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순식간에 내 손에서 사라진 초대장에 인상을 살짝 쓰다, 빼앗아간 바라크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초대장을 읽고 있는 바라크의 얼굴이 점점 더 살벌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저걸 보니 초대장을 안 읽어봐도 뻔하겠군.
“황실로 방문하라는 내용인가 보네요.”
“네가 뭣 때문에 황실로 들어가!”
“공녀니까요. 지금 에이프릴 아가씨 대역으로 여기에 있는 거고, 아가씨는 전하의…….”
“그 의미가 아니잖아!”
초대장을 찢으면서 내 앞으로 던지는 바라크에 숨을 짧게 들이켰다.
“네가 뭣 때문에 황태자에게 먼저 서신을 보냈냐, 이거야!”
바라크의 노을색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불안함의 기저가 어디서 오는 것인지 알고 있었다.
에이프릴의 자리를 찾는다는 이유로 내 설 곳을 앗아갔듯이, 이번에는 내가 그녀의 자리를 앗아갈까 두려워하는 눈치였다.
공작가 속에서 공녀의 자리는 앗아가지 못한다고 해도, 황태자인 페르포네는 또 다르니까.
에이프릴이 페르포네를 좋아하는 건 공작가 내에서도 유명한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황실로 가지 말까요?”
찢어져서 내 접시 위로 떨어진 종이를 포크로 대충 툭, 쳐내며 대꾸했다.
“오라버니께서 제가 황실로 가지 않기를 바라신다면 가지 않을게요.”
공작가야 에이프릴의 안위나 바람을 무조건적으로 우선시할 것이다.
그리고 나와 에이프릴를 두고 고른다고 한다면 당연히 피가 섞인 에이프릴을 도와주겠다.
하지만 페르포네는 아니었다.
“그럼 됐죠?”
페르포네는 에이프릴을 선택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페르포네와 유대감을 쌓은 것도, 그의 목숨을 한 번 구한 것도 진짜 에이프릴 아닌,
“어쩔까요?”
대역인 나였으니까.
바라크가 어떤 선택을 할지는 눈에 빤히 보이기도 했다.
“말이라고 해?”
“…….”
“갈 생각 추호도 하지 마.”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던져지는 말에 방긋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말을 해야지.
일평생 사람들 눈치라고 보지 않고 살아왔던 바라크가 제국민들이, 그리고 귀족들이 어떤 생각을 하면서 수군거릴지에 대해 알 리가 없었다.
바라크 힐 라이즈는 남의 시선 같은 건 아랑곳하지 않고 늘 자기 잘난 맛으로 살았던 인물이었으니까.
“그래요. 그럼 그렇게 하죠. 전 상관없으니까요.”
그리고 내가 가지 않음으로 인해 벌어질 일들에 대한 수습은 바라크가 해야 할 것이다.
사교계에서 떠돌 소문들마저.
그는 동생을 위해 무엇이든 해주고 싶어 하는 존재였지만, 정작 에이프릴이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 같았다.
타인을 위하고 생각한 적 없는 인간이니 어쩌면 당연하겠지.
“그럴 필요 없다.”
예상치 못하게 대화에 간섭한 공작에 바라크의 어깨가 흔들렸다.
들리지 않는 것처럼 아무 말 하지 않고 묵묵히 식사만 하고 있더니, 안 들리는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대화에 간섭하는 걸 보아 모르는 척할 것도 아닌 듯했다.
“그럴 필요 없다뇨?”
조심스러운 리안의 되물음에 공작이 입가를 톡톡 닦아내며 대답했다.
“말 그대로다. 네가 바라크 뜻대로 움직여 줄 이유가 없다는 의미다.”
“아버지, 왜 자꾸 저 계집앨 비호하십니까.”
제 뜻과는 정반대의 의견을 말하는 공작에 바라크가 울컥 화를 내듯이 말했다.
어차피 바라크가 자신의 말에 반항할 거라 생각했던 모양인지, 그의의 대꾸에도 별다른 관심 없는 듯 공작은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원하는 대로 하거라. 초대장까지 받았으니 들어가지 않는 것도 이상하니까.”
“예, 아버지.”
“그리고 바라크, 저 아이의 행동에 네가 왈가왈부할 자격이 없다는 걸 알 텐데.”
“도대체 왜 이러십니까!”
바라크는 꼭 외눈박이 세계에서 떨어진 두눈박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 상처받을 에이프릴 생각 안 하시는 겁니까?”
그 묘한 단어 선택에 멈칫한 리안이 고개를 옆으로 삐딱하게 기울였다.
“더는 듣지 않으마.”
알렉시스 공작은 되돌이표 같은 이 대화에 더 이상 이어갈 생각이 없는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라크가 뒤이어 공작을 따라가려고 했지만 리안이 그를 붙잡았다.
“그만해라, 바라크.”
“형.”
“아버지께서 네 억지를 계속 들어주실 거라 생각하느냐.”
“억지라니! 형, 에이프릴은……!”
바라크는 어쩐지 울고 싶어 하는 얼굴이었다.
“형 동생이라고!”
바라크의 길게 뻗은 손가락이 날 향했다.
“저 계집애가 아니라.”
뭐, 그렇긴 하지.
날 가리키는 손가락에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동생을 놔두고 어떻게 남인 내 편을 들 수 있냐는 유치한 발상이었겠지.
바라크가 눈을 꾹 감았다가 애써 침착을 유지하며 리안에게 또박또박 물었다.
“이 계집애가 집에 올 거라는 걸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
“아버지나 형이나 마찬가지야.”
핏발이 바짝 선 눈으로 리안을 보고 있는 바라크의 상태를 보아하니 더 이상 그를 설득하고 이해를 바라는 건 이미 무리였다.
또한 에이프릴의 몸에 차도까지 생겼으니 내가 있어야 할 이유를 따로 알지 못하겠지.
“사람을 어떻게 이런 식으로 기만해.”
“이게 기만이라는 말까지 들을 정도의 상황은 아니야, 바라크.”
“이게 어떻게 기만이 아니야! 에이프릴은 지금 제대로 걷지 못하는 상태로 별장에서 지내고 있는데!”
“…….”
“형이랑 아버지는 에이프릴 모르게 이 계집앨 데리고 와서 공녀로 대우하겠다고 하는데!”
사용인들이 보고 있다는 것도 전부 잊은 채 하고 싶은 말을 와다다 쏟아내고 있는 그에 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라크, 기만은.”
늘 어찌할 줄 모르는 기색을 띠고 있던 리안이 퍽 단호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우리가 다시 이리나를 이곳에 부른 걸 기만이라고 한다.”
바라크에게 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말이었다. 발목을 붙잡는 한마디에 몸을 돌리자 리안은 여전히 바라크를 응시하고 있는 채였다.
“도련님.”
패트릭이 다급히 리안을 저지했다. 그러잖아도 흥분한 바라크를 노골적으로 자극하는 말이나 다를 바 없었으니까.
“무슨 뜻인데.”
파들파들 떨리는 입꼬리가 애써 위로 올라갔다.
형제끼리 주먹다짐하는 꼴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아, 내가 옆에서 한마디를 거들었다.
“처음으로 리안 오라버니의 말에 동조하게 될 줄은 몰랐네요.”
“누가 네 오라버니야!”
“공작님 말씀 못 들으셨어요? 공작가에 있는 동안 제가 공녀로 대우받을 거라고요. 그러니…….”
쨍그랑!
짤막한 빛이 내 볼을 스쳐 지나가면서 뒤에 걸려 있던 그림 액자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와장창 깨지는 소리에 뒤를 흘긋 쳐다봤다.
“바라크! 무슨 짓이냐!”
리안의 노성에도 바라크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성질머리는 여전하네. 괜히 공작가의 미친 망둥이라는 말을 듣는 게 아니지.
“다시 불러봐.”
“저한테 오라버니라는 말을 그렇게 듣고 싶어 하시는 줄 몰랐습니다, 바라크 오라버니.”
“너……!”
“오라버니께서 좋든 싫든 저와 공작님이 나눈 이야기가 있으니 따라주셔야 하고요.”
아버지인 알렉시스 공작의 이야기까지 꺼내고 있으니 노골적으로 날 건드릴 수도 없는 상태였다.
웃음이 비죽 흘러나왔다.
내 앞에서 에이프릴을 살려달라고 스스로 구속구까지 차가면서 굽신거렸다가, 지금은 이렇게 당당하고 오만하게 구는 놈을 보니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내가 본인 동생을 고쳐준 여자라는 걸 알게 되면 어떤 얼굴을 할지 정말 궁금해지기까지 했다.
마음 같아선 말해주고 싶었지만, 후에 있을 일을 위해 꾹꾹 참아야 했다.
“부른다고 냅다 쪼르르 달려오는 꼬락서니를 보면, 길거리 똥개도 너보단 나을 거다.”
글쎄.
과연 내가 부른다고 쪼르르 달려온 길거리 똥개일지, 아니면 공격하기 위해 달려드는 들개인지는 끝을 봐야 알겠지.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언사였지만, 이 정도의 모욕은 예상 가능했던지라 오히려 담담할 지경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1년이 지나면 가지 말라고 붙잡아도 떠나드릴 테니까요.”
이 개 같은 공작가에 눌러 붙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으니까.
날 노려보던 바라크가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위협이라도 하려는 모양새에 패트릭이 그를 막으려 들고, 리안이 나를 자신의 뒤로 숨기려고 했지만 바라크가 한 발 더 빨랐다.
성큼 몸을 붙인 그가 다가오자, 뒤로 물러서지 않은 채 그를 올려다볼 때였다.
험상궂기만 하던 얼굴에 비틀린 미소가 떠올랐는데 마치 지금이라도 날 찢어 죽이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이내 그가 허리를 살짝 숙이며 내 귓가에 속삭였다.
“넌 여기에 1년도 못 있게 될 거다.”
퍽 자신만만한 어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