 성력이 있다고 들었는데.”
바라크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왔다.
그간 잠을 못 잤기 때문인지, 발간 눈가를 그대로 보인 바라크가 숨을 몰아내쉬며 테이블 위로 꾸러미 하나를 툭 던졌다.
짤그랑 하는 소리가 들리자, 내 눈짓에 앨런이 꾸러미의 끈을 부드럽게 풀어보았다.
촤르르륵, 어두운 밤도 밝힐 것 같은 많은 양의 금화가 안에서 흘러나오자 바로 옆에 있던 앨런이 작게 숨을 들이켰다.
딱 봐도 그동안 성력으로 벌어들인 돈의 배나 되는 돈으로 보였다.
“돈은 얼마든지 지불할 거야.”
“…….”
“네 성력이 진짜고 치료가 성공적이라면 그 두 배를 성공보수로 주지.”
“무슨 부탁을 하시려고 이렇게까지 큰 금액을 주시는지 모르겠네요.”
바라크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내…….”
작게 달싹이는 입술이 꺼낼 말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내, 내 동생을 고쳐줘.”
그렇게 오만불손하던 바라크가 무너졌다.
바라크가 무너지는 모습을 딱 두 번 봤었다.
한 번은 에이프릴 힐 라이즈가 공작가로 돌아왔을 때, 그리고 바로 지금.
그 누구에게도 다정하지 않을 것 같았던 바라크가 실제로는 매우 다정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을 때의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그는 모를 것이다.
그에게 에이프릴은 마치 민들레 홀씨 같은 존재라도 되는 듯했으니까.
바람이 불면 날아갈까, 잘못 쥐면 깨지지 않을까, 혹여나 걷다 넘어지는 건 아닐까, 걱정하는 모양새로 대했다.
“너한텐 내 동생이 남긴 찌꺼기가 딱이야.”
“네가 이 집에 있다 해서 진짜 에이프릴이라도 된 줄 알았나 봐?”
“넌 에이프릴이 아니야.”
원래도 내게 모질었지만, 에이프릴이 돌아옴으로써 더 모질어진 이였다.
그는 날카롭고, 예민하고, 신경질적이면서 동시에 여린 인물이었다. 그 여림이 동생에게만 속했다는 게 문제였다.
이 돈을 받아야 할까, 말아야 할까. 내가 테이블을 툭, 툭, 두드리다 돈 꾸러미를 바라크 쪽으로 내밀었다.
“거절하겠습니다.”
“방금, 성공보수로 두 배를 쳐준다고 했잖아.”
“제 능력 밖의 문제라면 제 목숨까지 위험해질 일이 될지도 모르잖습니까.”
“……뭐?”
“공작가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는 이유로 남몰래 살해당할지 어떻게 압니까.”
“…….”
“살해당하지 않는다고 해도, 신전에서 알게 된다면.”
‘신전’이란 단어에 일순 흠칫한 기색이 나왔다.
여태까지 내게 성력으로 도와달라고 한 자들은 신전을 두려워하는 이들이었다.
이 일이 들키면 신전에 ‘함께’ 죽을 이들이었지만, 라이즈 공작가는 달랐다.
제국법을 어겼지만, 어디 공작가의 차남을 죽이려고 드는 세력이 있겠나.
그저 쉬쉬하고 넘어갈 뿐, 이 일이 들켜 죽게 되는 건 나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