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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역공녀에게 후회는 필요 없습니다 (30)화 (30/109)

30화

라이즈 공작가란 타이틀이 대단하긴 대단했다.

앞에서는 진료를 기다리고 있는 다른 제국민들과는 다르게 기다리는 것 없이 신관을 만날 수 있으니 말이었다.

신전에 온 건 이번이 처음이라 굉장히 낯설고 또 신기했다.

은은하게 울려 퍼지고 있는 성가라던가, 나란히 걸려 있는 역대 교황의 초상화라던가.

은은하게 나는 허브 향은 확실히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공녀님.”

응접실에 있을 때 들리는 목소리에 소리가 난 곳으로 몸을 돌리자 어젯밤 신전에서 보았던 남자였다.

수국을 떠올리게 만드는 연보랏빛의 긴 머리카락을 가진, 청초하게 생긴 남자였다.

긴장이 되긴 했지만, 알아본 건 돌아가신 어머니의 얼굴뿐이니 괜찮을 것이다.

“버니스 님.”

신관이 도대체 어떻게 친어머니의 이름을 알고 있는 걸까.

친어머니의 죽음에 대해서도 들은 게 없었던지라 더더욱 의문이었다. 마지막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어머니의 모습은 버니스 데빈이라는 이름도 없이 묻힌 무덤 하나였다.

그리고 억지로, 억지로 눈물을 참고 있던 친아버지의 모습까지.

“많이 기다리셨습니까? 타미타르테라고 합니다.”

“에이프릴 힐 라이즈입니다.”

예의를 차리면서 가볍게 고개를 숙이는 그에 손을 내밀었다.

그도 그럴 게 이 신관이 돌아가신 친어머니에 대해 안다고 해도, 내가 노골적으로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공녀님께서 직접 신전으로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다친 곳이 있으시다면 신관을 부르시면 되셨을 걸.”

찢어진 상처에 좋은 연고를 받고 싶다고 한 말이, 내가 다쳤다는 것으로 들리는 모양이었다.

“찢어진 상처라고 들었는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가 한 번 봐드리겠습니다.”

“아뇨, 다친 건 제가 아니어서요.”

“그럼……?”

“아는 분이 다치셔서 연고를 선물로 드리려고 합니다.”

“아아.”

기사이기도 하니, 비단 입안이 찢어진 것뿐만이 아니라 평소에 상처가 생기면 좋은 선물이 될 것이다.

“안 그래도 바쁘신데 저 때문에 신경 쓰이게 한 것 같아 죄송스럽네요.”

“별말씀을요.”

양 입술 끝은 매끄럽게 올라갔지만, 눈매는 접히지 않는 상태였다. 눈만 본다면 알면서 왜 귀찮게 불렀냐는 눈빛처럼 보였다.

패트릭에게 타미타르테라는 신관에 대해 물어보았을 때, 들은 말은 한 가지였다. 수도의 대신전에서 그나마 가장 많은 성력의 소유한 인물이라고 했었다.

동시에 수도에서 유일하게 성력을 가진 이라고도 했었고.

“참, 공작님의 몸은 좀 어떠십니까?”

인사치레로 나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말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나에 그가 슬쩍 내 쪽을 바라보다 이상한 듯 말을 붙였다.

“약혼식 전날에 쓰러지셨잖습니까.”

모르는 이야기다. 공작가로 들어와서도 듣지 못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어딘가 아프냐는 내 물음에 아무 문제 없다는 집사의 말은 순전히 거짓말이라는 소리이기도 했다.

“신관에게 보인다면 좀 나으실 텐데.”

집사의 말과 타미타르테 신관의 말에 알 수 있는 건 두 가지였다.

공작이 어딘가 아프다는 사실, 그리고 그걸 사람들에게 들키고 싶어 하지 않다는 것.

“괜찮으십니다.”

“정말 괜찮으신 거 맞으십니까? 공작가에서 매번 이완제 같은 걸 사가시던데.”

“신관님께서는 저희 아버지에 관심이 많으신 모양입니다.”

“공작님에 대한 관심이라기보단 병색이 있는 이들에 대한 관심이지요.”

그가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응접실 유리 진열장 안에 있는 연고를 꺼내는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을 때,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공녀님 역시 다치신 것은 좀 괜찮으십니까?”

곁눈질로 힐긋 바라보는 그의 의문스러운 눈동자에 내가 절로 흠칫했다.

찔릴 것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살짝 불편하게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예, 뭐. 괜찮습니다. 어물거리며 대답하려는 찰나였다.

“제법 큰 사고였다고 들었는데, 완쾌하신 걸 보아 치료를 한 신관의 성력이 대단한 모양입니다.”

어딘가 모르게 떠보는 어투였다.

아니, 노골적으로 떠보는 어투다. 내가 누구에게 치료받았는지 알아보기 위해 떠보는 말.

섣부른 말은 내 발목을 잡는 말이니만큼, 말하기 곤란할 때는 차라리 침묵을 유지하는 게 나았다.

“성력을 갖고 태어나는 이가 점점 적어지는 추세이다 보니, 인재는 곁에 두고 싶더군요.”

내가 부탁한 연고를 그가 내게 내밀었다.

“혹 공녀님을 치료한 신관의 이름을 아십니까?”

타미타르테 신관의 말처럼 성력을 가진 이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본인보다 더 큰 성력을 갖고 있는 자가 신전으로 돌아온다면 신관에게도 좋을 건 없을 텐데.

수도에서, 아니, 제국의 신전에서는 타미타르테 신관만이 그나마 성력을 가진 이였기 때문이다.

“……그걸 갑자기 왜 물어보시는지.”

“사고 당시에 났던 기사를 저 역시 보았는데, 그렇게 큰 사고를 단번에 치료할 수 있는 성력을 가진 신관은 제가 알기로는 없어서요.”

“…….”

“순수한 호기심입니다.”

청초한 인상의 미인이 눈을 살풋 접었다. 의심을 풀라는 듯 짓는 미소였지만, 내 눈에는 영 의심스럽게 다가왔다.

지금이라도 당장 당신이 어떻게 어머니의 이름을 아는 거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신관님께서는 어느 정도의 성력을 가지신 분이십니까?”

타미타르테는 성력을 가졌기에 로지안이 아끼는 자였고, 황성을 제집 드나들 듯이 드나드는 자였지만, 그리 대단한 성력을 가진 인물은 아니었다.

절대적으로 평가하면 성력의 크기는 미비하지만, 능력은 상대적인 것이므로 고위 신관으로 대우받는 것뿐이었다.

신전에는 타미타르테를 제외한 신관들 중에서 성력을 가진 이는 없었으니까.

내 질문의 의도가 그 미비한 성력에 대해 비꼰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그의 다정한 미소에 살짝 금이 갔다.

“신관님께선, 비틀어져서 밖으로 튀어나온 뼈를 고칠 수 있을 정도의 성력을 가지신 분이십니까?”

“…….”

“끊어진 힘줄을 다시 이어붙일 수 있을 정도의 성력을 가지셨습니까?”

“그 질문은 꼭, 공녀님을 치료한 자가 그 정도의 성력을 갖고 있다는 것처럼 들리는군요.”

맞다. 내게는 그런 성력이 있었으니까.

“안타깝게도 제게 그 정도의 성력은 없지만, 그 정도의 힘을 가진 이는 알고 있습니다.”

“누군가요?”

“공녀님께서도 제가 물어본 것에 대해서 답변을 안 하지 않으셨습니까.”

말해주지 않겠다는 거군. 속으로 짤막하게 혀를 차다 그를 살짝 곁눈질했다.

성력이 적은 것에 대해 어느 정도의 열등감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본인이 가진 적은 성력에 대해서 열등감도, 그렇다고 자만도 없는 평온한 얼굴로 그가 마저 말을 이었다.

“제가 아는 분은 그 성력으로 많은 분들을 도우셨죠.”

가면 같은 미소였지만, 어쩐지 비뚠 느낌이 들었다.

“그럼 그분은 돌아가셨나요?”

“아뇨.”

떨어지는 확답에 내가 멈칫했다.

그렇게 대단한 신관이 죽지 않았다면 아직까지도 신전에 있다는 소리인가?

할머니가 해주는 우화를 듣고 있는 기분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자, 타미타르테가 마저 말했다.

“떠나셨습니다.”

신관직에서 은퇴했다는 의미인가? 은퇴했다면 그게 가능한가?

“신전에서.”

영 의미 모를 말이었지만, 타미타르테는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 * *

“떠나셨습니다, 신전에서.”

그 말의 의미가 신관이 적은 지역으로 가서 제국민들에게 봉사한다는 말 같지는 않았다.

“그럼 절 고쳐주신 분이 그분일지도 모르겠네요.”

날 고쳐준 사람이 그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한 대답에 타미타르테는 ‘그럴지도 모르겠네요.’라고 짧게 대답하고 말았다.

아버지가 신전과 접점이 있다면 몰라도, 금녀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 신전에 어머니가 무슨 연관이 있다고? 머릿속에서 물음표들이 두둥실 떠오르며 나를 괴롭혔다.

알리샤에게 물어본다고 해서 대답해 줄 것 같지도 않고.

혀를 쯧, 짧게 차면서 마차가 백작가의 대문 앞에서 멈추었다.

“누구십니까?”

“에이프릴 힐 라이즈입니다. 베트리체 경을 만나고 싶어서 왔습니다.”

“베트리체 경이요?”

문지기가 움찔했다. 이곳에 있는 베트리체 경이 여럿이니 내가 누구를 만나러 왔는지 단박에 알아차리기가 어렵다는 눈치였다.

하긴 이곳에서 타인에게 베트리체 경이라고 부르는 이만 해도 세 명이었다.

가주인 베트리체 백작, 장녀인 아도니스 베트리체, 그리고 마지막 아들인 아돌프 베트리체까지.

내가 말한 이가 아도니스 베트리체라는 걸 알아차리는 눈치까지는 없는 모양이었다. 날 올려다보고 있는 문지기를 향해서 방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도니스 경을 만나러 왔습니다.”

“아, 예.”

그제야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면서 마차가 안으로 들어갔다.

문지기 둘 중 하나는 이미 들어가서 내가 왔음을 알렸으니, 누구든 나오겠지.

마차가 베트리체 저택의 마당에 멈추고 조심스럽게 마차에서 내려왔다.

“라이즈 공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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