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어차피 성력으로 계속 고쳐줄 마음은 없었기에 내가 굳이 시간 내서 에이프릴을 보러 갈 이유는 없었다.
“에이프릴이랑은 제법 친해졌고?”
“별장 내 말동무가 없어서 그런지 그럭저럭 저를 편하게 여기고 계십니다.”
“그래?”
그건 또 잘된 일이네.
내가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걷는 연습을 계속하다 보면 나아질 수 있다고 그렇게 말해둬.”
“…….”
“희망을 심어줄 수 있는 말 같은 것들을 계속 해주는 게 좋겠네.”
“더는 보러 가지 않으시려고요?”
“한동안은 못 올 것 같아서.”
“……그럼 저도 못 뵈는 거잖습니까.”
“아무래도 그렇겠지?”
앨런과 내가 만날 수 있는 곳은 이곳뿐이었으니까.
“이리나 님.”
에이프릴의 상태를 알고 싶어서 잠깐 들렀던 것뿐인지라 내가 걸음을 돌리려고 할 때 앨런이 날 붙잡았다.
“왜?”
붉은 눈동자에 맺혀 있던 눈물방울은 사라지고, 조금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왜 그러는데?”
“……어디에 계시는지.”
굉장히 작은 목소리라 듣기 어려웠지만 들리기는 했다.
“제게 알려주시면 안 됩니까?”
한 번도 그런 걸 물어보지 않았던 앨런의 첫 질문이었다.
내 손을 잡고 있는 앨런의 손이 눈동자처럼 뜨겁게 느껴졌다. 내 대답에 기대하고 있는 모습에 어떤 반응을 보일 수가 없었다.
“이리나 님에게 제가 해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 저를 살려주셨던 것처럼 이번에는 제가 이리나 님께 도움이 되어드리고 싶어요.”
“…….”
“이리나 님의 곁에 계속 있을 수 없다고 하면, 어디에 계시는지만이라도 알려주시면 좋겠어요.”
절절함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였다.
새삼 안타깝고 불쌍하다는 이유로 동물을 길들이거나 쉽사리 동정을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들인다는 건 어쩌면 종속된다는 걸지도 모른다.
알리샤가 부모님께 얼마나 맹목적이었는지 봤으면서도 똑같은 실수를 하다니.
내가 난처한 얼굴로 검지로 이마를 긁적였다.
“제가 이리나 님께 해가 될 것 같다 생각하시는 건가요?”
자신을 올려다보는 걸 내가 불편할 거라 생각한 건지, 앨런이 한쪽 무릎을 굽히며 몸을 자연스럽게 숙였다.
올려다보던 내 고개가 천천히 바닥을 향해 있는 앨런에게 닿았다.
애정을 갈구하는 듯한 눈동자였다.
“이리나 님은 왜 저에 대해서 아무것도 묻지 않으세요?”
“…….”
“제가 왜 약에 손대려고 했는지, 같은 거요.”
석 달 만에 만났을 때 한 말과 비슷하지만, 톤 자체는 완전히 가라앉은 상태였다.
내가 궁금하지 않았냐, 나에 대해 알고 싶지 않느냐라는 물음에 나는 혀로 마른 입술을 핥다가 대답했다.
“네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는 것과 같아.”
“네?”
“너도 내가 에이프릴 공녀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물어보지 않고 있잖아.”
“물어본다면 알려주실 거예요?”
얼핏 보면 기대감에 찬 얼굴이었던지라 상황에 맞지 않게 피식 바람 빠진 웃음이 흘러나왔다.
“꼭 내가 물어본다면 알려줄 것처럼 말하네.”
“…….”
“네가 과거에 어떤 일을 했는지, 왜 처음 만났을 때 상처투성이에 죽기 일보 직전이었는지, 왜 약쟁이가 되었는지.”
“…….”
“누구한테 쫓기고 있었는지, 왜 쫓기고 있던 건지.”
이상한 점을 꼽자면 열 손가락이 부족한 게 앨런이었다.
“어디서, 뭐 때문에 도망친 건지도.”
앨런을 맨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처음에는 시체라고 생각했었다.
귀족가의 매질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치는 사용인들이 있어서 이해 못 할 것도 아니긴 했었다.
정돈되지 않은 머리카락과 신발을 신지 않고 도망 나와서 상처투성이인 발.
옷을 입고 있었지만 곳곳에 보이던 멍자국과 핏자국도.
“너에 대해서 말해줄 수 있어?”
“제가…… 저에 대해 말한다면…….”
“…….”
“이리나 님이 혹여나 위험해질까 싶어서…….”
결국 말하지 못한다는 의미였다.
말해줄 거라 기대한 것도 아니었고, 사실 말해준다 하더라도 듣고 싶지 않다 거절했을 것이다.
“억지로 알고 싶은 거 아니야.”
“…….”
“앨런, 나는 그냥 지금 상황이 편한 거야.”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적당한 선을 유지하고 있는 이 관계가 말이다.
아마 알리샤 다음으로 내가 가장 편하게 여기고 있는 건 앨런일지도 모른다.
만약, 시간이 더 흘러서 혹여나 그가 먼저 내게 본인의 과거를 말해주고 싶은 때가 온다면 그 마음을 부드럽게 거절하고 싶었다.
난 더 이상 누군가와 이 다우스 제국에서 깊은 연을 맺고 싶지 않다.
“앨런.”
내가 차분한 목소리로 그를 부르자, 그가 작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는 이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그는 어째서인지 상처받은 얼굴이었다.
“조금 있으면 알고 싶지 않아도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될 테니까.”
달리 나한테 바라는 게 있는 듯한 얼굴이었지만 그걸 모르는 척하며 고개를 돌렸다.
앨런이 마음에 드는 점은 내가 싫어하는 걸 억지로 요구하면서까지 바라지 않는다는 부분이었다.
“다음에 다시 올게.”
* * *
가게에서 나와 수도에 도착했을 때의 시각은 늦은 밤이었다.
그나저나 페르포네가 누구를 마음에 품고 있는지 궁금한데.
그 애가 공작가에 필적할 만한 집안의 영애인지도.
비단 황태자인 페르포네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내가 없던 황실에 대한 3년도 알고 싶었다.
파혼 이야기를 가족들에게 하지 않았던 에이프릴이니만큼 공작에게 물어볼 수는 없었지.
“그나마 알 만한 사람은…….”
레르비앙과 아도니스겠군.
물론 아도니스보다는 황태자와 24시간을 함께하고 있는 레르비앙 쪽이 알고 있을 확률이 더 높았고.
“방금 보신 거 비밀로 해주시겠습니까?”
머리카락 색처럼 달아오르던 볼과 입술에 맺혔던 붉은 핏방울을 짧게 떠올렸다.
“손수건은 가지세요.”
오늘 있었던 아도니스와의 일이 떠오르자 입가에 미소가 살짝 떠올랐다.
“다시 돌려받아야겠네.”
모르는 척 도와주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수건은 필요 없다고 했으니, 다른 핑계가 있는 게 좋겠지.
공작가로 향하려고 했던 걸음이 공작가와는 정반대에 위치한 수도 신전으로 향했다.
걸음을 바지런히 움직이자 금방 신전 앞에 도착했다.
늦은 시각인데도 신전에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몇몇 지쳐 있는 얼굴의 신관들과 아이를 안고 울고 있는 사람들까지.
신관들은 제법 온화하지만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저 단순하게 연고만 받을 생각이었는데…….
“신관님, 저희 아이부터 봐주세요! 아이 몸에 자꾸 이상한 기포가 생겨요!”
“제 아내 좀 봐주십시오, 신관님.”
아픈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아.
사람들의 우는소리에 신관들이 바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신전에서 성력을 가진 이들은 몇 없었고, 아픈 사람은 늘 생기는 법이니 아무것도 없는 신관들만 죽어 나가는 꼴이었다.
“타미타르테 님이시다!”
내 쪽으로 다급하게 달려오는 신관 하나에 고개를 살짝 기울일 찰나였다.
신전 입구를 들어오는 마차의 기척에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대주교, 혹은 교황이 탈 법할 정도로 화려하고 커다란 마차였다.
신전을 상징하는 순백의 색과 더불어 검소함을 추구하는 신전답지 않을 정도로 금붙이들이 덕지덕지 붙은 마차였다.
도대체 누가 타는 거야.
그때 마차 문이 열리면서 다급하게 내리는 남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나이 지긋한, 신전에서도 제법 지위가 있는 늙은 남자가 내릴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타미타르테 님! 빨리 오세요!”
나이는 삼십대 중후반쯤으로 보이는, 알렉시스 공작만큼이나 긴 머리카락을 가진 이였다.
허리께까지 오는 수국 같은 연보랏빛의 머리카락이 찰랑거렸다.
남자의 모습을 눈으로 좇을 때, 내 시선을 느낀 타미타르테라는 남자가 고개를 내 쪽으로 스르륵 돌렸다.
“어……?”
허공에서 정확히 마주치는 시선에 내가 멀뚱히 그를 바라봤다.
뭐야.
걸음을 완전히 멈춘 남자가 나를 바라봤다.
좀 이상한 놈이네. 연고만 받고 나가야겠어.
가볍게 생각하고 신전 안으로 걸음을 향할 때 상대의 입에서 들려서 안 될 이름이 작게 흘러나왔다.
“버, 니스 님……?”
……뭐?
연한 푸른빛의 눈동자에 충격이 그대로 물든 채였다.
내가, 지금 제대로 들은 게 맞아? 저 남자 입에서.
“버, 버니스 님.”
왜 엄마 이름이 나와……?
남자의 중얼거림에 그 옆을 지키던 성기사의 시선이 내게 닿으려고 하자 나는 로브로 얼굴을 가렸다.
“버, 버니…….”
남자는 내 이름, 정확히 따지자면 내 친어머니의 이름을 계속 부르려다가 멈추었다.
“타미타르테 님, 지금 이러실 때가 아닙니다. 어서 들어가셔야 돼요!”
“아니, 잠깐……!”
망할.
황급하게 걸음을 돌리고는 빠르게 신전을 벗어났다.
“자, 잠깐, 잠깐……!”
날 붙잡고 싶어 하는 남자가 주위 신관들에게 둘러싸여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뭐야, 도대체.”
신전에서 완전히 멀어지고, 공작가에 가까워지고 나서야 여몄던 로브를 천천히 벗었다.
놀란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친어머니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그것도 신관이.
“도대체 어머니를 어떻게 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