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내가 걸음을 다시 되돌리고는 손수건으로 입가를 가리면서 자리를 벗어나려고 하던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
갑작스러운 손길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바라보는 아도니스를 향해 눈을 살포시 접었다.
“날 바라크 오라버니가 계신 연금술부로 좀 안내해 줄래요?”
아도니스는 싫다는 말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왜 제게 안내를 부탁하신 겁니까?”
황실 복도를 아도니스 경과 발을 맞추며 걷고 있을 때 그녀가 내게 한 질문이었다.
조금 얼떨떨해하는 그녀에 눈을 데구룩 굴렸다.
못 할 부탁을 한 건 아니지 않나? 그렇다고 연금술부의 위치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을 솔직하게 꺼낼 수도 없고.
보통의 귀족 여성들보다 빠른 걸음이던 아도니스가 일부러 내 걸음을 맞춰주고 있었다.
“제가 한 부탁 때문에 난처해지신 겁니까?”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아도니스가 머쓱한 얼굴로 뒷목을 긁적였다. 재능 있는 여기사는 둘만 남은 이 상황이 조금 불편한 눈치였다.
바라크와 달리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닐 텐데 왜 저런 얼굴인지 모르겠다.
“공녀께서 그 상황에서 저를 도와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누구라도 그 상황을 본다면 도와주었을 거예요.”
“제가 하고자 하는 말은…….”
그녀가 숨을 짤막하게 들이마셨다.
“저를 불편하게 여기지 않으십니까.”
내가? 아니지, 에이프릴이?
……대체 왜? 무심결에 튀어나올 뻔한 ‘제가요?’라는 물음을 꾹꾹 눌러 삼켰다.
에이프릴 이 애는 내가 없던 3년을 도대체 어떻게 지냈는지 모를 일이었다.
몇 년간 쌓아뒀던 평판들이 에이프릴 때문에 다 무너진 게 아닌가란 걱정이 들 정도였다.
나름 합리적인 걱정이었던 이유는, 공작가의 공녀가 사고를 겪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음에도 이렇다 할 안부 편지를 한 통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기 평판 본인이 깎아먹는 건데 내가 뭐라 할 건 없지.
“전하와는 이야기 많이 나누셨습니까?”
화제를 전환하는 물음에 볼 안쪽을 씹었다.
아도니스 경은 페르포네가 공작가에게 파혼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과연 알고 있을까?
짤막한 고민에 대한 대답은 ‘아니다’였다.
아도니스가 아무리 친위대 소속의 기사라고는 하지만 그런 것까지 말할 사이는 아닐 테니까.
레르비앙 한 사람만 알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황제는 미쳤으니 말해봤자 소용이 없고, 로지안과는 척을 진 상태이니 더더욱 말할 이유가 없다.
“아도니스 경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하십시오.”
“혹시나 전하께서 달리 곁에 두려고 하던 아가씨가 있나요?”
“…….”
걸음을 잠깐 멈추었던 아도니스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신선함이 가득하다는 깨끗한 녹색 눈동자에 내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못 물어볼 걸 물어봤나? 하지만 레르비앙 다음으로 페르포네와 함께 있는 이가 아도니스일 텐데.
“달리 없으셨습니다.”
“그래요?”
“예. 그리고 만에 하나 있다고 한들, 그걸 제가 공녀께 말씀드릴 수도 없고요.”
“그건 그렇겠네요.”
없으니 약혼자라고 슬쩍 말해주는 거겠지.
만약에 있다고 한다면 끝까지 비밀로 했을 게 분명했다. 달리 없다는 말도 어쩌면 약혼녀의 비위를 맞춘다고 하는 거짓말일 수도 있을 것이다.
“여깁니다.”
“고마워요, 아도니스 경.”
“……예.”
여전히 당혹스러워하면서도 연금술부까지 안내를 해준 아도니스가 고개를 숙인 후 조용히 몸을 돌렸다.
걸어왔던 길을 뚜벅뚜벅 되돌아가는 아도니스의 뒷모습을 보다 시선을 거둬들이면서 연금술부 쪽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문 앞에서 먼저 들어가라며 등 떠미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들어가지 않을 거라면 비켜주시겠어요?”
“아, 네. 죄, 죄송……. 공녀님!”
“에이프릴 공녀님. 돌아오셨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새파랗게 질린 낯이던 사람들이 날 발견하자마자 얼굴이 단박에 밝아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곧 죽을 것처럼 울상이던 얼굴이었는데 지금은 꼭…… 이 세상에 더없을 구원자를 바라보는 눈빛이었던지라 절로 뒷걸음질쳐졌다.
뭐야, 무슨 일이야?
“연금술부의 여신님!”
“우리들의 구세주! 역시 이렇게 때맞춰 나타나 주시다니, 역시 구세주십니다!”
여신님? 구세주?
낯부끄러운 말들만 내뱉던 연금술부 소속의 부원들이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살짝 과장까지 보태자면 흑흑, 울음소리까지 내고 있던지라 부담스럽기 짝이 없었다.
바라크를 보러왔는데 웬 이상한 부원들에게 붙잡혀서 들어가지도 못하고 있었다.
“오라버니를 만나려고 온 건데. 이만 끝났으면 들어가 봐도 될까요?”
“공녀님! 제발, 제발! 저희랑 같이 들어가 주세요.”
“무슨…….”
“오늘따라 부부장님 상태가 까칠하기 짝이 없으세요. 지금 기분으로 들어갔다면 저희 오늘도……!”
다시 한번 낯빛이 파리해진 두 사람이 팔을 뻗어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일개 연금술부의 연구직들이 공작가의 공녀의 손을 함부로 잡는다는 건 굉장히 무례한 일임에도, 날 동아줄처럼 바라보고 있는 이들이었던지라 매섭게 내칠 수가 없었다.
“엄청 깨질 거예요.”
“게다가 오늘 저 결혼기념일이라 정시 퇴근하겠다고 약속했어요.”
제발, 제발!
애원의 눈빛에 헛웃음을 절로 터져 나왔다.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게 안에 있는 바라크 때문이구나.
하긴 모두까기의 표본이자, 망아지 같은 바라크가 밑에 있는 부하직원들을 가만히 내버려 뒀을 리가 없다.
그나마 에이프릴 공녀와 함께 있을 때는 유순하고 다정한 모습을 보였으니 내게 매달리는 거겠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상대를 잘못 골랐다.
내가 진짜 에이프릴이었더라면 바라크에게 먹히겠지만, 지금 나랑 같이 들어가는 건 제 발로 마수굴에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같이 들어가도 후회 안 하겠어요?”
“안 합니다! 공녀님이 계신걸요!”
후회할 텐데…….
자신만만한 목소리에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들이 후회 안 하겠다고 하니 뒷감당도 알아서 하겠지.
길을 터주는 두 사람을 보다 가볍게 노크를 하고는 문을 열었다.
“뭐야.”
어제저녁의 일 때문인지 사람 하나 찔러 죽일 것 같은 날카로운 목소리가 냅다 들려왔다.
“나야, 오라버니.”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건 책상에 머리를 박고 일을 하고 있던 바라크였다.
날 보자마자 오만상을 찡그리는 그에게 피시시 웃음을 흘리면서 냉큼 안으로 들어갔다.
“황실에 온 김에 잠깐 오라버니 얼굴이라도 보고 가려고.”
난 성큼성큼 들어가서는, 뒤에 서 있는 다른 직원들이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바라크의 앞에 서며 허리를 살짝 숙였다.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기 전에 웃는 게 좋지 않을까?”
“너.”
“혹시나 내가 진짜 에이프릴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어쩌려고 그래.”
세모꼴로 치켜뜨는 눈에 내가 히죽히죽 웃음을 흘리면서 허리를 폈다.
“잠깐 있었다 가도 되지?”
손에 쥐고 있던 깃펜이 부러질 것처럼 쥐고 있는 그가 내 뒤에 있던 사람들을 곁눈질하다 대답했다.
“……알아서 해.”
싫다는 말이 하고 싶은데도 꾹꾹 참는 얼굴이었다.
“부부장님, 말씀하셨던 자료입니다.”
결재 받아야 할 서류를 들고 성큼 다가온 직속 부하직원이 그에게 조심스레 서류를 내밀었다.
바라크가 꽤 진중한 얼굴로 종이를 넘기고 있었다.
에이프릴이나 리안과는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는 노을빛 눈동자가 종이를 뚫을 것처럼 보고 있었는데, 그건 퍽 신기한 모습이었다.
내가 봐왔던 바라크는 성실함이나 일을 한다거나 공부를 한다는 것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찾은 자료가 이것뿐이라고?”
“생체이식은 흑마법에 연관된 일이라 열람불가 서류인지라, 그에 관한 자료는 신전의 허가가 있어야 볼 수 있는 자료라서…….”
“변명하지 말고.”
한마디로 못 찾았다는 소리군.
바라크는 연금술과 마법에만 재능이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을 피 말리게 만드는 데도 대단한 재능이 있었다.
도움이라도 받길 원하는 것처럼 날 힐긋힐긋 쳐다보는 상대에게 안타깝다는 듯한 표정을 지을 뿐 나는 굳이 나서지 않았다.
“이게 끝?”
“……옙.”
부하직원의 대답에 그가 헛웃음을 터뜨리면서 몇 장 되지 않는 종이를 가볍게 툭 쳐내고는 대답했다.
“내가 말한 자료들 전부 다 찾아서 들고 와.”
“하지만 신전에…….”
“신전에 어떻게든 허가를 받으면 될 일 아닌가.”
“그, 제, 제가 오늘 아내랑 선약이, 정시퇴근을…….”
나름 용기를 내보면서 말하긴 했지만, 그게 바라크에게 먹힐 리가.
바라크는 기본적으로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였다. 아내랑 선약이 있다고 말을 해도 그의 입장에서는 ‘그게 왜?’라고 말할 인물이었고.
인간적인 면모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그에 결국 내가 끼어들었다.
“오늘 따로 선약 있는 것 같은데 그만하는 게 어떤가요, 오라버니?”
구세주……!
역시 내가 한 줄기의 빛이라는 것처럼 반짝이는 눈을 하는 그에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내가 끼어드는 게 못마땅한지 지그시 노려보는 바라크에게 난 방긋 웃어 보였다.
아무리 못마땅하다고는 해도, 내게 나서서 날카롭게 굴지는 못하겠지.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가 뜬 그가 부하직원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이만 나가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