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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역공녀에게 후회는 필요 없습니다 (15)화 (15/109)

15화

“……신관은 부르지 않아도 되겠니?”

“필요 없습니다.”

고작 악몽 하나 때문에 신관까지 부르는 건 너무 유별나단 생각뿐이었다.

서 있는 리안을 뒤로한 채 알렉시스 공작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셨어요, 아버지?”

“그래.”

알렉시스 공작이 안으로 들어오고 나서야 리안이 자연스럽게 내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저녁 식사 자리에 바라크는 없었지만, 바라크를 찾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날 공작저로 불러들였다는 사실 때문에 바라크가 공작을 상대로 목소리를 높였다는 건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이 공작저에서 제 편이 되어줄 사람은 없을 테니까, 여전히 에이프릴이 있는 별장에 있겠지.

“다들 식사하자꾸나.”

음식이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할 때, 날 곁눈질하던 공작이 가볍게 말했다.

“너무 말랐으니 살을 좀 찌우는 게 좋겠군.”

“그러잖아도 주방장에게 아가씨용으로 별식을 몇 가지 준비하라 했습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대답하는 집사장에게 공작이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달그락거리는 식기 부딪치는 소리가 유달리 날카롭게 느껴질 때였다.

“저녁 시간이 벌써 시작됐어?”

“도련님?”

예상치 못한 목소리에 자리에 있던 네 쌍의 눈동자가 모두 바라크에게 향했다.

“집사, 내 것도.”

“아, 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바라크가 입고 있던 로브를 벗어 의자에 대충 걸쳐 두고는 리안의 옆자리에 앉았다.

당연히 별장에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왜 공작저로 돌아온 거지?

의아한 기색을 숨기다 말고 그의 손목에 있는 구속구를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식사 자리에 참석할 거면 시간에 맞춰 오거라.”

“예, 아버지.”

공작의 타박에도 바라크는 기분 좋게 웃는 낯이었다.

바라크가 웃는 낯인 이유는 알 수 있었다. 구속구를 차는 대신 동생의 쾌유를 약속 받아냈으니까.

제법 조용하고 평화로운 식사 자리는 내가 원했던 게 아니었다. 침묵을 깬 건 나였다.

“무슨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봐요, 바라크 오라버니.”

바라크를 콕 짚는 말에 모두의 어깨가 흠칫했다.

바라크가 날 싫어한다는 걸 모르는 이가 없었고, 과거만 해도 그의 심기를 거스를까 싶어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냈던 게 나였기 때문이다.

나이프질을 하던 바라크의 손이 멈칫했다. 매섭게 치켜올라 간 눈매가 네가 어디 감히 말을 붙이냐는 투였다.

“이제 가족인데 못 물어볼 건 아닌 것 같아서요.”

“아버지.”

내게서 아예 시선을 돌린 바라크가 식사를 멈추고는 알렉시스 공작을 바라봤다.

“에이프릴의 상태가 많이 좋아졌습니다.”

흥분을 감추지 못한, 제법 거칠고 들뜬 목소리였다.

더 이상 식사 생각이 없는 모양인지 바라크가 포크와 나이프를 놔두는 소리가 쨍하게 귓전을 때렸다.

“뒤틀려진 뼈도 제자리를 잡았고, 걷는 연습만 이어간다면 금방 전처럼 생활할 수 있을 거라고 하더군요.”

공작이 나를 에이프릴로 대할 것이고, 공작가에 있는 모두도 그럴 거라 했지만 바라크는 그럴 생각이 없는 눈치였다.

임시라고 해도 바라크는 날 두 번 다시 ‘에이프릴’이라 부를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그 행동에 기분이 상하는 것도,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어이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바라크의 기분 같은 건 내게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

나를 이곳에 데리고 온 것도, 월마다 10만 루크라는 값을 지불하는 것도 알렉시스 공작이었다.

바라크 따위가 뭐라고.

“잘된 일이군.”

바라크의 말에 알렉시스 공작은 짧은 감상을 내뱉을 뿐이었다.

리안이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는 나와 공작을 번갈아 보았다.

혹여나 내가 바라크의 말에 상처라도 받는 건 아닌가 하고 신경 쓰는 눈치였다.

“상태가 좋지 못하다고 신문으로 봤는데…… 누가 고쳐 준 건가요?”

내가 던진 질문에 바라크의 몸이 굳어졌다.

구속구가 걸린 마당에 솔직하게 말하진 않겠지만, 그가 어떤 식으로 반응할지는 궁금했다.

입가를 톡톡 닦아내고는 바라크를 똑바로 쳐다보며 웃었다.

“수도 신관은 아닌 거 같고…… 다른 신관?”

“넌 몰라도 돼.”

성력을 가진 웬 이상한 여자라는 말은 안 하네.

불안감 때문인지 바라크가 구속구를 차고 있는 팔을 만지작거렸다.

“달리 위험한 짓을 한 건 아니겠지?”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구속구를 걸고서도 저런 말을 한다는 굉장히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아티팩을 걸고 모습을 바꾸고 있었다면 박수를 가볍게 쳐주었을 만큼 말이다.

손목이 잘려 나갈 정도의 위험은 그에게 큰 위험까지는 아닌 모양이었다.

“에이프릴이 완치하는 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겁니다.”

팩, 고개 돌아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날 똑바로 노려보는 그의 얼굴에 내가 입술 끝을 말아 올리며 에이프릴처럼 웃었다.

일그러지는 표정을 보고 있자니 절로 웃음소리가 나올 것 같았다.

“그러니 저 계집애를 이 집에 들이겠다는 말씀은 거둬주세요, 아버지.”

“바라크!”

“이미 끝난 이야기다. 듣지 않은 걸로 하마.”

“아버지!”

긴장감으로 팽배해진 분위기에 아무렇지 않은 건 나 하나뿐인 듯했다.

“바라크, 같은 말 반복하게 하지 말거라.”

바라크의 날 선 시선이 내게 향했다.

공작이 이렇게까지 날 비호하고 있으니 내가 그를 잘 구워삶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정작 나도 그가 나를 이렇게까지 비호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황태자와의 약혼과 국혼 때문에? 그렇다면 바라크의 저 말 때문에라도 흔들렸을 텐데.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건 공작가의 특기 중 하나이니 어쩌면 말로만 이러는 걸 수도 있었다.

“공녀님께서 얼른 돌아오시면 되죠. 그럼 제가 나가게 될 테니까요.”

“너…….”

“진심으로요.”

사실 지금이라도 당장 에이프릴이 쳐들어와서 온갖 행패를 부리며 나를 쫓아내도 상관없었다.

내 계획은 에이프릴이 공작저로 옴으로 인해 완벽해질 테니까.

바라크는 지금 당장이라도 에이프릴을 공작저로 데려오고 싶겠지만, 차마 그러지 못하는 건 나 때문에 에이프릴이 예민해질까 봐서겠지.

분풀이하고, 욕하고, 사람을 긁어대는 게 바라크, 본인만의 특권이라 생각했다면 이번 기회로 자근자근 밟아줄 것이다.

저녁 식사 자리가 팽팽하게 당겨진 줄처럼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을 때였다.

“식사 도중에 죄송합니다.”

큼, 헛기침과 함께 등장한 카나에 한껏 당겨지고 있던 고무줄이 잘리기라도 한 것처럼 날카로움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 집에서 오랫동안 일한 카나답게 방금까지 분위기가 살벌했다는 걸 단번에 눈치챈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지?”

“황성에서 초대장이 도착했습니다.”

“황성에서?”

황가의 낙인이 찍힌 초대장 봉투가 보였다. 그리고 그 초대장이 향한 곳은 공작이 아니라 내 쪽이었다.

“아가씨께 온 편지입니다.”

“황실에서 왜 쟤한테 편지를 보내.”

“그것까진 저도…….”

카나가 건넨 초대장의 봉투를 열고 그 내용을 확인했다.

“제가 먼저 편지를 보냈으니, 답장이 온 거겠죠?”

“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바라크가 팔을 뻗어 내 초대장을 빼앗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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