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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역공녀에게 후회는 필요 없습니다 (31)화 (31/109)

31화

아도니스와 아돌프, 둘 중에 누가 나올까 궁금했었는데 나온 이는 아도니스였다.

베트리체 백작은 본인이 내게 보인 모습이 있으니 나오지 않는 거겠지. 짤막한 미소를 삼키면서 내가 아도니스 경을 향해 가볍게 인사했다. 내 앞까지 걸어온 아도니스 경은 평소와 달리 가벼운 옷차림이었다.

매번 봐왔던 아카데미 교복도 아니고, 익숙한 근위대의 정복 차림도 아닌 평범한 사복은 꽤나 신선하게 다가왔다.

쉬는 날인데도 연습을 하고 있었던 모양인지 그녀의 이마에서 땀이 송골송골 맺힌 상태였다.

“연락도 없이 여기까지는 어쩐 일로 오신 겁니까?”

“경에게 받아야 할 게 있는 것 같아서요.”

“받아야 할 것이요……? 아, 혹시 손수건 말씀이십니까?”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고 할 때는 언제고 지금 와서 받을 게 있다는 말을 하는 내가 조금은 우스웠다.

“농담이에요.”

“…….”

“드릴 게 있어서 왔어요.”

아도니스 경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졌다. 뭘 주고 싶어 하는지 모르는 눈치에 연고를 담은 작은 종이봉투를 흔들었다.

“이걸 드리고 싶어서요.”

어느 순간 튀어나온 아돌프 베트리체가 나와 아도니스 경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베트리체 백작가의 몇 사용인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중에서 내게 안으로 들어오라는 말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상태였다.

“그런데…….”

언제까지 서 있어야 하는 건지 몰라 눈을 데구룩 구르면서 말했다.

“다리가 아픈데 계속 서 있어야 할까요?”

그제야 아도니스 경을 비롯한 사용인들이 날 안내하기 시작했다.

“멋진 후원이네요.”

“공작가에 비할 바는 아닙니다.”

아도니스 경이 나를 안내한 곳은 베트리체 저택의 후원이었다.

공작가나 황실에는 그만큼 후원에 투자를 했으니 화려한 건 당연했다. 애당초 공작가에서 쫓겨나기 전만 해도 내 취미가 후원을 가꾸는 거였으니까.

보통 귀족가에서 후원에 관심이 많은 건 안주인을 비롯한, 가족 일원들 중 여성이지만 아도니스 경은 후원 같은 것에는 그다지 관심이 많지는 않은 듯했다. 그랬기에 후원은 비교적 조촐한 모습이었다.

멋진 후원이라는 말도 그녀는 딱히 진심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모양새였다.

후원에 있는 티테이블에 앉았을 때, 백작가의 하녀가 티 세트를 들고 왔다. 더운 날이니만큼 준비된 차는 얼음을 가득 넣은 밀크티였다.

“제게 주실 게 있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실같이 가는 바람이 후원에 불자, 아도니스 경의 붉은 머리카락이 살짝 떴다가 가라앉았다.

확실히 아도니스 베트리체는 평범한 귀족 영애와는 다른 이였다. 보통은 가볍게나마 서론을 주고받을 텐데 그런 것도 없었으니까.

목적을 빨리 해결하라는 눈치에 컵을 만지작거리다 신전에서 받아온 연고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이게 뭡니까?”

봄의 새싹 같은 연둣빛 눈동자가 종이봉투에 짧게 닿았다가 곧이어 내게로 향했다.

“연고예요. 모르는 척 가만히 있으려고 하니까 신경이 쓰여서요.”

내가 검지로 내 볼을 툭툭 건드렸다. 베트리체 백작이 손찌검한 이야기를 다시 꺼내자 그녀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야깃거리가 유쾌한 건 아니지.

베트리체 백작 본인도 그렇고, 아도니스 경도 그렇고 못 볼 꼴을 보였다고 생각할 테니까.

대대로 기사 집안인 베트리체 백작가에서 아들인 아돌프 베트리체에게 거는 기대가 무척이나 클 것이다.

그런데 정작 아들보다 첫째 딸인 아도니스 경이 두각을 보이고 있으니 영 마땅찮겠지.

하지만 제삼자의 눈으로 볼 때 그 모습이 굉장히 같잖았다.

아도니스 경이 검을 더 이상 쥐지 않는다고 해서 아돌프 베트리체가 두각을 보일 리도 없을뿐더러, 전쟁터를 겪어본 베트리체 백작이 검술 실력으로 대하는 게 아니라 아들, 딸로 대하는 모습이 영락없는 고지식한 노인네라는 걸 알게 만들었다.

“……고맙습니다, 공녀.”

자존심 때문이라도 연고를 받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도니스 경은 순순히 테이블 위에 있는 연고를 챙겼다.

“성력이 있는 신관님께 받았습니다. 바르면 금방 나을 거예요. 비단 뺨뿐이 아니라, 다치시거든 바르세요.”

“오신 김에 손수건도 가져가시죠.”

“됐습니다. 안 받겠다고 했는데 받아가는 것도 이상하네요. 그리고 손수건은 핑계란 걸 아시잖아요.”

“손수건만 핑계는 아닌 것 같네요.”

“네?”

그녀가 이내 종이봉투 안에 있는 동그란 연고를 꺼내서 가볍게 흔들었다.

“이걸 전해주겠다는 것도 결국 핑계 아닙니까?”

귀족들 특유의 돌려 말하기나 은근히 떠보는 것들에 대해 둔감할 줄 알았는데, 내 선입견이었다.

아도니스 경도 결국에 귀족이니만큼 내가 정말 순수하게 걱정이 되어서 온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손수건도, 연고도 결국 전부 핑계라는 걸 금방 눈치챈 아도니스 경을 향해 가볍게 웃었다.

생각해 보면 황태자의 근위대원인데, 누구보다 귀족들 속내 읽어내는 게 빠르겠지.

“따로 하실 말씀 있으시면 하세요.”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그럼 편하게 묻겠습니다.”

잔에 손 한 번 대지 않던 아도니스 경이 그제야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전하께서 제게 파혼을 요구하셨습니다.”

“콜록!”

“어머, 괜찮아요?”

조용하던 후원에서 아도니스 경의 사레들린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놀랄 만한 일인가? 레르비앙에게 들은 게 있을 줄 알았는데. 그녀의 낯빛이 붉은 머리카락처럼 붉어지기 시작했다.

기침을 멈추지 않는 아도니스 경에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그녀가 급히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아내고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면서 날 바라봤다.

“그걸, 콜록, 왜 저한테 말씀하십니까? 아니, 애초에 이런 걸 저한테 말씀하셔도 됩니까?”

“전하께서는 파혼 생각을 무를 것 같진 않으시고, 게다가 경께서 떠들고 다닐 분은 아닌 것 같아서요.”

어떻게 해도 페르포네의 측근이라면 근 시일 내에 알게 될 부분이었다.

페르포네 본인이 오래 기다렸으니 이제 결정 내려달라고 말을 했던 만큼 내가 미루려고 하면 파혼에 대한 이야기를 공식적으로 꺼낼 게 분명했다.

“달리 좋아하는 분이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혹시 경께서는 알고 계시나 해서요.”

물끄러미 날 바라보던 얼굴이 약간 의아한 빛을 띠었다. 내가 무슨 말실수라도 했나 싶을 때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제가 안다고 해도 말씀드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볼 위로 올랐던 홍조기가 순식간에 가라앉고,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무덤덤한 얼굴이 된 그녀에 내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겠네요.”

말할 리가 없지. 황족의 측근이 되기 위해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건 바로 무거운 입이었으니까.

내가 아도니스 경에게 파혼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던 것도 그녀가 입 가볍게 행동할 사람이 아니어서다.

그럼 어디서 알아낸담. 방법은 두 가지뿐이다. 레르비앙을 닦달하거나 페르포네를 닦달하거나.

그리고 페르포네보다는 레르비앙 쪽을 닦달하는 게 낫겠다 싶은 생각이 들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고도 건넸겠다, 소득은 없었지만 궁금한 것도 물어봤겠다, 계속 백작가에 있을 이유는 없었다.

“그럼 이만 가보겠…….”

“그 상대가 저일 거라고는 생각 안 하세요?”

그 질문을 듣자 후원이 순식간에 쥐 죽은 듯이 조용하게 변했다. 은근히 들려오던 풀벌레들의 울음소리도, 바람 부는 소리도, 백작가의 기사들이 연습하는 소리도 전부 음소거가 된 착각이 들었다.

아도니스 경이 잔을 잡지 않았더라면 시간이 멈췄다고 착각했을 정도였다.

……진짜 예상 못 한 말인데. 이런 식으로 떠보는 건 사교계의 영애들이 할 법한 말이었지, 사교계와 거리가 먼, 외골수 그 자체인 아도니스 베트리체가 할 줄이야.

내가 이걸 뭐, 어떻게 반응해야 하지. 침음을 목 뒤로 꿀꺽 삼키면서 다시 자리에 앉았다.

“예, 뭐……. 아도니스 경은 지금 상태로 봐선 연애나 사랑 같은 걸 할 생각은 없으신 듯해서요. 그래서 제외시켰어요.”

“제가 그런 거에 관심 없다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아카데미 시절부터 쭉 봐왔잖아요. 아도니스 경이 관심 있는 건 검뿐이라는 걸 남들 중에선 리안 오라버니 다음으로 제가 잘 알 겁니다.”

날이 좋으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연무장에서 검술 연습을 하던 이다.

아도니스 경이 무언가를 짝사랑한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바로 검일 것이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달리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던 페르포네의 감정이 짝사랑이면 그 상대가 아도니스 베트리체일 수도 있다.

페르포네는 강인하고 단단한 사람을 좋아했고, 아도니스는 그에 들어맞았다.

“그리고 베트리체 백작이 그 난리를 친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겠어요.”

“…….”

“아도니스 경이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걸 알면, 바로 검은 관두고 결혼하라고 하실 거 같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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