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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역공녀에게 후회는 필요 없습니다 (19)화 (19/109)

19화

양심이 따끔거릴 정도도 아니었고. 그저 한 귀로 듣고 흘리면서 가볍게 대꾸만 하면 될 정도였다.

“레르비앙 경께서도 알고 계시다시피, 큰 사고였는데 돌아온 뒤로 서신 한 번 없던 전하가 참 야속했네요.”

가볍게 던진 농담이었다.

황태자가 있는 동편 건물 쪽으로 들어서자 레르비앙이 걸음을 멈추면서 나를 돌아봤다.

이 한마디에 조금 질린다는 기색이었다.

진담이 섞이긴 했지만 가벼운 농담이었고, 보통의 귀족들이라면 그저 달래는 한마디를 하고 끝날 이야기였다.

“레르비앙 경?”

왜 이렇게 쳐다보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조심스럽게 이름을 부르자, 그가 모노클을 살짝 치켜올렸다.

“완쾌하시자마자 이런 말씀 드리는 게 참 송구스럽지만.”

“하세요.”

“전하께서 하신 말씀은 진심입니다, 공녀님.”

이게 무슨 소리래.

레르비앙 경의 한마디에 바로 든 생각이었지만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짧게 숨을 들이켜자, 더운 바람이 폐 속을 깊이 찔렀다.

“저로서는 전하의 뜻이 아쉽긴 하지만…… 공녀께서 전하의 말씀을 가볍게 생각하시는 것 같아 한 번 더 말씀드리는 겁니다.”

여전히 알 도리가 없는 말이었다.

“후원으로 들어가시면 전하께서 계실 겁니다. 그럼.”

묵례를 하고 다시 건물을 나서는 레르비앙 경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봤다.

“무슨 소리야, 대체.”

자기만 아는 말을 하고 가면 어쩌란 건데.

그리고 도대체 공작가 사람들은 왜 이런 이야기는 안 한 건데.

미간에 지는 주름을 손가락으로 꾹 누르고는 후원으로 들어갔다.

후원이라고는 했지만, 후원이라기보단 작은 숲이란 표현이 더 잘 어울리는 이곳에 짧게 감탄하던 찰나였다.

“영애?”

꿀처럼 달콤한 미성이었다.

소리가 난 곳에는 어렸을 때 그랬던 것처럼 직접 정원을 관리하고 있는 페르포네가 눈에 들어왔다.

“……전하?”

수풀 속에 서 있는 남자는 인간이 아닌 꼭 엘프로 착각할 만큼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레르비앙 경에게 내가 온다는 이야기를 미리 들었을 텐데도 그는 조금 놀란 기색이었다.

“레르비앙 경은 간 겁니까?”

성큼 다가온 페르포네에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칠 뻔했다.

아무것도 변한 게 없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공녀?”

의아한 목소리에 입술을 작게 달싹였다.

“전하, 키가…….”

키가, 많이 크셨네요.

그 말이 일순 입 밖으로 나올 뻔했다. 내가 열아홉일 때 페르포네는 열일곱이었다.

나와 시선이 똑같은, 그리고 나보다 그리 크지 않은 키의 아이였는데.

“왜 아무 말도 없습니까, 공녀.”

과거와 다를 바 없이 페르포네가 꿀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프리지아보다, 민들레보다 더 노란 눈이 반달로 접혔다.

어렸을 때부터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아이였지만, 이렇게 순식간에 미청년이 되어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황실의 피를 이어받았음을 증명하는 태양과 같은 금색 머리카락과 벌꿀 같은 금색 눈동자가 올곧게 날 향하고 있었다.

나와 시선이 맞던 열일곱의 페르포네는 이제 올려다봐야 하는 스물둘의 페르포네가 되어 있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싱겁네요. 일단 자리에 앉도록 하죠.”

이상하지만 굳이 캐묻지 않겠다는 눈치의 그가 빙긋 웃고는, 후원 가운데에 있는 티테이블로 안내했다.

“공녀께서 먼저 서신을 보낼 줄은 생각 못 했습니다.”

“돌아왔다는 이야기에 얼굴 한 번 비추지 않으시는 무정한 약혼자시니 어쩔 수 없잖습니까.”

“하하.”

웃게 만들려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그가 재밌다는 듯이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야 아무 관계도 아니니 상관없다지만,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이가 에이프릴이었으면 상처받았을 것이란 생각이 짧게 들었다.

이런 표현이 적합한지 모르겠으나, 그 앤 여린 애였으니까.

“제가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들으셨죠?”

“예. 그리고 좀 나아질 줄 알았던 연금술부 부부장이 한껏 예민하다는 것도 들었고요.”

도대체 남들한테 얼마나 까칠하게 굴었으면 황태자가 직접적으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왜 오지 않으셨나요.”

바람결에 따라 부드럽게 흔들리는 금빛 머리칼을 보다 직설적으로 물었다.

“서신이라도 한 통 보내실 줄 알았습니다.”

다정한 미소를 그리고 있던 입가가 살짝 뭉개졌다.

뒷목을 쓸면서 잠깐 고민하고 있는 페르포네는, 이 상황이 조금 난처한 것처럼 보였다.

하아, 숨을 가볍게 토한 그가 여전히 다정한 음색으로 걱정스레 물었다.

“아직 공작에게 이야기는 안 하신 듯하네요.”

“전하께서 하신 말씀은 진심입니다, 공녀.”

방금 전 레르비앙 경이 했던 말과 전혀 다르지만, 묘하게 비슷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아마 그건 내가 의미 모를 말을 들어도 계속 내색할 수 없는 처지이기 때문일 것이고.

“무얼요?”

8년을 귀족으로 산 게 헛으로 산 건 아니었는지,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는 연기 하나쯤은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모르는 척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잖습니까, 공녀.”

찻잔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직접 말하는 것보단, 공녀가 직접 말하는 쪽이 덜 자존심 상할 텐데요.”

“…….”

“그래서 일부러 시간도 드린 것이고요. 힘든 시기였던지라 기다렸던 것도 있지만요.”

“…….”

“사고는 물론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페르포네의 입에서 공녀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어색했다.

어느 정도로 어색했냐면, 바라크와 리안이 나를 ‘이리나’라고 부르는 걸 들었을 때처럼 어색했다.

어렸을 때만 해도, 아니, 페르포네가 열여섯 때만 했어도 나더러 누님, 하면서 잘 따랐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누님이라는 호칭을 부르지 않더니 ‘에피’라고 부르기도 했었다.

3년 만에 만난 페르포네는 묘하게 낯선 감각을 주고 있었다.

도대체 나와 공작저는 모르는, 두 사람 사이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 알 수 있는 단서 같은 말이 나오면 좋겠는데.

시치미 떼는 것도 한계가 있고.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차를 한 모금 마시자 페르포네가 입을 일자로 다물고 있다 다시금 말하기 시작했다.

“우리 파혼 이야기, 공녀께서 직접 권하는 쪽이 낫지 않겠습니까.”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단번에 나온 한마디였다.

파혼? 내가 진짜 에이프릴이라도 되듯이 심장을 덜컥거리게 만드는 말이었다.

긴장을 애써 감추기 위해 손을 꾹 말아 쥐었다.

에이프릴이 페르포네에게 먼저 파혼 이야기를 꺼냈을 리가 없다.

그 앤 페르포네에게 첫눈에 반했던 상태였으니까.

그렇다면 페르포네가 먼저 꺼낸 말이라는 소리겠지.

억지로 웃으려고 하자 입가에 경련이 짧게 일어났다.

“저는 아직까지도 파혼의 이유를 납득하지 못하겠습니다.”

“몇 번이고 이유를 말씀 드렸잖습니까.”

역시 페르포네가 먼저 꺼냈군.

황제의 정부인 로지안을 제외하고 황실에서 따로 반대하는 사람이라도 있었나.

“따로 마음에 둔 이가 있다고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아니지, 공백기를 체감한 것처럼 3년이란 시간은 길었으니 페르포네가 사랑을 시작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이기는 했다.

굳이 말하자면 첫사랑을 끝내고 두 번째, 세 번째 사랑을 시작해도 이상하지 않긴 하지.

“몇 번을 말씀드려도 믿지 않으시니 당혹스러울 뿐입니다.”

“……그래서, 파혼을 원한다고요?”

“공녀의 위신을 생각해서 한 말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지?

과거에 페르포네의 옆에 함께 있을 때는 그런 기색은 못 느꼈었는데.

그렇게 마음이 여렸던 페르포네가 사랑 때문에 파혼을 요구하는 용기가 있다는 게 신기하기도 했다.

“공녀가 파혼당했다는 소문보단, 파혼을 요구했다는 말이 더 나으니까요.”

지독하게 다정한 건지, 아니면 지독하게 냉정한 건지.

황태자가 파혼당했다라는 가십에 휘말리면서도 저와는 결혼하지 않겠다는 것이니 그를 사랑하는 에이프릴에게는 정말 냉정한 말이었다.

“그래서 공작저로 오지 않으셨던 거군요.”

“쓸데없이 방문했다가 공녀께서 희망이라도 가지면 곤란하니까요.”

칼 같네.

페르포네를 이렇게까지 만든 상대가 누굴까, 대체.

옆에 있는 귀족 여성이라고 해봤자 황실 시녀와 하녀들뿐일 텐데.

어쩌면 에이프릴이 별장으로 갔던 건 휴가 때문이 아니라 이 말도 안 되는 파혼 이야기에서 멀어지고 싶어서 떠난 건 아니었을까.

“공녀.”

상념을 깨뜨린 한마디에 고개를 들었다.

“기다리는 건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

“공녀께서 공작께 말씀드리세요. 파혼하겠다고.”

뭐라 반응할 수가 없어 혀로 마른 입술을 핥았다.

“그리고 공녀가 보낸 서신에 대한 답장은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겁니다.”

헤어짐을 일방적으로 요구하면서도 페르포네는 개자식처럼 느껴지지가 않았다.

같은 말이어도 바라크가 했다면 천하에 둘도 없는 쓰레기 자식이라고 욕이라도 했을 텐데.

이런 식의 파혼 통보는 당혹스럽기만 한데.

게다가 그 이유가 다른 사람 때문이라니. 차라리 누구를 좋아하는지 이름을 말해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말하지 않는 이유는 에이프릴의 성격을 봤을 때 그 대상을 가만두지 않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겠지.

전과 같으면 축하한다는 말이라도 할 텐데 지금은 얼떨떨해서 그런 말도 나오지가 않았다.

게다가…….

슬쩍 차를 한 모금 마시는 그를 곁눈질했다.

얼핏 보이는 개운함에서 한시라도 빨리 파혼을 진행하고 싶은 기색을 쉽게 읽을 수 있었다.

“공녀, 대답을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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