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초대장을 열고 확인한 내용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짧은 안부 인사와 더불어 알렉시스 공작이 말한 것처럼 날 보고 싶다는 말까지.
“네가 보고 싶지 않다면 굳이 만날 이유는 없다. 네 의견을 존중할 테니까.”
“…….”
왜 로지안이 굳이 나를 보고 싶어할까.
10년 넘도록 늙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는 로지안을 떠올렸다.
황제가 사내인 로지안에게 반한 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의 외모만 본다면 경국지색의 미모였으니까.
“굳이 안 만날 이유는 또 없죠.”
초대장을 반으로 곱게 접으며 말을 마저 이었다.
“그러잖아도, 로지안이 공작님에 대해 물어보던걸요.”
“…….”
“요즘은 신전에 오지 않으신다고요.”
숨을 크게 들이켜는 소리가 일순 났다.
들키면 안 될 걸 들켰다는 공작의 표정에 눈을 가름하게 떴다. 독실한 신자도 아닌 알렉시스 공작이 신전에 갈 만한 이유란 게 뭐 있을까.
“혹시.”
내 물음에 그가 움찔했다.
“어디 아프십니까?”
“그럴 리가.”
“하긴, 그럴 리가겠네요.”
알렉시스 공작도 사람이니만큼 아픈 건 당연하겠지만, 막상 몸이 안 좋은 공작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방문하겠다는 초대장은 보내놓으마.”
“그러세요.”
마지막 말을 마친 뒤, 조용히 서재 밖으로 나왔다.
로지안이 에이프릴을 따로 불러서 할 만한 이야기란 게 파혼에 대한 건가.
흠. 이마를 살짝 긁적이면서 복도의 부드러운 카펫을 밟으면서 천천히 걸어 나갈 때였다.
“아가씨. 공작님과 이야기 끝나셨습니까?”
패트릭은 이제 서재로 들어갈 모양인지 트레이 위에 물과 아주 자그마한 주머니가 올라가 있었다.
웬 주머니지. 물끄러미 보고 있을 때 패트릭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공작님께서 많이 걱정하셨습니다.”
“그런 말씀 하시네. 많이 걱정하셨다고.”
“…….”
“그리고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것도 따로 말씀드렸고.”
“……아가씨.”
안타까워하는 기색이었다. 패트릭은 마치 내가 공작가를 더는 미워하지 않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공작이 내게 아쉽지 않을 정도의 합당한 대가를 주겠다고 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어째 강요처럼 느껴지는 행동들이었다. 어서 빨리 용서하라며 등 떠미는 듯한 감정과 내색에 불쾌감을 꾹 눌러 삼켰다.
“그런데 집사장, 공작님께서는 어디 편찮으신가?”
“그럴 리가요.”
단박에 나온 부정의 말에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편찮은 것 없이 정정하십니다.”
“그래?”
“혹시 공작님을 걱정하신 겁니까?”
회색빛 눈동자가 기대감으로 반짝이자, 내가 방긋 웃었다.
“그럴 리가.”
어쩌면 사이가 괜찮아질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담은 눈동자를 내가 처참히 짓밟았다.
패트릭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이리나의 뒷모습을 보고는 올렸던 입꼬리를 내렸다.
이리나에게로 향했던 다정하고 온건한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뒤였다. 그가 조용한 걸음으로 원목의 문을 가볍게 노크했다.
“들어와.”
짤막한 허락의 소리에 패트릭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서재 안에는 한껏 피곤한 얼굴의 알렉시스 공작이 앉아 있었다. 청회색의 눈동자가 그대로 패트릭에게 꽂히자 그가 무겁게 한숨을 내쉬고는 안으로 들어오라 고갯짓했다.
쟁반에 있는 물과 작은 주머니를 책상 위에 올린 패트릭이 그의 안색을 살폈다.
심장이 천천히 굳어가는 병, 아글리티니가 발병한 이후로는 피곤함과 여러 사정들이 섞여서 공작의 얼굴에서 혈색을 찾아보기란 어려웠다.
“아가씨께서 공작님을 걱정하셨습니다.”
“이리나가?”
걱정이라고 말하기도 멋쩍을 정도로 서늘한 목소리이긴 했지만, 물어보는 것 자체가 걱정이란 감정을 담고 있는 것 아니겠나.
이리나 아가씨가 정말로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면 이 저택에 오지도 않았을뿐더러 공작님의 안부에 대해서 물어보지도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 생각이 지나칠 정도로 긍정적인 것이라고 말할지라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염치없다는 걸 알지만…… 이리나와의 관계가 전처럼 돌아가고 싶었다.
돌아가지는 못하더라도, 차갑게 내친 것을 조금이라도 용서받고 싶었다.
물론 그 마음이 풀리기 위해서는 적어도 바라크도 협조적으로 굴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긍정을 표하면서 고개를 작게 끄덕이는 패트릭에 알렉시스가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리고 그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쯤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믿지 않는 공작에 패트릭이 조금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알렉시스가 눈을 조용히 내리깔았다.
이리나를 먼저 버린 것은 자신들이었기에 그녀가 공작가를 혐오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리나가 보이는 경멸과 혐오에는 무언가 다른 게 섞여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의자에 기대고 있던 알렉시스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래, 이리나의 말이 맞았다. 안젤리카가, 자신들이 이리나를 어떻게 데려왔는지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리나의 친부, 다니엘에게서 아이를 강탈하듯이 빼어왔었다. 어떻게 해서든 지키려고 하던 남자를 돈으로 회유하고 겁박까지 했던 게 라이즈 공작가였으니까.
“공작님과 공작부인께서 원하는대로 이리나를 데리고 가십시오. 다만 원하는 게 하나 있습니다.”
어마어마한 돈이라도 달라고 하는 걸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자신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보물이 딸이라고 했으니, 그 보물에 맞먹을 정도의 큰 금액을 요구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어느 금액을 요구한다고 하더라도 들어줄 의사가 충분히 있었다.
알렉시스 공작도 잃어버렸던 막내딸을 애가 탈 지경으로 찾고 싶었고, 딸을 잃어버림으로 인해 정신을 놓아버린 안젤리카를 위해서라도 말이다.
“원하는 만큼의 금액을 부르…….”
“돈은 필요 없습니다.”
딸을 넘기는 판국에 그나마 양심이라도 찔리는 걸까 싶었지만, 다니엘이 한 말은 의외였다.
“이리나를 버리지 않고, 마지막까지, 끝까지, 딸로서 지켜주시는 것.”
마지막으로 봤던 다니엘의 표정은 돌처럼 단단한 모습이었다.
“그게 제 조건입니다.”
어떤 회유에도 넘어가지 않던 다니엘의 마음이 바뀐 건 순식간이었다. 일생을 지키면서 섭섭하지 않을 돈을 주겠다고 했음에도 거절했던 남자였다.
알렉시스가 혀로 마른 입술을 훑어 내렸다.
“그러고 보니 그가 어떻게 지내는지 물어보지를 않았군.”
“누구 말씀이십니까?”
“이리나의 친부 말이다.”
생각해 보면 이리나가 이 집으로 왔던 순간부터 신경을 끄고 있었다.
다니엘이 돈을 받지 않는다고 했지만 안젤리카가 매월 일정 금액과 약을 보내고 있었으니까. 이리나가 부친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꺼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도, 그리고 부친이 죽고 난 뒤에 공작가로 다시 돌아온 지금도 말이다.
“패트릭.”
“예, 공작님.”
“이리나의 친부에 대해서 알아봐.”
“……예?”
파리한 안색과 달리 푸른 눈동자는 서슬퍼렇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전쟁터에서 적들을 무참히 베어 죽일 때 짓던 젊은 시절과 비슷했다.
“어떻게 지냈었는지 알아야겠다.”
* * *
“타미타르테 님, 오늘 약제…….”
신관 하나가 들어오는 타미타르테에게 꾸벅 인사를 하려다 놀란 얼굴을 했다.
신의 모습처럼 곱디고운 얼굴이 굳었는데, 그 옆에 있는 성기사의 표정도 마찬가지로 딱딱하게 굳었기 때문이다.
‘황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대충 황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고 짐작한 신관이 눈치껏 자리를 비켰다.
지내는 방문을 거칠게 열어젖힌 타미타르테가 긴 연보랏빛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이 씹……!”
꽃처럼 여리고 아름다운 미모와 달리 거친 욕설이 입에서 나오려는 걸 꾹 눌러 삼켰다.
헤이즐넛과 오렌지빛 그 사이의 중단발 머리카락과 노을빛의 눈동자를 띠고 있는 모습은 분명히.
“블리스, 너도 봤지?”
신전의 성기사면서 동시에 제 호위기사이기도 한 블리스에게 묻자 그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신전 입구에서 서성거리던 여자의 모습은 분명히 버니스 데빈이었다.
“어떻게 버니스가…….”
그가 손톱을 질근질근 물었다.
조금 더 성숙해진 얼굴이었지만, 기억 속에 남아 있던 버니스 데빈 그대로였다.
그리고 어떻게 그녀가 살아 있는 거지……?
“아, 멍청한 새끼!”
자책하듯이 욕설을 거칠게 내뱉은 타미타르테가 머리를 헝클이며 주저앉았다.
“누가 듣습니다.”
“들으라 해, 시x!”
욕을 하다가도 저가 흥분한 이유가 버니스 데빈이라는 걸 신전놈들이 알게 되면 가만있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버니스 님이 돌아가신 거 확실하잖아.”
연푸른빛의 눈동자가 불안과 걱정으로 일렁이자 블리스가 고개를 작게 움직였다.
죽은 게 확실했다. 버니스 데빈의 죽음은 광장에서 이루어졌고, 그 시체는 효시되기까지 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