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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역공녀에게 후회는 필요 없습니다 (29)화 (29/109)

29화

멍청한 새끼. 타미타르테가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꾹꾹 눌렀다. 저를 붙잡는다 하더라도 따라갔어야 했다.

비록 유령에게 홀린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여자가 진짜 유령인지, 아니면 그저 단순히 닮은 여자일 뿐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닮았다고 해도 그렇게 닮기는 어려울 텐데.”

“버니스 님이 살아 계신 거라고 믿으십니까?”

“…….”

“돌아가시는 장면을 모두가 봤잖습니까. 만에 하나 목숨이 붙어 있다고 했을지라도, 신전에 그런 버니스 님을 살릴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성력을 가진 사람도 없고요.”

신전에서 그나마 큰 성력을 가지고 있는 이는 타미타르테 하나뿐인데, 그 역시 그 정도의 성력은 없었다.

그만한 성력을 가진 사람은 버니스 데빈과 함께 신전을 도망쳤던 다니엘 하나뿐이었다.

함께 도망쳤던 버니스가 붙잡혔어도 낯짝 한 번 보인 적 없던 다니엘을 짧게 떠올렸다.

타미타르테는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아직까지도 버니스의 죽음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이유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버니스 님은 돌아가셨어도.”

“…….”

“그 사람은 아직 못 찾았잖아.”

“타미타르테, 아니, 타타.”

신전에 있는 누군가가 이야기를 들을까 싶어 블리스가 입조심하라는 시늉을 했다.

성기사가 성력이 있는 신관에게 이런 행동을 하는 건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었지만, 그 역시 그럴 수밖에 없었다.

버니스 데빈은 처형되었기에 그나마 나았지, 그 사람은 아직 찾지도 못했기에 신전이 더 예민하게 받아들일 것이었다.

블리스의 말에 타미타르테가 애써 진정하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주의 산만하게 집무실을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움직이던 그가 숨을 들이켰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누구 듣는 사람 하나 없는데도 불구하고 낮춘 목소리였다.

신전에 있는 쥐새끼가 들을까 두려웠고, 혹여나 그 쥐새끼가 총대주교에게 말을 전달할까 봐도 두려웠기 때문이다.

“살아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말도 안 됩니다. 목이 잘려 나가서 돌아가신 분인데 어떻게…….”

“그 사람한테는 능력이 있잖아.”

타미타르테의 간절한 바람과 같은 말에 블리스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성력이 목을 붙여주지는 않습니다. 연금술이나 마법을 따로 할 줄 알았다면 모르겠지만.”

신전 내에서도 열람불가 서류인 신체이식법을 떠올렸다.

신전을 도망간 새에게는 성력은 있었지만, 그 외의 다른 능력은 없었다.

만약 다니엘이 연금술과 마력이 따로 있는 몸이었다면, 버니스와 도망치기 전에 신전에 묶여 있을 리가 없었을 테니까.

타미타르테의 어깨가 순식간에 아래로 축 늘어졌다.

그래, 유령에 홀린 것이 아니라 그저 닮은 여자일 뿐이라는 걸 타미타르테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버니스 데빈은 이미 죽었다. 그가 직접 보기까지 했다.

어젯밤에 보았던 그녀가 버니스 데빈이 아니라면, 그리고 지칭을 이대로 살려내지 못한 것이라면 가설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정말로 닮기만 한 여자라는 것.

다른 하나는 버니스 데빈의 자식이라는 것.

“그 사람을 찾아야겠어.”

“어제 본 사람이요?”

“혹시 모를 일이잖아.”

다급한 타미타르테의 얼굴에 블리스가 마른 한숨을 내뱉었다.

“새가, 살아 있을지도 몰라.”

새.

그건 타미타르테와 블리스 사이의 은어였다.

새를 가리키는 건 단 한 사람.

25년 전 버니스 데빈과 함께 신전을 벗어났던 다니엘을 말하는 것이었다.

“타타.”

버니스와 다니엘이 이 신전에서 도망친 뒤로 신전이 다니엘을 잡기 위해 소비한 시간이 장장 20년이 넘었다. 그로 인한 결과가 어떤 것인가.

비록 다니엘은 찾지 못하였지만, 대신에 버니스 데빈을 찾아 죽이지 않았나.

“20년 넘게 못 찾은 거면 이미 죽었다고 봐야 해.”

타미타르테를 예우하던 말이 사라졌다.

오랜 친우로, 그리고 신전에서 오래 함께한 형제로 한 말이었다.

신전에서, 새장 속의 새처럼 자라온 다니엘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뭐가 있겠나.

어디의 능력 좋은 의원이 있다는 뒷소문도 없는 걸 보면 성력 같은 건 드러내지도 않은 채 조용히 살아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버니스와 도망친 이후 모든 생활을 버니스에게 맡긴 것과 마찬가지였다.

“죽은 시체는 발견 못 했잖아. 그럼 살아 있다고 봐야지.”

“…….”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 신전에서 좀 높다 하는 인간이라면 모르는 자가 없는데, 아직까지 흔적을 못 찾은 거면 죽은 거지.”

하긴, 신전의 집요함이 보통 집요함인가.

다니엘이 죽었으면 그 시신이라도 찾아내려고 안간힘을 썼을 것이다. 물론 신전이 가장 원하는 건 다니엘의 시신보다 그를 생포해서 다시 끌고 오는 거겠지만.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만…….”

차라리 두 사람 다 모두가 죽은 게 낫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이 자꾸 머리를 괴롭혔다.

“만에 하나 살아 있다면?”

“…….”

“그리고 만에 하나 두 사람 사이에…….”

가장 생각하기도 싫은 가설에 타미타르테가 눈을 질끈 감았다.

“아이가 있다면?”

주신을 믿고 따르는 것이 이 신전에서의 생활이겠지만, 그건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이나 할 법한 속 편한 소리였다.

신전에서 온갖 일을 다 겪은 두 사람에게는 버니스가 오히려 신과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그건 다니엘에게도 마찬가지이겠지.

유일하게 새장의 문을 열어준 상대가 다른 누구도 아닌 버니스였을 테니까.

“만에 하나라도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있다면.”

타미타르테는 버니스를 위험에 노출시킨 다니엘이 원망스럽고, 위험을 자초한 버니스가 야속하지만, 그래도 그 아이에게는 죄가 없었다.

“신전보다, 로지안 그자보다 우리가 더 빨리 찾아야 해.”

제발 그 두 사람이, 아이를 가지는 것과 같은 위험한 일은 하지 않았기를 바라지만.

혹여라도 신전에 끌려와서 이용만 당할 아이를 생각하면 벌써부터 목이 갑갑했다.

“그러니까…….”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타미타르테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눈치챈 블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안도한 듯, 타미타르테가 옅은 미소를 지으면서 마른 한숨을 내뱉었다.

“타미타르테이니까, 애칭은 타타가 어때?”

기억 속 버니스가 활기찬 목소리로 말했다.

두 사람 사이의, 아니, 다니엘의 아이라면 신전에서 어떻게든 빼앗아 올 게 분명했다.

“부탁할게.”

그리고 그건 버니스가 원하지 않는 일일 게 분명하다.

하. 타미타르테가 가벼운 한숨과 더불어 근처 의자에 풀썩 앉았다.

버니스 데빈과 똑같이 생긴 사람을 보고 난 뒤로 몸이 안 좋다는 핑계까지 대가면서 황실에 가지 않고 신전 주변을 맴돌았지만, 어제 본 여자의 머리카락 한 올도 다시 볼 수가 없었다.

버니스와 관련된 사람이기를 바라면서, 동시에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기를 바랐다.

만에 하나 신전이 버니스와 다니엘의 존재에 대해서 알게 된다면 그만큼 머리 아플 일이 많이 생긴다는 것이기도 하니까.

눈을 지그시 감자, 기억 속은 여전히 웃는 얼굴의 버니스 데빈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신전의 손에서 죽던 날에도 마지막까지 웃던 여자였다.

지긋지긋하고 고통스럽기 짝이 없던 신전 속에서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사람이었다.

지난 기억들을 떠올리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려와 타미타르테가 다시금 눈을 떴다.

“들어와.”

음울함이 섞인 허락이었다.

화려한 금박이 붙은 문이 부드럽게 열리자 신관 하나가 타미타르테의 기분을 조심히 살폈다.

“무슨 일이야.”

상냥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목소리였다.

“라이즈 공녀께서 신전을 방문했습니다.”

“뭐?”

자리에 앉아 있던 타미타르테가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라이즈 공녀가? 뭐 때문에?”

“찢어진 데 좋은 연고를 받고 싶어서 온 거라고 하는데…….”

슬쩍 제 눈치를 살피는 걸 보아 공녀에게 가봐야 하지 않겠냐는 듯한 모습이었다.

“가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날 찾는 것도 아닌데, 굳이?”

“그래도 공작가를 봐서라도 타미타르테 님이 봐주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그러잖아도 자신이 황제의 정부에 들러붙어 기생한다고 생각할 텐데, 굳이 만나러 갈 이유가 무엇 있나.

그쪽에서 찾은 것도 아니고. 시큰둥한 타미타르테가 고개를 스르륵 돌렸다.

가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명하는 행동에 신관이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스르륵 타미타르테가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좀 이상하긴 하네요. 전 공녀가 신전에 온다면 치료받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긴 하지. 별장에서 요양했던 이유도 마차 사고 때문이었으니까.

“꽤 큰 사고였다고 기사에서 봤는데 특이하긴 하네요.”

다 들리는 혼잣말에 타미타르테가 은근슬쩍 제 옆에 앉은 신관을 곁눈질했다.

“장마철 마차 사고였고, 몇 달 요양할 정도로면 큰 사고였을 텐데…….”

“…….”

“어째서 신관에는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을까요?”

신전 소속이라면 누구나 가질 법한 의문이었다.

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조잘조잘 떠드는 신관에 타미타르테가 냉랭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여기 있을 건가 보지?”

언짢은 목소리에 의자에 앉던 신관이 냅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 죄송합니다. 원래 자리로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제야 휭하니 집무실을 나가는 신관에 타미타르테가 손으로 뒷목을 쓸었다.

“하아…….”

타미타르테가 한숨을 가볍게 내쉬었다.

확실히 이상하긴 하지. 지난 시간 동안 한 번도 신전을 찾아오지 않던 공작가에서, 그것도 사고의 당사자인 공녀가 찾아왔다고?

“찢어진 데 좋은 연고라.”

그가 의아하다는 얼굴을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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