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공녀가 마치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는데, 이런 생각이 드는 이유는 순전히 제 직감 하나뿐이었으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면 논리적이고 납득 가능한 답을 주기가 어려웠다.
“그냥, 좀 이상해서 말입니다.”
“에이프릴 공녀가요?”
아도니스의 침묵은 곧 긍정이었다.
묘하게 자신이 과거에 알고 있던 에이프릴 힐 라이즈 같지가 않았다.
날카롭고 신경질적이던 시선이 늘 향했는데, 아까 전엔 길가에 굴러가는 돌을 보는 것마냥 무심했다.
아카데미 시절 얼핏 보았던 나약하고 유순한 공녀 같지도 않았고, 바라크 옆에 달라붙어 떨어질 생각도 하지 않던 공녀 같지도 않았다.
“평소와 좀 다르신 느낌이어서요.”
자신만 본 게 아니라 레르비앙도 봤다면 이렇다 할 답변이 나오겠지.
아도니스의 말에 레르비앙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내 그녀가 손에 들린 녹색의 손수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눈물을 매단 채, 제 앞에서 섰던 몇 달 전의 에이프릴을 떠올렸다.
“전하께서 다른 이를 마음에 품고 있다던데, 혹시 그 상대가.”
“아도니스 베트리체, 그대입니까?”
그 질문이 얼마나 불쾌했던지, 질문을 한 당자사는 모르겠지.
“레이디의 호의를 거절하는 것도 기사가 할 만한 행동은 아니죠.”
자신을 황태자의 옆에 있는 ‘여성’이 아니라, 단순한 ‘기사’로 본 오늘의 에이프릴은 전과는 달랐다.
“철이라도 든 건가.”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찜찜함이 가슴 깊숙한 곳에 자리 잡았다.
레르비앙이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아도니스가 화제를 돌리기 위해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레르비앙 경은 전하와 함께 계신 거 아니셨습니까?”
“아……!”
그제야 자신이 건물에서 나온 이유를 떠올린 건지 레르비앙이 다급히 궁의 후원으로 시선을 돌렸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레르비앙은 지금 아도니스에게 붙잡혀서 이런 이야기를 나눌 때가 아니었다.
“후원에 로지안 님께서…….”
자신의 집무실에 와서 불안한 얼굴을 하고 있던 하녀가 한 말이었다.
평상시에는 황태자궁으로 한 번도 걸음하지 않던 로지안이 언질도 없이 갑작스럽게 찾아온 이유는 빤했다.
바로 에이프릴 힐 라이즈가 황실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어서 온 거겠지.
황태자궁의 후원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 바로 붙어 있는 게 아니었던지라 거의 뛰다시피 걸어야만 했다.
바람이 색색 지나가는 소리가 귓전에 바로 들리고, 후원의 입구가 보이기 시작하고 나서야 레르비앙이 걸음을 멈추고는 숨을 고르면서 후원으로 다가갔다.
“그러니 제 말에 대해서 편히 생각해 보도록 하세요, 전하.”
미성이 레르비앙의 귓전을 때렸다.
작고하신 황비 전하보다 더 많은 하녀들을 데리고 온 로지안이 후원을 나서면서 레르비앙과 눈이 마주쳤다.
청록색의 깨끗한 눈동자가 뒤늦게 나타난 레르비앙을 발견하자 위아래로 가볍게 훑어보았다.
어디 감히 황실 어른에게 인사를 올리지 않느냐는 질책이 담긴 듯한 눈빛이었다.
황실 어른이라니, 웃기지도 않지.
품계도 받지 않은 정부가 어른 노릇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정신 나간 황제가 아무리 정부를 아낀다고 해도, 로지안은 공식적으로 황실의 어떤 공적 업무를 할 수 없는 존재였다.
“오늘은 그래, 어쩐 일로 늘 붙어 다니는 경께서 없다 생각했습니다.”
“…….”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고개만 꾸벅 숙이는 레르비앙에 로지안이 노골적으로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을 하고서는 그 옆을 지나쳤다.
혀를 쯧, 찬 레르비앙이 안으로 들어가자 테이블에 앉아 있는 페르포네가 눈에 들어왔다.
“전하.”
“아, 레르비앙 경.”
시선을 내리깐 채 딱딱한 얼굴을 하고 있던 페르포네가 그의 부름에 짙은 미소를 떠올렸다.
미소가 점점 진해지는 걸 봐서는 확실히 안 좋은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게 에이프릴 공녀로 인한 것 때문인 건지, 아니면 방금 왔다 간 로지안 때문인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괜찮으십니까……?”
“미친놈이 헛소리 지껄이는 게 어디 하루 이틀인가요. 괜찮지 않을 이유는 없죠.”
대체로 친절함을 잊는 법이 없는 페르포네가 이런 식으로 여과 없이 말을 꺼낼 때가 있었는데, 그때는 바로 로지안이 엮여 있을 때였다.
다우스 제국에서 로지안의 존재는 수치다.
황제가 다른 누구도 아닌 사내 정부를 두었고, 황후가 죽은 바로 다음 날 정부를 별궁으로 들어앉혔다.
황실에서 근무하는 이들 모두가 경악할 만한 일이었는데, 어렸던 황태자에게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어린 황태자가 실어증에 걸릴 정도로 말이다.
“그자가 무슨 말을 했기에…….”
“굳이 공작가와 국혼을 맺어야 하느냐는 말이었죠.”
페르포네가 앞에 있는 찻잔을 들어 올려 한 모금 마셨다.
국혼에 대해서까지 말하는 걸 봐서는 아버지의 총애를 받는다고 적잖게 기고만장해진 모양이었다.
“건방진 놈.”
페르포네가 짤막하게 비웃음을 흘렸다.
자신이 아직까지도 그날의 어리고 유약한 황태자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어머니의 장례가 치러졌던 날, 제 아버지와 로지안이 황후궁의 침실에서 무엇을 했는지를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로, 지안……! 로지안……!”
로지안의 밑에서 그의 이름을 부르며 한참 동안 흐느끼고 있던 아버지는 아내의 죽음 때문에 슬퍼하는 기색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폐하, 황후마마의 장례식인데 자리를 계속 비우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리고 자신을 발견한 로지안이 제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한 말이었다.
“괜찮다, 괜찮으니……!”
“망할.”
개 같은 과거를 떠올린 페르포네가 거칠게 욕을 내뱉으면서 마른세수를 했다.
제 몸에 그런 한심한 작자와 같은 피가 흐른다고 생각하니 죄다 뽑아내고 싶을 지경이었다.
아직까지도 살아 있는 게 영 지겨울 정도였다. 혀를 쯧, 한 번 찬 페르포네가 찻잔을 입에 갖다 댔다.
“그래서 로지안 그놈에 대해서 알아낸 건?”
“신전과 고아원에 계속 후원하고 있습니다. 고아들을 계속 고아원으로 데려오고 있고요.”
“그리고?”
“이상한 건, 막상 고아원으로 찾아가 보지 않는다는 점 정도입니다.”
“……그래?”
“그리고 신전 고아원 출신이었고, 거기서 폐하의 눈에 띄었다는 것밖에는요.”
황실 사람들이라면 다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수도 신전 고아원 앞에 버려져 일평생을 신전에서 살던 로지안 스타리유가 현 황제인 비우스의 눈에 띄어 그대로 황실로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 말이다.
“죄송합니다. 조금 더 알아보겠습니다.”
아직까지 별다른 이야기를 받아보지 못한 페르포네가 심기 불편한 기색을 보이자 레르비앙이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얼른 뭐라도 알아와 봐요. 그놈의 약점이 될 만한 것은 모두.”
페르포네의 계승식이 미뤄지고 있는 것도 죄다 로지안의 방해 공작 때문이었으니까.
페르포네 디니아 다우스에게 로지안 스타리유는 영 꺼림칙한 존재였다.
아니, 황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그자가 황실에 들어온 지가 벌써 몇 년째인가.
저와 얼추 비슷한 시간을 황실에서 지내왔는데, 늙지 않고 그대로인 외모이지 않나.
“뭔가 숨기고 있는 게 있긴 한 듯한데.”
페르포네의 말에 그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럴 게 로지안 스타리유는 황실에서 지낸 시간이 벌써 20년에 가까운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노화라고는 조금도 진행되지 않은 얼굴이었다.
본인 말에 의하면 황제의 총애가 사라지는 게 두려워서 열심히 가꾼다고 말을 하지만…….
“인간이라면 그럴 수가 없는데.”
페르포네가 작게 속삭였다.
로지안의 젊음은 인간이기를 벗어난 것처럼 보였다.
그가 계속 그런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건 신전의 도움 없이는 또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경이 조금 더 수고하도록 해요. 아니면…… 그 타미타르테라고 했던가.”
페르포네가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면서 이름을 중얼거렸다.
“로지안 전속 신관 말입니까?”
“그래, 그자 뒤를 캐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고.”
레르비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페르포네가 어서 빨리 황위를 이어받아 제국의 자랑이라 불리는 황제가 되어주길 바랐다.
레르비앙이 바짝바짝 마르는 입술을 혀로 핥으면서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전하.”
무겁고 진중한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