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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역공녀에게 후회는 필요 없습니다 (13)화 (13/109)

13화

“……예?”

“널 위해서 하는 말이니까 새겨듣고.”

공녀란 호칭을 들었으면 에이프릴이 온갖 패악질을 부릴 게 분명하다.

“잠깐 눈 좀 붙일 테니, 방으로 아무도 들이지 말도록 해.”

얼떨떨한 얼굴의 하녀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공녀님.”

아이의 입에선 여전히 날 향한 호칭은 공녀였다.

* * *

‘오늘따라 왜 저러시지.’

일에 집중하지 못하면서 넋이 나간 리안의 모습에 같은 집무실에 있던 아비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랜만에 업무로 복귀한 만큼 빠르게 일을 처리할 줄 알았는데, 리안의 손에 있는 종이는 20분 전부터 한 장을 넘어가지 않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리안에게 영향력을 줄 사람은 손에 꼽는데…….

수도 전역에 퍼진 소문으로 유추하건대, 지금 단장의 상태가 좋지 않은 건 그의 막냇동생인 공녀 때문인 듯했다.

수도에 ‘에이프릴 공녀가 다시 돌아왔다.’라는 말이 떠돌았으니 당연히 싱글벙글 웃는 낯인 줄 알았더니만 그것도 아니고.

오히려 에이프릴 공녀의 사고 소식을 막 접했을 때 같은, 아니, 그때보다 더 가라앉은 모습이었다.

누군가 본다면 연인에게 이별 선고를 받은 사내의 모습 같기도 했다.

저런 상태의 단장을 건드려 봤자 좋을 거 하나 없다는 걸 알지만, 아비드가 조심스럽게 한마디 내뱉으려는 찰나였다.

똑똑, 바깥에서 들려온 노크 소리는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는데도 문이 열렸다.

“리안 단장.”

무겁게 가라앉은 단장의 집무실 안으로 낭랑한 목소리가 듣기 좋게 퍼졌다.

종이를 보고 있지 않던 리안이 고개를 퍼뜩 들자, 보이는 건 아도니스 베트리체였다.

리안과 마찬가지로 정복이지만, 황태자의 직속 근위대라는 걸 알려주기라도 하듯 금색의 기사복을 입고 있었다.

그녀의 등장에 아비드가 가볍게 경례하고는 집무실의 문을 닫고 나갔다.

“베트리체 경.”

무겁게 한숨을 내쉬던 리안이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났다.

“어쩐 일입니까?”

“우리 둘뿐인데 말씀 편하게 하세요.”

아도니스가 옅은 미소를 지으면서 단장실 테이블 위에 있는 잔에 물을 조르륵 따라 마셨다.

황실 기사단의 최연소 단장인 리안과 여성 최초로 기사단 입단, 그리고 황태자의 직속 근위대원인 아도니스는 아카데미 시절 선후배 사이이기도 했다.

리안에게 아도니스는 둘째 동생의 동기이면서, 동시에 재능 있는 후배였다.

“너도.”

정작 아도니스 본인은 말을 편하게 하고 싶은 의향이 없는지, 어깨를 작게 으쓱였지만 말이다.

“전하께서 날 찾으시기라도 하나?”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뭔가 자신이 예상하고 있던 리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어쩐지 수심이 더 깊어진 듯한 모습에 아도니스의 매끈한 이마에 주름이 졌다.

“공녀께서 돌아오셨다면서요?”

황실에서 파다하게 퍼진 소문이었다.

가장 말단부터 시작해서 황실의 고위 귀족들도 다 들은 마당이니, 황태자인 페르포네의 귀에도 들어간 상태이겠지.

물론 페르포네가 리안, 자신 앞에서는 에이프릴 공녀의 ‘공’ 자도 꺼내지 않았지만 말이다.

“벌써 자네 귀에도 들어갔나?”

“수도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가십지에는 벌써 공녀에 대한 이야기가 실린 모양인데요.”

“사람들이 하나같이 빠르군.”

“그리고 전하의 약혼녀시잖습니까.”

피식, 자조적으로 웃는 리안이 아도니스가 내민 가십지를 받아 들었다.

벌써부터 전하와의 약혼이 어떻게 될지에 대해서 떠드는 가십지를 보니 입안이 바짝바짝 말라왔다.

가십지의 첫 장도 넘기지 못한 그가 책상 위에 툭 던져 놓고는 마른세수를 했다.

황실의 귀족들 중 몇몇 사람이 ‘공녀가 완쾌된 모양이네요, 축하해요, 다행이네요.’ 따위의 인사를 건넸지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지금 공작저에 있는 이가 이리나이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이 몇 달 동안 가십지나 황색신문사에서 떠드는 것처럼 에이프릴과 페르포네 전하와의 약혼이 파기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째, 제가 예상한 모습과는 다르십니다?”

“뭐가 말이냐?”

가십지에서 겨우 시선을 떼어낸 리안이 아도니스의 깨끗한 녹색 눈동자를 바라봤다.

“전 공녀께서 돌아와서 되게 기뻐하고 계실 줄 알았거든요.”

늘 올곧고 정직한 그녀답게 빙빙 돌려 물어보는 것 없이 노골적인 물음이었다.

“내가 기쁜 거 같지는 않나 보군.”

“네.”

솔직하게 대꾸하는 아도니스에 리안이 쓰게 웃었다.

그래, 아도니스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이니만큼 그렇게 느끼는 게 당연했다.

이리나가 에이프릴인 척, 대신해서 공작가로 온 것일 뿐이지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별장에서 요양 생활을 하고 있는 에이프릴의 상태가 좋아진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해서 이리나와 공작가의 사이가 전과 같아진 것도 아니었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일말의 희망이라도 가지고 공작가로 돌아왔으면 이리나에게는 저를 비롯한 아버지가 또다시 그녀에게 상처를 준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깊게 낸 상처에다가 소금을 뿌린 격이나 다를 바 없었다.

“공자님도 역시 라이즈 가문의 사람답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이리나가 공작가에 가지는 적대감은 생각한 것 이상이었다.

3년 전 내쫓길 때의 충격이 그다지도 컸던 걸까. 하긴, 말해 무엇 하겠나.

충격이 컸겠지, 자신들을 가족이라고 받아들였던 만큼이나.

집안에 있던 그 누구도 이리나를 이리나로 부른 적이 없었다.

“에이프릴, 오! 내 새끼. 내 아이.”

이리나에게 지나칠 정도로 집착하던 어머니의 마음이 백팔십도로 변한 게 바로 에이프릴의 등장 때문이었다.

에이프릴이 등장하면서 이리나는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2년을 집에서 지냈었다.

“그럼 이만 가볼게요, 오라버니.”

그렇다면 이리나가 공작저로 다시 돌아온 이유는 무엇일까.

이미 이용당할 걸 알면서도 왔다는 건, 바라는 게 있기 때문이겠지.

자신을 향해 웃던 이리나는, 과거 자신이 알고 있던 얼굴로 웃고 있었다.

마치 과거의 일을 잊은 사람처럼, 또 상처라는 걸 받지 않은 사람처럼 말이다.

그 미소가 자신이 원래부터 알고 있던 그녀의 미소와 똑같아서, 평범하게, 에이프릴로 대할 수가 없었다.

이리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것이지, 정말로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자신이 너무 안일했다고 손가락질받아도 상관없지만, 자신이 봤던 아버지는 정말로……

정말로 이리나를 그리워하던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알렉시스 공작의 걸음이 아직도, 이리나가 에이프릴로 지냈던 시절 가꾸었던 정원에서 멈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낳은 정은 없다 하여도 8년간의 기른 정은 무시하지 못할 테니까.

집 안 곳곳에 묻어 있던 이리나의 흔적은 좀처럼 지워지지가 않았다.

가꿔진 정원이 그랬고, 여름휴가 때마다 가는 별장이 그랬다.

지금은 에이프릴의 색으로 바뀐 곳이지만, 8년의 시간이 정말 길었던 모양인지 아직까지도 공작가에서 그녀의 흔적을 찾을 수가 있었다.

‘그래도…….’

온 이유가 공작저의 돈 때문이라 하더라도 아직 기회는 있는 것이다.

앞으로의 1년간 그녀에게 진정으로 사과하고 위한다면 용서가 되지 않을까.

“돌아오신 걸 보면 완쾌하신 거 아닙니까?”

“……그렇지.”

아도니스의 물음에 리안이 옅게 미소 지었다.

도대체 아버지는 무슨 생각이신 걸까.

1년 뒤에 이리나가 공작가를 떠나고 에이프릴이 다시 돌아올 때를 생각하지 않으시는 걸까.

만에 하나라도 에이프릴이 완쾌하지 못한 상태로 공작가로 돌아오게 된다면? 모두가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전하께서도 에이프릴이 돌아오신 것에 대해 알고 계신 거겠지?”

“예. 아마 그 누구보다 제일 먼저 소식을 들으셨을 겁니다.”

“그런데 기척이 없으신 게 영 의아해서.”

리안의 물음에 자신을 불러 바라크에 대해 물어보았다는 건 함구했다.

사람을 앞에 두고 여즉 세계가 종말할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던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했다.

‘전하에게서 연락이 없어서였군.’

에이프릴 공녀가 황태자 전하와의 국혼을 기대하고 있다는 건 사교계나 황실에서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소꿉친구였던 두 사람 사이에서 어느 순간 사랑이 피어났다는 건 통속소설에서 흔히 볼 법한 이야기였으니까.

황태자 직속 기사단만큼이나 알고 있는 사실은 있지만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황실에서 일을 하면서 가장 조심해야 할 건 입과 눈이었으니까.

눈은 보고도 보지 못한 척해야 했고, 입은 쉽게 떠들어서는 안 되었다.

그리고 리안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굳이 그녀를 통해서 캐물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네요.”

“뭐가?”

마른세수를 하면서 고개를 든 리안이 아도니스를 바라봤다.

아도니스가 고개를 기울이자, 고개를 따라 귀밑까지 오는 붉은 머리카락이 짧게 흔들렸다.

“바라크 힐 라이즈 말입니다.”

“바라크가 왜?”

몰라서 묻냐는 듯 아도니스가 다시 물었다.

“공녀께서 돌아왔는데 바라크 힐 라이즈가 얼굴을 비추지 않고 있잖습니까.”

그 동생 바보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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