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처음엔 그게 바라크가 보인 반응인 거라 생각했는데, 반응을 보인 건 앨런 쪽이었다.
치료라는 행위가 독점되는 시대는, 신관이 아닌 자가 누군가를 치료한다는 건 용납이 안 되는 시대이기도 했다.
게다가 사내가 아닌 계집이 성력을 갖고 있다면, 신전 측에서 어떻게 나올지도 모를 일이었으니까.
신전 몰래 성력을 써왔던 여태까지와는 다르게 이 말을 꺼내는 이유는 상대가 바라크였기 때문이다.
“그럴 일은 죽어도 없으니까……! 내 동생을 봐달라고 하는 거잖아.”
그건 그렇겠지. 에이프릴의 상태가 신전의 귀에 들어가면 안 되니까.
“내가, 신전이 아닌 이런 후미진 곳까지 와서 부탁한다는 건 신전도 알면 안 되는 걸 그 머리로는 생각 못 해?”
“부탁하는 처지시면서 언사가 지나치시네요, 공자님.”
여태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듣고만 있던 앨런이 끼어들었다.
눈동자가 매섭게 치켜올라 가고,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는 앨런에게 바라크가 입술을 짓씹다가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게 던졌다.
보석이 여럿 박힌 화려한 팔찌에 내가 인상을 찡그렸다. 한눈에 봐도 비싸 보이는 팔찌에 흐음, 하고 심드렁한 소리를 냈다.
내가 원하는 건 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게 뭡니까?”
“구속구.”
돈이 되는 물건이라고만 말을 할 줄 알았는데 예상하지도 못한 말에 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내 다른 품에서 팔찌를 꺼낸 그가 제 손목에 찼다.
눈동자와 같은 노을색 보석이 박혔는데, 팔찌라기보다는 수갑을 변형한 모습 같기도 했다.
“못 믿겠다며. 내가 구속구라도 차고 있으면 믿을 수 있을 거 아니야.”
건네준 팔찌를 가만히 들고만 있는 내게 그가 다가왔다.
“네가 팔찌를 조이면, 내가 끼고 있는 구속구에 마법이 발동될 거다.”
내게 손 한 번 닿지 않던 바라크가 나 대신 내게 팔찌를 채워주면서 날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이 급해져서 거칠어진 숨이 바로 머리 위에서 느껴졌다.
“네가 조일수록 손목이 조일 거다. 마법을 발동시킨 상태로 해서 가장 조이게 만들면 손목 하나를 자를 수 있는 정도니까.”
“…….”
“그러니까, 한 번 봐주기만이라도 해줘, 내 동생을.”
무릎이라도 꿇고 애원하라고 하면 그렇게라도 할 눈치였다.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 슬쩍 나오려는 조소를 눌러 삼켰다.
“제발.”
에이프릴의 상태가 어지간히 심각한 모양이었다.
한 번 봐주면서 성력을 사용하는 대가치고는 지나칠 정도로 과했다.
평소 같았으면 이렇게 하지는 않았겠지만…….
“그 손으로 에이프릴을 밀었다 생각하면 손목을 자른다고 해도 성에 안 차.”
“그간의 시간을 봐서 봐주는 거니, 두 번 다시 내 앞에 나타나지 마. 그땐 정말 가만있지 않을 테니까.”
공작가에서 쫓겨날 때, 마법으로 내 손목을 부러 빗맞혔던 바라크를 떠올렸다.
“나쁘진 않네요.”
“아가씨.”
가만히 이야기만 듣고 있던 앨런이 말리는 듯, 진심이냐는 듯 나를 불렀다.
평상시에는 이렇게까지 한 적이 없었으니 앨런도 이상하다고 생각하겠지.
바라크를 똑바로 바라보며 방긋 웃었다.
“손목 하나 없다고 해서 못 사는 것도 아니니까요.”
“손목 정도는 없어도 사는 데 지장 없겠지.”
마법으로 내 손목을 자르려고 했을 때 바라크가 했던 말이었다.
그 말을 그대로 꺼내는데도 그는 내 정체를 짐작도 못 하는 얼굴이었다.
그래, 시간이 이렇게 지났으니 내게 했던 말과 행동들은 전부 잊었겠지.
그에게 내 존재는 그저 바람에 지나가는 먼지 한 톨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먼지 한 톨, 혹은 공작가의 불순물 정도.
“좋아요, 대가를 받는 걸로 하죠.”
연금술과 마법을 능통하게 사용할 수 있는 바라크이니만큼 손목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번에 재촉하는 쪽은 내가 됐다.
그는 이 행동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 됐네요. 계약서를 작성한 뒤에 동생분을 보러 가도록 하죠. 앨런.”
내 부름에 앨런이 한숨을 내쉬면서 종이 두 장을 들고 왔다.
자리에 앉은 뒤 내가 빠르게 계약서에 사인했다. 계약서의 내용은 단순했다.
오늘 일은 비밀에 부친다, 비밀을 발설할 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당사자가 책임진다.
마음 급한 바라크는 계약서의 내용도 읽지 않은 채로 사인했다.
휘갈겨 쓴 계약서를 내미는 바라크에게 말했다.
“그럼, 에이프릴 아가씨가 계신 곳으로 가볼까요?”
“……그래.”
“그런데 동생분은 여기서 먼 곳에 계신가요? 제가 자리를 오랫동안 비울 수는 없어서요.”
“금방 간다.”
금방? 어떻게? 의아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 그가 실소를 터뜨리며 대답했다.
날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이내 바라크의 발밑으로 오렌지 빛이 넓게 퍼졌다.
“그럼 가보도록 하지.”
당혹감 어린 앨런의 팔을 잡아 내 쪽으로 끌었다.
“같이 가, 앨런.”
앞으로 할 계획에는 앨런의 도움이 어느 정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 * *
“눈 떠.”
바로 옆에서 들리는 냉랭한 목소리에 감았던 눈을 느릿하게 떴다.
서서히 동이 트기 시작하기 때문인지 가게로 갈 때와는 달리 많이 어둡지는 않았다.
동이 완전히 트기 전에 공작가로 돌아가야 하는데. 살짝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따라와.”
바라크가 짧게 고갯짓했다.
마법을 통해 도착한 곳은 내게도 익숙했다. 바로 공작가가 여름휴가를 보낼 때면 사용하는 별장이었으니까.
미니멀한 곳이었는데, 전과는 달리 화려하게 바뀐 모습이었다.
마치 공작가의 홀처럼 말이다. 조각상과 화가들의 그림도 많이 걸려 있지만, 이곳과 썩 잘 어울린다 생각은 들지 않았다.
과하게 꾸며진 별장이었다.
익숙하지만 5년 만에 온 곳이라 마지막 기억과는 많이 달라진 상태였다.
열아홉 살 이전에는 주로 사용하던 별장이었지만, 에이프릴을 찾고 난 이후에는 온 적 없는 곳이었다.
에이프릴을 찾게 된 이후의 여름휴가는 자연스럽게 내가 제외되었다.
“오셨습니까, 도련님.”
별장지기가 바라크를 향해 허리를 꾸벅 숙인 뒤, 옆에 서 있는 나를 눈짓으로 물었다.
“에이프릴은?”
“방에 계십니다.”
“식사는 제대로 했나?”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 하셔서……. 어제 저녁을…….”
한껏 눈치를 보고 있는 별장지기의 말에 바라크의 표정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식사는 꼬박꼬박 챙기라고 말했을 텐데.”
“저희도 그러려고 했지만…….”
별장지기가 억울한 듯 입술을 꾹 깨물다 다시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눈에 선하네. 아무리 식사를 갖다 줬어도 그 성질머리 때문에 들어가지도 못했겠지.
그렇게 굴수록 본인 기운만 빠진다는 걸 왜 모르나 모르겠다. 그렇게 지랄같이 굴어도 자기 앞에서는 아무런 말도 못 하고, 평생 자신을 돌볼 거라 생각하는 자만 때문인가.
보지 못했던 시간 동안 에이프릴은 누구보다 도도한 공작 영애가 되어 있는 듯했다.
“식사 준비는 다시 하도록 해.”
“예, 도련님.”
별장지기가 종종걸음으로 식당 안으로 향하는 게 보였다.
화려하지만 음산한 별장 분위기는 에이프릴의 상태를 드러내고 있는 듯했다.
도대체 얼마나 상태가 안 좋은 거야.
짧게 의문을 가지면서 별장의 2층으로 올라갔다.
과거 나도 사용한 적 있던 방 앞에 선 바라크가 숨을 작게 들이마시고는 손을 들었다.
빳빳하게 굳은 어깨가 그의 긴장 정도를 알려주었다.
“에이프릴, 들어갈게.”
대답이 없었음에도 바라크가 문손잡이를 부드럽게 열었다.
별장 분위기가 음산하다 생각은 했지만, 에이프릴이 쓰고 있는 방 안은 어둠 그 자체였다.
“에이프릴, 식사도 아직이라며?”
“……나가. 보기 싫어.”
“그래도 일어나 봐. 널 고치러 온 사람이 있어.”
“성력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돌팔이 신관들 말하는 거야?”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에이프릴이 한껏 예민한 목소리로 날카롭게 대답했다.
말하는 걸 보니 다친 이후로 제대로 된 치료는 받지 못한 모양이었다.
성력을 갖고 태어나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어서 쉽게 만날 수도 없는 마당에, 그나마 성력을 가진 자들은 수도의 대신전에서 데리고 있었으니까.
“성력을 가진 사람을 데리고 왔어.”
뒤집어쓰고 있던 이불이 움찔거렸다.
“너를 도와주실 분들이야. 오라비를 생각해서라도 얼굴 좀 보여줘. 응?”
다정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어르고 달래는 바라크의 모습이 답지 않아 비웃을 때, 이불이 스르륵 아래로 흘러내렸다.
“진짜야……?”
어둠 속에서 드러난 에이프릴의 모습은 엉망이었다.
흐트러지고 엉킨 머리카락 하며, 하도 울어 눈가는 짓물린 채였다.
입고 있는 옷도 엉망이었는데, 내쫓기 직전 날 향해 비웃던 에이프릴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사람들이 이런 모습을 본다면 그 누구도 에이프릴을 공작가의 여식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
“……여자?”
의아한 듯 날 바라보고 있는 에이프릴에 내가 짧게 묵례했다.
처음으로 마주한 에이프릴의 얼굴에 앨런이 멈칫하고는 고개를 팩 돌려 나를 바라봤다.
아티팩을 착용하지 않은, 원래의 얼굴과 똑같아서 놀란 모양이었다.
놀람과 당혹이 함께 섞인 시선이었지만 모르는 척하며 에이프릴에게 자연스레 인사했다.
“버니스라고 합니다.”
“여자가, 성력을 갖고 있다고?”
“그러게요.”
성력을 가질 수 있는 건 사내뿐이라고 신전에서 지겹도록 떠들어댔으니 놀랍겠지.
“다치신 곳을 좀 볼 수 있을까요?”
내가 성력이 있다는 걸 믿지 못하는지 우물쭈물하고 있는 에이프릴에 바라크가 “에이프릴.” 하고 다시 한번 달래는 목소리를 꺼냈다.
그에 에이프릴이 이불을 슬그머니 젖혔다.
어둠 속에서 잘 보이지 않는 상처에 커튼을 열려던 찰나였다.
“커튼 열지 마!”
날카로운 비명에 공중에 떠 있던 손이 움찔했다.
“그냥, 그냥 이대로 봐.”
지나칠 정도로 히스테릭한 모습에 앨런이 무시한 채 커튼을 열었다.
“열지 말라고 했잖아……!”
날카로운 목소리와 희미하게 들어오는 빛 사이로 눈에 들어오는 건 완전히 망가진 에이프릴의 다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