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잿빛 머리카락이 덥수룩하게 난 상태이지만, 조금만 정돈한 모습을 보인다면 어지간한 귀족 사내놈들보다 괜찮은 얼굴일 것이다.
“왜 대답이 없어?”
“꼭 말씀드려야 합니까?”
“응. 궁금하니까.”
도도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물어보는 에이프릴에 앨런이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에이프릴과 친해지라는 버니스의 말 때문에 이러고 있지만, 가능하다면 엮이고 싶지 않은 인물이었다.
“죽을 뻔한 절 살려주신 게 버니스 님입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신전에서 도망 나왔던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가장 큰 소망은 끝까지 살아남는 거였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 죽는다고 해도 상관은 없었다.
앨런은 죽어도 신전에서 죽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으니까.
저가 만약에 신전에서 죽었다면…….
생각하고 싶지 않는 일이었다.
“죽을 뻔했다고?”
“예.”
신전 출신이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해줄 필요는 없지.
신전에서 그대로 도망 나와서 한참을 달렸던 것 같았다. 산속에서 한참을 헤매다가 결국 쓰러졌을 때 저를 발견했던 이가 이리나였으니까.
“……살려, 주세요…….”
산속에서 상처투성이의 남자가 쓰러진 걸 봤으면 놀랄 법도 했을 텐데 이리나 님에게는 그런 기척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자신을 물끄러미 보면서 짧게 고심했던 기억만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가 바로 지금은 가게로 쓰고 있던 그곳이었고.
처음에 성력이 있는 사람이 자신을 고쳐주었다는 걸 알고 얼마나 놀랐었는지.
“그 사람 생각만으로도 웃음이 나?”
“……네?”
에이프릴의 물음에 앨런이 멈칫했다.
“웃음이라뇨. 무슨 말씀이세요?”
“너 말이야.”
놀란 얼굴을 하고 있는 앨런에 에이프릴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고는 검지로 본인 입꼬리를 툭툭 건드렸다.
“너 웃었어.”
“…….”
“버니스, 그 사람 생각한 거 아니야?”
그럴 수밖에 없지.
앨런에게 있어 이리나는 구원 그 자체나 다름없었으니까.
에이프릴에게는 성력의 크기가 각자 다르기에 고칠 수 있는 범위가 다르다고 말했지만, 이리나의 성력으로 치유받은 적이 있는 자신으로서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다.
이리나는 에이프릴을 완치시킬 수 있었다.
뒤틀린 뼈도 바로잡았고, 끊긴 힘줄도 다시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신전에서 온갖 고생을 하며 성력도 몇 번 겪어봤지만 그런 막대한 양의 성력은 난생처음이었으니까.
‘대체 왜 고치지 않으시는 거지.’
이리나와 에이프릴 사이의 문제인 건지, 아니면 이리나와 라이즈 공작가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앨런으로서는 도통 알 수 없는 부분이었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더 궁금하네.”
궁금하긴 했지만, 이유 따위 상관없었다.
이리나가 살려준 목숨이니만큼 저 역시 이리나를 위해 제 목숨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뭐가 말입니까?”
“죽을 뻔했는데 살아났다며? 죽을 뻔했던 일이 뭔데?”
그 질문에 대한 답으로는 침묵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말을 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말을 꺼냄으로 다른 누군가가 알게 되는 게 싫었으니까.
앨런은 신전 고아원 출신이었다.
신전에서 그 말은,
“아실 필요 없는 부분입니다.”
신전이 행하는 인체실험 대상자였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 * *
“죽을 뻔했던 일이 뭔데?”
에이프릴이 했던 질문은 괴로운 기억을 들쑤시게 만들었다.
신전이 얼마나 흉악한 곳인지 아는 자는 신전에 소속된 이들뿐일 것이다.
신전에서 하나의 약을 만들기 위해 부모 없는 고아원 아이들을 얼마나 잔인하게 이용하는지, 그리고 장난치는지에 대해서 대다수의 제국민들은 모를 것이다.
그도 그럴 게 신전의 경비가 삼엄하고, 고아원 출신인 아이들이 달리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 않았으니까.
고아원 출신들은 여러 실험에 이용되고는 했다.
약물실험으로도 이용당하고, 상처를 일부러 만들어내서 실험체로 이용되었다.
실험당하는 도중에 죽은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가늘게나마 목숨을 붙여줄 성력이 있었으니까.
시지프스 같은 삶이었다.
돌이 굴러 떨어질 거라는 걸 알면서도 산 정상으로 돌을 굴리는 일이었으니까.
에이프릴이 먹을 진통제를 제조하고 있던 앨런의 손이 멈칫했다.
그나마 상처를 일부러 만들 때는 진통제를 잔뜩 먹이는 바람에 크게 고통은 느끼지 못했다.
그 때문에 약물 중독이 된 아이들도 많았다.
신전에서의 악몽이 떠올랐기 때문인지 앨런의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이번, 한 번만.”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아는데도 불구하고 자꾸만 진통제의 재료가 되는 약재에 손이 갔다.
진통제를 통해서 보여주는 환각이, 그리고 아무런 통증도 없이 하늘에 붕 뜨던 감각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었다.
몸은 이리나 덕분에 완벽하게 나았지만, 과거, 자신이 약물로 인해 겪었던 쾌감이 어떤 것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정신이 몽롱해지는 건 물론이거니와 악몽도 꾸지 않고 물에 몸을 맡기는 감각이었다.
“후, 이번, 진짜, 정말로 이번 한 번만.”
앨런의 숨소리가 꽤나 커지기 시작했다.
신전에서 인체실험 대상으로 이용될 때, 약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직접 보았고 그리고 신관들이 떠들어대는 걸 들었다.
진통제를 만들고 남은 약재를 쥐고 잎에 돌돌 말려고 할 때였다.
“그만.”
그의 행동을 막은 건 하얗지만 거칠고 투박한 손이었다.
바로 등 뒤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지 못한 앨런이 식은땀을 주륵 흘러내렸다.
“이리 내, 앨런.”
평상시의 무심한 어투의 목소리가 아닌 얼음처럼 차갑고 또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였다.
덜덜 떠는 손으로 앨런이 느리게 몸을 돌렸다.
차가워진 노을빛 눈동자에 희게 질린 제 얼굴이 그대로 박혀 있었다.
“이리나 님…….”
이리나였다.
* * *
“또 약에 중독되고 싶어서 그래?”
지금도 이럴 정도였으면 내가 없는 사이에도 몇 번 만들었겠네.
나한테 걸린 게 한 번이지, 자리를 비웠던 시간 동안에 안 했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아닙니다. 오해세요.”
“…….”
“그냥, 요즘 잠을 못 자서…… 그랬어요.”
붉은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차기 시작했다.
새빨간 눈동자 때문인가, 앨런의 눈물은 꼭 용암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 아래로 방울처럼 덜어지면 불똥이 떨어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울고 있는 앨런을 보면서 한숨을 무겁게 내쉬었다.
“뭐 때문에 약을 하려는 건지……. 이럴 거면 그만둬.”
성력은 모든 걸 고쳐주지만, 정신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고쳐주지 못한다는 걸 앨런을 볼 때마다 실감하고는 했다.
그가 꾸는 악몽이, 이런 식의 행동이 말이다.
“중독돼서 성력으로 낫게 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더 이상은 나도 도와줄 수 없어.”
“이리나 님.”
“이런 식으로 계속 굴 것 같으면 위험부담을 가진 채 계속 널 데리고 있을 수도 없고.”
다시금 약물에 중독된 앨런이 충동적인 행동을 하지 않으리라 보장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충동적인 행동 때문에 신전에 들키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었고.
“이리나 님, 죄송합니다. 이런 일 아, 아, 앞으로 없을 거예요.”
이번 한 번만 눈감아달라는 듯 그가 절절한 얼굴로 내 손을 붙잡았다.
“제발 이번 한 번만 봐주세요…….”
이리나 곁을 떠나고 싶지 않다는 듯한 앨런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머리가 절로 지끈거렸다.
하. 도대체 어쩌면 좋지.
이걸 한 번 더 믿어줘야 해, 말아야 해.
“이리나 님, 제발요.”
그리고 굳이 내 곁에 남고 싶어 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맨 처음 만났을 당시만 해도 아픈 몸을 이끌고 나한테서 도망치려고 했던 게 앨런이었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자기를 뒤쫓아왔냐, 사람을 보낸 거냐 하면서 발악하던 앨런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었다.
전혀 길들여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앨런이 치료를 통해서 점차 길들여지는 게 꽤 귀여워 옆에 있게 했는데…….
“두 번은 없어, 앨런.”
“…….”
“눈감아주는 건 이게 마지막이야.”
평상시 같으면 모르는 척했겠지만, 바라크와 에이프릴이 엮인 이상 이런 행동을 더는 눈감아줄 수 없었다.
“한 번 더 네가 약에 손대려고 한다면 여기서 나가는 게 좋아.”
그가 말아 쥐었던 잎을 근처 쓰레기통에 던지면서 대답했다.
“너라는 위험부담도 안고 싶지 않으니까.”
앨런의 약 제조 능력이 아깝긴 하지만, 내가 지금 공작가로, 딸로 다시 들어가게 된 이상 굳이 약 제조 일을 하면서 돈을 벌 수는 없었다.
바짝 긴장하고 있던 앨런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주어진 기회에 그는 감격스러운 얼굴이기도 했다.
“앞으로 이런 일 없게 하겠습니다.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까지 여기에 있으려고 하는 이유는 또 뭘까.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할 순 없지만, 수도 근교에서 벗어난 작은 시골마을에 자리를 잡을 정도의 돈은 벌었을 텐데.
“그래. 그래서 에이프릴 상태는?”
“많이 호전되었습니다. 지팡이로 걷는 연습도 쭉 하고 있고요. 이리나 님이 언제 본인을 보러 오냐고 닦달하는 것 외에는…….”
크게 나쁜 점은 없단 소리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