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전하께서 에이프릴 공녀와의 파혼을 생각하시는 거 누구보다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만…….”
문장을 채 완성하지 않았지만, 뒤에 자연스럽게 따라붙을 말이 어떤 것인지 직감했다.
이런 말을 해봤자 자신이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걸 빤히 알기에 레르비앙은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이어갔다.
“꼭 공녀와 파혼하셔야겠습니까?”
“레르비앙 경.”
“만약 따로 마음에 두신 분이 있다면 후에 제2비로 들이셔도 되잖습니까. 전하께서 그리하시겠다는데 달리 반대할 귀족들도 없을 것이고요.”
귀족들 모두가 선황처럼 사내인 정부를 두는 것보다 차라리 낫다고 생각하겠지.
“지금은 로지안을 견제할 수 있는 공작가의 힘을 빌리는 게 우선이라 생각됩니다.”
사랑하는 이를 황후의 자리에 앉히겠다고 하는 건 지금 상황에 여의치가 않았다.
“전하.”
뜻을 거두어달라는 듯한 눈빛에 페르포네가 볼 안쪽을 꾹 씹었다.
“무슨 생각이신지 제게 알려주신다면 제가 전하를 도와드리겠습니다.”
과연 그럴까.
“레르비앙 경의 뜻도, 마음도 압니다. 하지만…….”
레르비앙이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을뿐더러, 사실대로 말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 말을 한다면 과연 레르비앙이 믿어줄까.
지금 공작가에 있는 에이프릴이 진짜 공녀가 아닌 것 같다고 말을 한다면 과연 어떻게 생각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바꿔치기 된 것 같다고 한다면?
‘진짜’ 에이프릴만 찾아낸다면 어쩌면 레르비앙의 바람처럼 이뤄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3년 전부터 달라진 에이프릴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알고 있는 에이프릴 힐 라이즈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전하께서 마음을 두고 계신 분이 누군지라도 알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정말 답답하다는 물음이었다.
어느 정도의 귀족 영애인지 알아야지, 그의 수족으로서 미리 대비할 수도 있을 텐데, 레르비앙은 알고 있는 게 단 하나도 없었다.
달리 마음에 둔 이의 성별이 여성인지, 나이는 몇인지, 이름은 무엇인지, 가문은 어느 정도쯤 되는지 말이다.
“찾게 된다면 말해줄 테니 너무 재촉하지 마세요.”
조급한 자신과 다르게 여유로운 페르포네에 그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걷는 연습을 하고 있는 에이프릴의 모습의 보면서 앨런이 인상을 찡그렸다.
겉으로 볼 때는 멀쩡해 보이지만 앨런은 이미 에이프릴의 상처를 본 사람이었다.
“읏!”
목발 없이 걷는 연습을 이어가던 에이프릴이 결국 비틀거리면서 옆으로 무너지자 앨런이 재빨리 그녀에게 다가갔다.
에이프릴의 상처를 직접 봤던 것만큼, 앨런은 에이프릴의 곁에 있고 싶지 않았다.
타인의 다친 곳을 볼 때마다 과거 자신이 아팠던 기억이 그대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에이프릴의 곁에 남았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네가 그 애와 친해졌으면 좋겠어.”
이리나가 그러길 바라니까.
“괜찮으십니까?”
쓰러진 목발을 대신 주운 앨런이 에이프릴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잡고 일어서세요.”
앨런이 내민 손을 꽉 잡은 그녀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는 에이프릴이 종종 스스럼없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귀족들은 자신들보다 계급이 낮은 사용인들이 손을 대려고 하면 모욕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반면 에이프릴은 그렇지 않았다. 그건 자신이 본인을 고쳐준 버니스의 직원이기 때문에 그런 건가 하는 의문이 짧게 들었다.
“통증은 괜찮으십니까?”
“……아직 아파.”
“약은 다 드셨겠네요. 내일 진통제 더 만들어서 올게요.”
“그 사람은 언제 와?”
“버니스 님이요?”
“그래, 버니스.”
“…….”
“너랑만 유일하게 연락이 되는 것 같던데, 언제 또 여기로 오는지 빨리 물어봐.”
“…….”
“걷는 연습을 언제까지 계속 해야 하는지도.”
에이프릴의 재촉에 앨런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와 직접적으로 연락이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지만, 앨런 역시 알리샤를 통해서만 버니스와 연락을 할 수 있었으니까.
“알겠습니다. 연락 드려볼 테니 연습은 계속하시죠.”
앨런이 내미는 목발을 에이프릴이 신경질적으로 옆으로 내쳤다.
사람의 마음이 참 간사한 게, 처음은 뒤틀린 뼈만이라도 제자리를 찾길 바랐는데 뼈가 제자리를 찾으니 이제는 목발 없이 제 두 다리로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과거와 달리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다리에 에이프릴이 머리를 거칠게 헝클이다 고개를 번뜩 들었다.
“정말 성력으로 고칠 수 없어?”
에이프릴의 목소리가 다급했다.
회색빛을 띠는 푸른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했다. 아픈 다리가 언제 다 나을까라는 걱정과 의심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 듯했다.
하긴, 이미 치료하지 못한 채 한 달 넘는 시간을 허비했으니 답답하기도 하겠지.
게다가 라이즈 공작가의 애지중지하는 귀한 딸이니만큼 수도에서 그녀를 향한 헛된 소문이 이미 파다하게 퍼졌을 것이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버니스 님이 설명을 드렸잖습니까.”
“아니, 어떻게……!”
도대체 왜 성력으로 고치지 못하는 건데!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아무도 없는 별장의 정원에 쨍하게 울렸다.
별장에서는 에이프릴의 시중을 들 최소한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없는 상태였다.
그리고 앨런은 그런 별장의 유일한 외부인이기도 했다.
“성력으로 고치지 못하는 건 없다고 했잖아.”
그랬지.
통속적으로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기도 했다. 신전에서 ‘성력은 모든 걸 치료할 수 있다.’라고 알렸으니 더더욱.
문제라면 신전의 신관들이 사기꾼이라는 점일 것이다.
“사람을 고칠 수 있는 범위는 성력의 크기마다 다릅니다.”
신관들은 적은 성력의 양이라고 해도 모든 걸 고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아니었다.
갖고 있는 성력의 크기에 따라 치료할 수 있는 범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성력이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아무리 성력이 있다고 한들 죽은 사람은 되살리지 못하는 법이니까.
신전의 선전 때문에 제국 사람들은 성력을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는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짜증 나…….”
짓씹듯이 내뱉는 말에 앨런이 어깨를 으쓱였다. 짜증 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버니스는.”
“네.”
완전히 다 나은 건 아니라도 버니스에게 고마운 건 사실이었다.
실제로 그 여자가 아니었더라면 아직까지 뒤틀린 뼈를 가진 채였을 테니까.
“도대체 그 사람 정체가 뭐야?”
그리고 고마운 것과 별개로 궁금했다.
“어떤 사람이길래 성력을 가지고 있는 건데?”
신전 소속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자가 성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영 이상하게 다가왔다.
신전의 신관들은 성력을 가진 이가 남자밖에 없다고 했기 때문에 더더욱.
그 부분에 대해서 앨런은 답할 수가 없기에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그 역시 버니스에 대해 알고 있는 게 그닥 많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새삼 2년에 가까운 시간을 그녀 곁에서 지켜왔는데 정작 아는 게 많이 없다는 사실이 절절하게 느껴졌다.
“그자 밑에서 오래 있었던 거 맞지?”
“오래라고 하기엔 애매하네요. 2년이 안 됐으니까요.”
“그래?”
목발을 지탱하면서 걷는 에이프릴이 신기하다는 듯이 대꾸했다.
그래도 통증은 많이 사라졌기 때문인지 맨 처음 봤을 때보다 흥분감과 예민함이 많이 가라앉은 상태였다.
별장 정원에 있는 티테이블에 자리를 잡은 그녀가 등을 의자에 편히 기대고는 숨을 푸, 몰아 내쉬었다.
여름이라 그런지 벌레 우는 소리가 배경음악처럼 울리고 있었다.
“어떻게 알게 된 거야?”
에이프릴이 답지 않게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예상치 못한 물음에 살짝 굳은 앨런의 모습에 그녀가 그의 눈치를 살피듯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기울였다.
별장에 있는 시간 동안 말동무라고 해봤자 오라버니 한 사람뿐이었고, 사용인들이 저와 말동무를 할 이유가 없었으니 앨런의 존재는 그녀의 무료한 기분을 달래기 위해 적합한 존재였다.
“물어보면 안 돼?”
공작가의 공녀가 묻는데 답도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는 그에 에이프릴의 입꼬리가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회색 머리카락과 붉은빛 눈동자를 갖고 있는 눈앞의 사내놈은 반반하게 생긴 외모와는 다르게 꽤나 재미없는 자였다.
뭐, 그 여자를 좋아하기라도 하나? 에이프릴이 조용히 버니스의 얼굴을 떠올렸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빛났던 노을빛 눈동자는 둘째 오라비인 바라크와 똑같다고 생각될 정도였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그리 대단한 미모는 아니었다.
성력을 가진 여자와, 그 밑에서 치료를 돕고 있는 남자의 조합을 신전에서 알게 된다면 가만히 두지는 않을 텐데.
고작 안 지 2년도 안 됐다면서 옆을 지키고 있는 앨런이 에이프릴에게는 신기하고 동시에 납득이 가지 않았다.
앨런의 외모를 보면 조금 아깝다는 생각도 들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