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날 부르는 페르포네에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서 망설이는 찰나였다.
“라이즈 공녀?”
뒤에서 들리는 달큰한 목소리에 앞에 앉아 있는 페르포네의 미소가 그대로 굳는 게 느껴졌다.
황실에서 페르포네가 이런 반응을 보일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바로……
“로지안 님.”
자리에 일어서서 상대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눈앞에 선 이는 황제가 미친 지금 황실 내에서도 입김이 황태자만큼이나 센 인물이었다.
웨이브진 연분홍색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면서 눈을 반짝였다. 보석 같은 청록색의 눈동자는 퇴색됨 없이 반짝이고 있었다.
로지안 스타리유.
황제의 유일한 정부의 갑작스러운 등장이었다.
“라이즈 공녀가 페르포네와 만나고 있다는 걸 들어서 찾아왔습니다.”
“아…….”
참 특이하다면 특이했다.
열세 살, 공작저로 들어가기도 전부터 황실에 있던 이가 로지안 스타리유였다.
몇 년이 지났는데 주름 하나 없이 그대로인 얼굴은 아름답다고 생각되지만, 동시에 기괴하다는 느낌도 주었다.
날 향해 방긋 웃고 있었지만, 내가 못마땅하다는 기색이 여실히 느껴졌다.
황실과 공작가의 결혼은 로지안 스타리유의 입지가 약해진다는 말이었으니까.
“로지안 님.”
입꼬리는 말려 올라간 상태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는 페르포네가 로지안을 서늘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파혼 이야기를 할 때만 해도 다정한 눈빛이었던 페르포네였던지라, 이런 모습을 보니 정말 황실의 문양 그대로 황금사자와 같은 모습이었다.
“로지안 님께서 아바마마와 사이가 돈독하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
“그래도 제가 로지안 님에게 페르포네라 이름을 불릴 만큼은 아닌 것 같은데요.”
그건 그렇지.
로지안은 보통의 후궁과는 달랐다.
말 그대로 직위도 뭣도 없는 애첩, 정부였을 뿐.
아이라도 낳을 수 있는 몸이었다면 모르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었고.
그는 남자였으니까.
로지안 스타리유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남자인 게 새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을 홀릴 듯한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던 로지안 스타리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네요, 전하.”
황제가 아무리 아낀다고 한들 귀족도 아닌, 그리고 귀족이라 할지라도 황실의 그 누구도 페르포네를 함부로 대할 수 없고, 대해서도 안 되었다.
황위를 이을 이가 페르포네뿐이었으니까.
“제가 전하를 어린 시절부터 뵈었다 보니 어미의 마음처럼 느껴졌나 봅니다.”
“…….”
“무례를 용서하세요.”
불쾌감으로 굳었던 기색은 순식간에 사라진 뒤였다.
이내 로지안의 시선이 내게로 닿았다.
“라이즈 공녀가 쾌차한 것 같아 다행입니다. 공작님께서도 괜찮으신 모양이고요.”
“…….”
무슨 말이야.
미간에 살짝 주름이 지고 있을 때였다.
“공녀, 잠깐 자리를 비워주겠어요?”
페르포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축객령을 내렸다.
계속 이곳에 있어봤자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것밖에 더 되겠나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 만날 땐 제가 한 말의 긍정적인 답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이 와중에도 파혼에 대한 말을 꺼내는 페르포네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어릴 때는 마냥 작은 새끼 고양이 같았는데, 언제 저렇게 커서는.
페르포네의 마지막 말에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후원을 빠져나왔다.
“이상하네.”
로지안이 저런 식으로 굴 정도면 차라리 공작가의 공녀와 국혼을 하는 게 맞았다.
로지안을 견제할 수 있는 커다란 힘이 생기는 거였으니까.
달리 페르포네의 등을 밀어줄 수 있는 이가 따로 있다면 모르겠지만……
“제국에는 없을 텐데.”
라이즈 공작가만큼이나 명맥을 이어오고 권세가 대단한 곳도 없었다.
끽해야 응원해 줄 수 있는 건 황제의 이복동생과 결혼한 대공 하나뿐인데 그 둘 사이에 있는 것도.
데미안 하나뿐이었으니까.
게다가 페르포네와의 사이가 그렇게 나쁘지도 않았고.
떠오르는 데미안에 볼 안쪽을 꾹 깨물었다.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네.”
하,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면서 한숨을 내뱉었다.
“따로 마음에 둔 이가 있습니다.”
“정말인가.”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거짓말 같아 보이지는 않았는데.
그리고 과거 내가 알고 있던 페르포네의 성격을 떠올리면, 그런 걸로 거짓말을 할 인물도 아니었고.
황태자의 나이가 벌써 스물둘이니만큼 다른 누구를 사랑해도 전혀 이상하지가 않았다.
“누구지.”
공작저의 사람들에게는 관심이 없지만, 페르포네는 또 달랐다.
막냇동생 같았던 페르포네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하니, 도와줄 수 있다면 티 안 나게 도와주고 싶은 마음도 컸으니까.
공작저로 바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 황실 후원을 빙글빙글 걷고 있을 때였다.
“……대체! 우리가 네 억지를 언제까지 들어줘야 하느냐!”
벼락같은 노성이 갑작스럽게 들리자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어디서 나는 소리야? 고개를 두리번거리자, 멀찍이서 깔끔한 옷차림의 남성이 정원 건물 뒤편에 서 있는 게 보였다.
베트리체 백작?
엿듣다가 좋은 꼴 보기는 힘들 것 같아 발걸음을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려는 찰나였다.
“네 행동 하나 때문에 지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아돌프를 우습게보고 있는지 아느냐!”
“그래도 관둘 생각은 없습니다.”
열받은 베트리체 백작의 목소리와는 달리 차분하고 굳건한 목소리의 주인은 아도니스였다.
“아돌프가 아직 2기사단에 있는 건 저 때문이 아니라 본인의 노력 부…….”
짝!
조용한 정원에 들리는 마찰음에 절로 흠칫했다.
분을 이기지 못한 베트리체 백작이 두터운 손으로 아도니스의 뺨을 그대로 내려친 모양이었다.
“계집애한테 검을 쥐게 하는 게 아니었다.”
“…….”
“네 동생을 생각해서 지금이라도 검을 포기해.”
“포기 못 합니다.”
똑 부러지게 대답하는 아도니스의 목소리가 자리를 뜨려고 했던 발을 붙잡았다.
“이 자……!”
베트리체 백작의 손을 높이 드는 모습이 눈에 들어올 때였다.
“아도니스 경?”
경의 이름을 부르며 걸음을 돌리자, 한껏 화난 얼굴의 백작이 날 보더니 살짝 누그러진 채 고개를 팩 돌렸다.
“……라이즈, 공녀?”
“여기 계셨네요. 오라버니가 아도니스 경을 찾고 있어서요.”
“저를요?”
3년 만에 바뀐 건 또 있었다.
아카데미 시절에는 긴 머리카락을 포니테일로 질끈 묶었던 아도니스였는데, 지금은 리안만큼이나 짧은 길이를 유지하고 있었다.
“큼.”
내가 두 사람 대화의 끼어들자 백작이 헛기침과 함께 날 선 눈으로 쳐다보곤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갔네.
쓸데없이 나선 꼴이 되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지.
“공녀께서 저택으로 돌아오셨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건강하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걱정해 줘서 고마……. 경, 피가 나는데요.”
뺨을 어지간히 세게 맞은 데다, 참는다고 입술에 피가 나는 상태였다.
내 안위가 문제가 아니라, 이 상황에서는 아도니스에게 괜찮냐고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손등으로 피를 대충 닦아내는 모습을 보니 더 쓰라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요.”
자신의 손수건을 내밀자 아도니스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이 정도 상처쯤은.”
내민 손수건을 받을 생각도 하지 않는 아도니스에 다시금 입술을 달싹였다.
“아도니스 경이 손수건을 받지 않으니 팔이 떨어질 거 같네요.”
“……예?”
“레이디의 호의를 거절하는 것도 기사가 할 만한 행동은 아니죠.”
별것도 아닌 일이지만 기사도까지 들먹거리자 결국 아도니스가 이기지 못하고는 손수건을 받아 들였다.
“입안이 찢어진 것 같으니까 며칠은 조심해요.”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면서 고마움을 표현하는 그녀를 보다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리던 찰나였다.
“공녀.”
붙잡지 않을 것 같았던 아도니스에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시죠?”
“방금 보신 거…….”
받지 않겠다고 한 번 거절한 것치고는 아도니스가 자연스럽게 손수건으로 입가를 가리면서 대답했다.
“비밀로 해주시겠습니까?”
제가 여기저기 떠들고 다닐 사람처럼 보이나요?
이죽거리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궁금해져서 하고픈 질문이었다.
그리고 이 말을 참은 이유는 남들이 듣기에는 이죽거리는 것과 다를 바 없었을뿐더러, 또 아도니스 경이 봐왔던 에이프릴은 그런 인간으로 보였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남 이야기, 떠들고 다니는 취미는 없는지라.”
그것도 아도니스가 부친에게 뺨을 맞은 걸 말이다. 승낙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 아도니스가 후, 하고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부탁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남의 집 가정사까지 끼어들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
“손수건은 가지세요.”
돌려받을 생각은 없으므로 걸음을 돌렸다.
공작저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은데……. 라이즈 공작에게 황태자의 파혼에 대해 물어본다면 과연 알까?
알 턱이 없었다. 만약 알고 있었다면 유의사항으로 내게 알려주었을 터였으니까.
공작저에서 에이프릴이 시시콜콜 모든 걸 말할 만한 사람은…….
“아도니스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