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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역공녀에게 후회는 필요 없습니다 (27)화 (27/109)

27화

문득 과거에 알리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리나, 이리나가 알아서 잘할 거라고 믿고 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하는 말이에요.”

나보다 머리 두 개는 더 큰 알리샤가 내 어깨를 붙잡으면서 차분하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혹여나, 혹여나…… 버니스 님의 얼굴을 알아보는 인간이 있다면.”

“무조건 도망가야 해요.”

“무조건 도망가…….”

그래, 그 말을 아직까지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바로 신전에서 뛰쳐나온 거였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말했던 도망자 신세라는 게 설마,

“신전과 연관이 있는 건가……?”

예기치 못한 불안함이 내 몸을 휘감았다.

하지만 부모님이 신전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 신전과 접점이라고는 없는 두 분이었다.

신전과 척을 질 이유는 더 없지. 개인적인 친분인가? 불안함에 외양을 바꾸게 만들던 아티팩 목걸이를 빠르게 빼냈다.

굳이 부모님에 대한 게 아니더라도, 신전과 엮여봐야 좋을 일은 없었다.

일단 내가 성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만 봐도 신전과 엮여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다는 걸 알리고 있었으니까.

* * *

“……뭐야.”

공작가를 비추고 있는 불들이 전부 꺼져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과 달리 공작저는 대낮처럼 환한 빛을 내고 있었다.

이 시각이면 전부 자고 있을 게 분명한데. 황실에서 대단한 손님이라도 오신 건가.

혹시나 파혼 이야기를 끝내고 싶었던 페르포네가 사람을 보낸 건가 싶어서 빠른 걸음으로 공작가 안으로 들어갔다.

공작가의 사병들이 바짝 긴장한 상태로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손님이 온 게 아니라 공작가 자체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듯싶었다.

지금 상태에서 공작가 안으로 들어가면 시선만 받을 게 분명하므로, 사람들 시선이 닿지 않은 곳에서 이 상황이 어서 마무리되기만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수도를 이 잡듯이 뒤져서라도.”

오금을 저리게 만들 정도로 낮고 위협적인 목소리였다.

에이프릴이 내가 자기를 밀었다고 거짓말을 했던 순간에도, 공작가에서 쫓겨나기 직전에도 들어보지 못했던 공작의 목소리였다.

이런 목소리를 들으니 은퇴했다고는 해도, 알렉시스 공작의 수식어가 왜 전쟁귀인지 알 것 같았다.

이 상황이 어서 빨리 마무리 안 되려나. 저택 뒤편에 몸을 숨기고 있으면서 발끝으로 돌을 툭툭 칠 때였다.

“이리나를 찾아오도록 해라.”

음?

“혹여나 이리나에게 위협을 가한 놈이 있다면 산 채로 내 앞에 데려와라.”

내 이름이 저기서 왜 나와……?

바짝 굳은 얼굴로 고개를 내밀었다.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알렉시스 공작의 오른쪽에는 걱정된다는 듯이 서 있는 패트릭이, 그리고 왼쪽에는 마찬가지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리안이 서 있었다.

상황을 아무렇지 않게 관망하고 있는 건 바라크 하나뿐이었다.

“진짜 아무 짓도 안 한 거 맞겠지, 바라크.”

“아, 아무 짓도 안 했다고. 사람 말을 왜 이렇게 안 믿어! 내가 그 계집애를 왜 손대.”

“그 애가 황실에서 마지막까지 함께 있었던 게 너라고 하던데.”

“그렇긴 한데 나 진짜로 걔한테 아무 짓도 안 했거든!”

억울해 죽겠다는 듯이 팔짝 뛰고 있는 바라크가 가슴을 쿵쿵 두드렸다.

“그 망할 계집애는 왜 갑자기 사라져서 사람 피곤하게 만들어!”

그러니까 지금 공작가의 사병들이 이렇게 주르륵 깔려 있는 이유가 나 때문이라는 거잖아.

“뭣들 하나. 다들 움직이지 않고.”

내가 황실에 들어간 지 한낮이었는데 시각이 자정을 넘기기 일보 직전이라 이러는 듯했다.

클리프 경이 병사들을 이끌고 수도에서 한바탕 시끄럽게 굴 거라 생각하자 벌써부터 지끈거리는 머리에 내가 냉큼 모습을 드러냈다.

“다들 여기서 뭐 하세요?”

“이리나.”

가장 먼저 내 곁으로 다가온 건 리안이었다.

“수도에서 무슨 일 있었던 건 아니지?”

“일단 이거부터 놔요.”

내 어깨를 붙잡고 있는 그의 손을 탁 내치고는 뒤집어쓰고 있던 로브를 벗었다.

“야, 너! 넌 황실에서 나갔으면 집에 처박혀 있을 것이지, 어딜 돌아다니다가 지금 들어오는 건데.”

언제는 집에서 나가라고 그렇게 난리를 부리더니 지금은 또 일찍 안 들어왔다고 난리다.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줘야 할지 모를 바라크의 말에 내가 인상을 쓰다 안으로 들어갔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괜찮고 말고 할 게 뭐가 있어요. 아무 일도 없었는데.”

잠깐 내 볼일을 보고 온 것뿐인데.

내가 무슨 바라크 손을 잡고 축제 구경을 나갔던 에이프릴만큼 어린 애도 아니었는데 과한 걱정이다.

에이프릴처럼 대하겠다고 한 말이 거짓말은 아니긴 했는지, 정말 에이프릴을 잃어버린 것처럼 사병까지 내세워 나를 찾으려고 했던 모양이었다.

수도를 쥐 집듯이 뒤져가며 나를 데리고 오라고 했던 알렉시스 공작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리 말했던 것과 달리 공작의 표정 변화는 그리 크지가 않았다.

“제가 공작가에서 도망간 거라 생각하셨습니까?”

“아버지께서는 널 걱정하셨던 것뿐이다. 말을 가려서 해.”

“딱히 틀린 말도 아니잖아요? 제가 갑자기 사라지면 난처해지는 건 라이즈 공작가가 맞으니까요.”

“…….”

“도망가는 일 없을 테니까 이런 식으로 일을 크게 만들 필요 없으세요, 아버지.”

한껏 이죽이는 내 말에 알렉시스 공작은 얄팍한 한숨도 내쉬지 않았다.

어른이라서 그런가, 아니면 밤톨만 한 어린 계집애의 이죽임은 먹히지도 않을 정도로 험난한 삶을 살아왔기 때문인가, 알렉시스 공작은 바라크나 리안처럼 감정 표현 같은 건 조금도 없었다.

이런 모습을 보면 라이즈 공작은 감정이라고는 없는 구관절 인형 같기도 했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가 싶어 걱정했다.”

“쓸데없는 걱정이십니다. 제가 어린 나이도 아니고.”

내가 나타나자 제일 먼저 사라진 건 바라크였다. 내가 들어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리안에게 몇 시간을 시달렸을 게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다들 자리로 돌아가라.”

알렉시스 공작의 명령에 모여 있던 사병들이 하나둘씩 흩어지기 시작했다.

“리안, 너도.”

“아버지.”

“어서.”

나와 공작을 번갈아 보던 리안이 작은 한숨과 함께 몸을 돌렸다.

“따라오거라.”

“…….”

귀찮네.

걱정하든 말든, 수도를 한바탕 뒤엎든 말든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모르는 척하다 몰래 들어갈 걸 그랬나.

서재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그가 몸을 돌리면서 나를 내려다봤다. 서늘한 푸른 눈동자를 피하지 않은 채 똑바로 바라봤다.

“어딜 다녀오는 길이길래 호위도 없이 혼자 움직인 거냐.”

“…….”

“모두가 널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기나 하고.”

날 걱정했다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공작가에서 날 걱정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

입에 침이나 바르고 할 거짓말에 조소가 흘러나왔다.

“걱정하다뇨. 농담치고는 재미가 없네요.”

“……재미없는 농담?”

“네. 공작가에서 절 걱정하고 있을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너는 지금 이게 농담 같으냐?”

내 말에 알렉시스 공작이 화라도 낼 것처럼 표정을 굳히다 눈을 질끈 감고는 물었다.

“집사가, 하녀장이, 리안이, 그리고.”

그가 이내 고개를 숙이자, 은회색의 긴 머리카락이 앞으로 스르륵 흘러내렸다.

보이지 않는 얼굴에 공작이 지금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걱정했다, 너를.”

“…….”

“말하지 않았느냐. 네가 이곳에 있을 동안은 너를 딸로 여길 것이라고.”

“공작님, 공작님은 절 걱정할 자격도 없지 않습니까.”

어떻게 당당하게 공작가의 몇몇이, 그리고 리안과 본인이 나를 걱정했다는 말을 뻔뻔하게 내뱉을 수 있는지 모르겠다.

공작가가 염치가 있다면 어떻게 나를 걱정한다는 말을 할 수 있겠나.

아버지 노릇이라도 하려는 꼴이 혐오스러웠다.

“이리나.”

“에이프릴이라고 부르세요.”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던 공작이 놀란 듯 날 바라봤다.

“공작님께서 제 이름을 부를 자격이 있으십니까?”

울컥울컥 치미는 혐오감과 경멸을 숨기지 못하고 그대로 드러냈다.

“본인이 제게 어떻게 구셨는지 기억하고 계신다면.”

목이 바짝바짝 말라왔다.

“이런 말을 꺼내지도 못하실 텐데요.”

걱정한다, 따위의 말을.

싸하게 식어 내리는 공작을 바라보며 마른세수를 하다 머리를 쓸어넘겼다.

“하실 말씀이 그게 다라면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로지안이 너를 만나고 싶어 한다.”

발목을 붙잡는 한마디는 의외의 것이었다.

뜬금없이 튀어나오는 로지안 스타리유의 존재에 미간을 살풋 찡그리자, 공작이 집무실 원목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초대장 하나를 내게 내밀었다.

“읽어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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