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그럼…….”
“자료는 오늘 내로 다 찾아서 퇴근하고.”
동생은 동생이고, 일은 일이겠지.
게다가 생체이식에 대한 자료를 찾는 걸 보면 빤하지. 내 덕에 에이프릴의 몸 상태가 많이 나아졌다고는 해도 본인이 할 수 있는 준비는 다 해두고 싶을 것이다.
이만 나가 보라는 말에 기뻐하다가 순식간에 사색이 된 부하직원이 나에게 시선을 계속 보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두 사람 이야기에 끼어들었지만 바라크가 퇴근시켜 줄 생각이 없다고 하는데 내가 강요하는 것도 우습지 않나.
“뭐 해, 안 나가고.”
이내 울상이 된 두 부하직원을 보면서 고개를 짧게 저었다.
동생인 에이프릴이 왔는데 평소보다 더 예민하게 굴 줄은 몰랐겠지.
“……옙.”
한껏 울상으로 문 닫는 소리가 조용히 탁, 하고 들리고 나서야 내가 말문을 열었다.
“이런 식이니까 그런 소문이 돌지.”
“뭐?”
본인에 대한 소문이 어떻게 도는지 모르는 눈치에 내가 어깨만 으쓱였다.
모르는 것처럼 보이는데 굳이 친절하게 설명해 줄 필요는 없지.
바라크는 적을 만들기 좋은 성격이었다. 그런 그가 그나마 아직까지 살아 있는 이유는 갖고 있는 능력 때문이겠지.
“그래서.”
앉아 있던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책상으로 성큼 걸어갔다.
그가 한구석으로 밀어낸 종이를 슬쩍 들기 무섭게 바라크가 종이를 빠르게 빼앗아갔다.
“뭐 때문에 온 건데.”
들끓는 듯한 눈동자였다.
여전히 팔목에 채우고 있는 구속구 팔찌를 포면서 비식 웃음을 흘리면서 물었다.
“물어볼 게 있어서.”
“물어볼 거 있으면 빨리 묻고 꺼져. 너 같은 거랑 말 섞고 싶은 생각 없으니까.”
“에이프릴에게서 페르포네 전하에 대해서 들은 거 없어?”
“너……!”
자리에 앉아 있던 바라크가 단박에 일어나 내 멱살을 잡아끌었다.
잡힌 멱살에 순식간에 그의 앞으로 끌려 나가자 바라크의 눈동자가 내 코앞에서 보였다.
처음에는 그의 감정이 분노일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바로 앞에서 보는 그의 눈동자는 분노보다는 불안에 가까운 듯했다.
“허튼 짓거리 할 생각 하지 마.”
바깥에서 누군가가 들을까 봐 걱정되기는 한 모양인지 짓씹듯이 작게 속삭이는 말이었다.
바로 귓가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옷깃을 세게 잡고 있는 바라크의 손을 잡고 천천히 구속구 찬 손목을 어루만지며 대답했다.
내가 지금 당장 마음만 먹어도 손목 하나 날아갈 자식이 내 앞에서 이렇게 뻗대는 꼴이 얼마나 같잖고 우스운지 모르겠지.
“내가 허튼짓하지 않길 바라면 이렇게 굴면 안 되지.”
“……뭐?”
내가 놀란 기색도 없이 두 눈 동그랗게 뜨고 얼굴을 가까이 다가가자 바라크가 주춤했다.
바라크 힐 라이즈의 기억 속의 나는 여전히 눈물이 많고, 그에게 잘 보이고 싶어 안달이 난 나약한 계집애인 듯했다.
“건방지게 구는 네 작태 때문에 허튼짓이 하고 싶어지면 어쩌려고 이래?”
“너 죽고 싶어!?”
높아지는 언성에 짤막한 웃음을 터뜨렸다.
“밖에서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이렇게 목소리를 높인대.”
“…….”
“내가 허튼짓하는 꼴 보기 싫으면, 물어보는 거에 순순히 대답하면 될 텐데.”
“망할!”
세게 밀치면서 옷깃을 놓아주는 그에 양손으로 옷 앞섶을 툭툭 정돈했다.
“전하에 대한 이야기 같은 거 하지 않았어? 에이프릴은 페르포네 전하 좋아하잖아.”
“전하에 대한 말 같은 거 한 적 없어. 딱히 이상하다고 할 것도 없었고.”
파혼에 대한 이야기는 정말 아무에게도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파혼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바로 공작가에 알려서 국혼을 앞당겼을 거라 생각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에이프릴은 답지 않게 영 수상했다. 오히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에이프릴이 더 어울렸지.
말을 하지 않은 데는 달리 다른 이유가 있었나? 고개를 한 번 기울이자 바라크의 미간이 움푹 패었다.
“전하께서 너한테 무슨 말을 하셨나?”
바라크의 물음에 내가 어깨를 으쓱이며 능청맞게 대답했다.
“아니, 별달리 없었어.”
본인이 둘째 오라비인 바라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면, 나 역시 나서서 말해줄 생각은 없었다.
이런 비밀은 묵혀뒀다 후에 터뜨리는 게 더 재밌는 법이었으니까.
“다른 사람들이랑은 어떻게 지냈대?”
그 애가 어떻게 지냈는지 알아야 나도 대충 그에 맞춰서 움직일 테니까.
서재에 꽂혀 있는, 제법 깨끗하고 관리가 잘된 서책의 제목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훑었다.
대형 키이라 제조법부터 시작해서 연금술로 알아보는 영혼의 구속에 대한 논문 같은 것도 보였다.
“별건 없었지만…… 굳이 따지자면, 데미안이랑 싸운 듯했었지.”
“데미안?”
오랜만에 듣는 익숙한 이름에 나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데미안 디니아 발슈타인.
대공가의 유일한 후계자.
아카데미 동기의 이름에 잠깐 숨 쉬는 걸 멈추었다.
데미안의 이름에 조금 긴장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알리샤를 제외하면 내 비밀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걔랑, 왜?”
내가 공작가에서 쫓겨나기 전만 하더라도 나와 비슷한 상황이었던지라 나름 친근감을 가졌던 이이기도 했고.
그래서 제법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네가 공작저에서 나가고 난 뒤에 한 번 찾아온 적이 있었는데.”
“…….”
“그 뒤로 사이가 멀어졌으니까.”
가볍게 인상을 한 번 찡그렸다.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 바라크를 찾아온 건데 의문 해소는커녕 궁금증만 더 커진 상태였다.
“어째서?”
“그건 나야 모르지.”
책장에서 책 한 권을 꺼내 들고 있던 내게로 다가와서는 책을 빼앗고는 냉큼 책장으로 다시 집어넣었다.
“물어볼 거 다 물어봤으면 여기서 나가.”
“……도움 안 되는 자식.”
“뭐?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이제는 귀까지 막혔나.
“도움 안 되는 자식이라고, 너.”
느낌표는커녕 마침표도 주지 않고 물음표만 들입다 만들어놓은 게 바라크였다.
뒤에서 씩씩대는 바라크를 뒤로한 채 집무실을 나섰다.
데미안과도 사이가 멀어졌다라.
도대체 에이프릴 얜,
“어떻게 지낸 거야.”
* * *
에이프릴을 바라크의 집무실까지 데려다준 아도니스가 긴 복도를 뚜벅뚜벅 걷다 말고 걸음을 멈추었다.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보자, 찰랑거리는 긴 베이지색의 머리카락은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난 상태였다.
그러고 나서야 아도니스가 눈매를 찌푸렸다.
에이프릴이 건네준 손수건으로 입가를 가리며 조심스럽게 뱉어냈다.
입안에서 느껴지는 비릿한 맛에 아도니스가 노골적으로 인상을 찡그렸다.
검을 잡으면서 수없이 많은 상처를 입었지만, 검으로 받고 생겼던 상처보다 볼 안에서 난 상처가 더 아프게만 느껴졌다.
그 이유는, 아버지인 베트리체 백작이 저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뺨을 때렸기 때문이겠지.
아돌프의 검술 실력이 크게 늘지 않는 원인이 왜 자신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탓할 누군가가 필요해서 만만하게 저가 골라진 건가.
아돌프의 검술이 늘지 않는 이유는 본인의 태만으로 있는 것인데.
“저 계집애 때문에 아돌프가 기를 못 펴는 거죠.”
“호기심으로라도 검을 잡게 하는 게 아니었어요.”
자신을 향해 손가락질하고 수군거리던 집안 어르신들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시끄럽게 울려댔다.
“여기 계셨네요. 오라버니가 아도니스 경을 찾고 있어서요.”
에이프릴이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그건 아버지에게서 자신을 빼내주기 위해 그냥 던진 말이지 진짜는 아니었을 것이다.
“베트리체 경? 볼이 왜 그럽니까?”
황태자가 있는 동편 건물에 도착하자마자 건물에서 나오는 레르비앙의 물음에 그녀가 볼을 만지작거렸다.
“아, 뭐. 벽에 부딪쳤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볼이 그렇게 부을 정도로 벽에 부딪칩니까.”
눈에 뻔히 보이는 거짓말이겠지.
레르비앙은 사실대로 말하라며 닦달하지는 않았다. 두 사람의 사이가 그런 걸 닦달할 만큼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을뿐더러, 아도니스의 뺨을 이렇게 만들 사람은 황실 내에서도 유일했으니까.
그녀의 아버지인 베트리체 백작이겠지.
속으로 혀를 쯧쯧, 찬 레르비앙이 걱정스레 덤덤한 얼굴의 아도니스를 바라봤다.
아들인 아돌프가 빛을 보지 못한 이유가 아도니스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사실상 아도니스가 없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런데 레르비앙 경.”
다시 걸음을 빨리 움직이려는 레르비앙을 붙잡으며 물었다.
“혹시 오늘 에이프릴 공녀를 만나셨습니까?”
“보기는 봤죠. 오늘 전하께서 공녀를 초대하셨으니까요.”
“…….”
“한데 그건 왜 물어보시는 겁니까?”
입안에서 맴도는 말을 쉽게 꺼낼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