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얼굴이 뚫어져라 보던 내가 의아했는지 카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죽거림이 있을 거라고 당연히 예상한 바였다. 패트릭은 카나가 날 싫어하지 않는다고 말했었지만, 믿기 어려운 말이기는 했다.
공작저에 도착했을 때 보였던 공격적인 행동을 생각하면 그녀가 날 싫어하지 않을 리 없었으니까.
“화낼 줄 알았거든.”
“공녀님께 화내는 하녀장이라니. 듣도 보도 못 했습니다.”
“그건 그렇긴 하지만.”
“…….”
“화 안 나?”
내 태도는 꼭 그녀에게 화를 내라고 종용하는 느낌이었다.
그런 의도로 말을 한 건 아니지만.
물음에 카나가 짤막하게 숨을 들이마시면서 굳게 닫혀 있던 창문을 활짝 열며 대답했다.
“공녀님께서 그리 반응하실 만하니까요.”
“…….”
“잘하셨습니다.”
예상치 못한 칭찬이었다.
이죽임 같은 걸 듣지 않는다면 적어도…… ‘굳이 바라크 도련님의 성미는 건들지 마시라.’ 이런 식의 경고 아닌 경고는 들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잘했다는 말은 정말 의외였다.
예기치 못한 한마디에 정신을 못 차릴 때, 창문 안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퍼뜩 정신 차리고는 카나를 바라봤다.
방문을 등진 채 내 앞에 선 카나가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날 보고 있었다.
“둘째 도련님께서 심하게 구셨던 게 맞으니까요.”
“…….”
“도련님은 되고, 아가씨는 안 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고작 저 한마디에 카나가 날 좋아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건 아니지만, 이 한마디로 인해 패트릭이 했던 말이 짤막하게 수긍 가기는 했다.
어쩌면 나를 싫어하는 정도는 아닐지도 모른다고.
그녀가 아무리 공사 구분이 뚜렷한, 유능한 하녀장이라고 해도 방금의 말은 굳이 내 앞에서 할 필요는 없는 말이었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편을 들어주기 위한 말인 것은 확실했다.
공작가의 진짜 여식도 아닌 내 편을 말이다.
신기한 노릇이네. 카나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 내 부재가 있던 3년 동안 카나와 공작가 사이에서 무슨 문제가 생기기라도 했나? 싶을 정도였다.
“그래서,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됐어, 생각 없어.”
카나를 더는 바라보지 않고 침대 위로 몸을 뉘었다.
싫다는 내게 억지로 식사를 강요할 생각은 없었는지 “알겠습니다.”라는 말이 짧게 들려왔다.
“그럼 편히 쉬세요.”
그렇게 말하고는 그녀가 문을 닫고 나갔다.
“잘하셨습니다.”
하녀장이 공녀를 칭찬한 건 굉장히 건방진 일이지만, 그리 기분이 나쁘지 않은 이유는 내가 진짜 귀족이 아니기 때문일까.
뭐, 집안의 하녀장과 귀족가의 자제들 사이의 유대감이 깊다면 저런 칭찬도 못 할 정도는 아니지.
“이상하네.”
정말로 나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면, 굳이 공작가로 왔던 첫날에 내게 적의를 드러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런 카나가 이상하면서.
“나도 이상하고.”
잘했다는 그 말에 기분이 좀 좋아진 스스로도 이상했다.
내가 과거, 공작가에 당해온 것을 생각하면 나만은 공작가의 귀한 자제분들에게 그리 행동해도 된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묘하게 기분 좋았다.
* * *
“타렴.”
마당에 준비되어 있는 마차를 가리키면서 리안이 조용히 말했다.
왜 한 대뿐이야.
리안이 황실의 기사단장으로 근무하고 있다는 건 알지만, 왜 하필이면 내가 황실에 가는데 같은 마차를 타고 가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두 대가 준비되어 있었는데 한 대는 바라크가 먼저 타고 갔다.”
내 생각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던 모양인지 리안이 순순히 대답했다.
딱히 얼굴 위로 드러나는 생각을 숨길 마음은 없었지만.
그 개자식.
바라크 입장에서는 나와도, 그리고 내가 이곳에 있는 걸 찬성하고 있는 리안과도 같은 자리에 있기 싫었겠지.
본인만 그런 줄 아나.
“공작가에 마차가 부족할 일도 없을 텐데 왜 굳이 함께 타야 하나요.”
“사람들이 수군거릴 테니까.”
“…….”
“사고로 인해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왔고, 처음으로 황실에 가는데 오라비랑 다른 마차를 타고 들어가면 이상하다 생각하겠지?”
하, 숨을 살짝 내뱉었다.
그래, 온갖 뒷이야기를 하는 게 귀족들이고 황성인데 각기 다른 마차를 타고 왔다는 이야기가 돌면 별별 소문이 다 돌겠지.
“에이프릴로 생활하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느냐.”
그래, 그러기로 했지. 그 말에 치맛자락을 살짝 쥐고는 마차에 올라탔다.
내가 자리를 잡은 뒤에야 리안도 마차에 올라타고는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눈을 감고 잠깐 잠이라도 자는 척한다면 쓸데없는 대화 같은 건 안 하겠지.
“집에서 같이 지내던 그 늑대수인 말이다. 알리샤……라고 했던가?”
리안의 입에서 알리샤의 이름이 나오자 나는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알리샤는 왜요.”
혹여나 공작가에서 알리샤를 건드릴까 걱정이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미 아버지를 건드린 공작가가 피 한 방울 안 섞인 알리샤를 건드리는 건 쉬운 일이지.
“별다른 건 아니고…… 왜 데리고 오지 않았나 싶어서.”
“…….”
“네가 원한다면 알리샤를 공작가로 데리고 와도 상관없으니까.”
“됐습니다.”
알리샤가 이곳에서 마음 고생하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내가 할 복수에 날 도와주겠다며 나서는 것도 원치 않았다. 아버지의 죽음에 누구보다 슬퍼한 게 알리샤였는데, 그 애가 또다시 슬퍼하지 않길 바랐다.
“어째서?”
“가족이 힘들어하는 걸 보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내 말에 정자세로 앉아 있던 그의 몸이 흠칫했다.
“그자가, 네 가족이라고?”
“예.”
못 믿겠는지 떨떠름한 기색이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알리샤는 내 가족과 마찬가지였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부모님과 함께 있었던 이가 알리샤였다. 알리샤는 내 친구이면서 동시에 형제였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알리샤가 아픈 아버지와 어린 내게 얼마나 지극정성이었는지 모르겠지.
“그렇……구나.”
쫓겨난 뒤 1년 동안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울기만 했었다.
사람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을 때 날 일으켜 세운 것도 알리샤였다.
“이리나.”
알리샤를 생각하고 있을 때, 에이프릴이 아닌 내 본명을 부르는 리안에 고개를 느리게 들었다.
“……후회하고 있다.”
무엇을요? 라고 되물으려는 찰나 마차가 덜컹거리면서 멈추었다.
“도착했습니다.”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는데 벌써 황궁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바깥에서 들리는 마부의 목소리를 끝으로 리안이 표정을 정리하면서 먼저 마차에서 내렸다.
리안이 에스코트하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과거, 그가 나를 에스코트할 때는 그를 향해 미소 지었는데, 지금은 두 사람 중 그 누구도 웃고 있지 않았다.
후회하고 있다라……. 답은 빤하지.
“에이프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내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는 마차에서 내렸다.
여름의 끝 무렵이라 청명한 하늘과 더불어 따가운 햇살이 아플 정도로 피부를 때렸다.
“리안 경.”
리안을 부르는 이는 긴 머리카락을 높게 질끈 묶은 레르비앙이었다.
그를 향해 짧게 인사한 그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에이프릴 영애.”
“오랜만이에요, 레르비앙 경.”
“별장에서 돌아오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몸은 좀 괜찮아지셨습니까?”
“예, 푹 쉬었더니 많이 나아졌네요. 크게 다친 것도 아니었고요.”
크게 다친 것도 아니었다, 라는 말은 일부러 던진 말이었다.
동시에 새삼 궁금해졌다. 나한테 공녀의 대역을 맡겼고, 에이프릴이 완치하지 못한 채 다시 돌아오게 된다면 어떻게 될지 말이다.
계속해서 대역을 부탁할 리도 없을 텐데.
“피곤해 보이시이네요.”
“그렇습니까.”
레르비앙은 3년 전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특히 피곤할 때 지었던 특유의 지친 표정은 여전했다.
그렇잖아도 일이 많았는데 곧 국혼을 앞두고 있으니 더 일이 많아진 건가.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네, 안내 부탁해요.”
“리안 경과는 다음에 이야기 나누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3년이란 시간이 참 긴데, 변한 거라고는 없는 공작가의 일원들이나 레르비앙의 모습을 보면 그 시간이 긴 시간은 아닌 거 같기도 했다.
뒤에서 느껴지는 리안의 시선을 모르는 체하며 레르비앙의 뒤를 따랐다.
페르포네가 황실의 정무를 전부 다 맡고 있는 건가? 아직까지 황제가 멀쩡히 살아 있다지만, 정부에 미쳐 정무를 하지 못하는 건 과거부터 유명한 사실이었다.
그나마 로지안이 아이를 낳을 수 없어서 다행이지.
만약 평범한 정부였다면 여기서 레르비앙의 일이 더 늘어났을 게 분명했다.
“크게 다치셨다고 들었는데…….”
레르비앙이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마저 말을 이었다.
“완쾌하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운이 좋았죠.”
에이프릴인 척 거짓말하는 건 그렇게 어렵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