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역공녀에게 후회는 필요 없습니다 (32)화 (32/109)

32화

“하하.”

오늘 만남 동안 미소 한 줌 없던 그녀가 그제야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터뜨린 웃음의 의미는 긍정이었다.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베트리체 백작이 그럴 인물이라고 여겨지는 거겠지. 재밌는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웃던 아도니스 경의 미소가 점점 희미해졌다.

이내 꺼끌꺼끌한 모래를 입안에 삼킨 것처럼 불편해진 얼굴로 그녀가 밀크티 잔을 입게 갖다 댔다.

페르포네에 대해 알려주지 않을 거라면, 아도니스에 대해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꽤 괜찮은 사람이었고, 친분을 유지한다고 해서 나쁠 게 없는 위치와 지위를 가진 이였다.

“왜 가만히 있었나요?”

“네?”

“경의 검술 실력은 경의 아버지를 뛰어넘었다는 이야기도 돌고 있는 상태잖아요.”

제국 최초의 여기사, 그리고 동시에 최연소 황족 근위대원이었다.

최초의 여기사가 근위대원에 들어갔다는 건 다른 평범한 기사들에 비해 월등히 훌륭한 실력을 갖고 있다는 뜻이었다.

베트리체 백작과 아도니스 경이 검술로 맞붙는다면, 아도니스 경이 승리할 것이라 단언했다.

“아버지니까요.”

그리고 생각보다 진부하고 감정적인 대답이 흘러나왔다.

한때 가족이라 생각했던 공작가에 한 번 버려졌기 때문일까. 그 ‘가족’이라는 게 도대체 뭐기에 아도니스 경을 참게 만든 건지 모르겠다.

아버지는 가족인 딸을 배려하지 않는데, 왜 굳이 딸인 아도니스 경만이 참고, 가족이기에 인내해야 하는 건지도 이해 가지 않았다.

“전 일방적으로 희생만 강요하는 아버지나 가족은 필요 없다 생각합니다.”

“…….”

“세상 어느 아버지가 다른 자식을 위해서 또 다른 자기 자식이 하고 싶다는 그만두라고 말하겠어요.”

“공녀. 저희 가문의 일입니다.”

“알아요. 그냥 제 생각을 말하는 거예요.”

“…….”

“아도니스 경은 그렇게 가족을 위하고 있지만, 가족들 중에서 누가 아도니스 경을 위하고 있나요.”

마치 3년 전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아무리 내게 모질 게 굴었어도, 친딸을 찾았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서 날 뺏어왔던 공작가를 그래도 가족으로 받아들이려고 했었다.

공작가에서 8년을 지내왔으니 가족이라고 말해도 무방했다.

공작과 공작부인이 당신들을 ‘아버지, 어머니.’라고 부르라 말하였으니까.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겁니까, 공녀.”

“딱히 무슨 말이 하고 싶다는 건 아닙니다. 그냥.”

“…….”

“굳이 경만 참아야 할 이유가 있나 싶어 한 말이에요.”

아도니스 베트리체의 발목을 잡는 건 아주 많았을 것이다.

처음 검을 잡으면서 주위에서 받았을 무시와 비웃음의 시선들도 발목을 잡았을 것이고, 근위대원에 들어가기 전에도 많은 이들이 방해하고 발목을 잡으려 했을 것이다.

그녀가 최초의 여기사라는 이유로 말이다.

“누군가가 발목을 잡는다면, 그 잡는 손을 잘라 버려도 상관없지 않을까요?”

“…….”

“날 가장 위하는 건 가족이 아니라 결국 나 자신이어야 할 테니까.”

아도니스 경이 베트리체라는 성을 버리고, 가족을 버린다고 해서 핏줄이 바뀌는 것도 아닐 테니까.

“버린다고요?”

늘 참기만 했던 아도니스 경에게서는 버린다는 말에 머리 한 대를 세게 얻어맞은 얼굴이었다.

“계속 검을 잡고 싶은 거 아닌가요? 그게 가족보다 중요하다면야.”

“…….”

“가을에 건국제가 있지 않나요?”

코스모스가 활짝 피고, 잠자리가 들판을 나는 시기가 오면 다우스 제국의 건국제 한층 더 가까워진다.

건국제는 신년일을 포함해서 제국의 가장 큰 기념일과 축제였다.

즐길 것도 많고, 동시에 볼 것도 많은 시기였다. 개중 가장 흥미진진한 행사는 바로 검술 대회였다.

“거기서 우승한 자는 황실의 이름으로 소원을 들어주잖아요. 그걸 기회로 삼으면 되죠.”

“예를 들면요?”

“음…….”

예를 들면이라. 검지로 테이블을 툭, 툭, 두드리다 드는 생각에 내가 눈을 곱게 휘었다.

“새로운 성을 하사받는다던가.”

성을 버리라고 권유하는 말에 아도니스 경의 몸이 바짝 굳었다.

“결정 내리는 건 경이겠지만요.”

“공작가의 보물이라 불리는 공녀에게 이런 말을 들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네요.”

철딱서니 없는 귀족 영애가 쉽게 던지는 말이라고 생각하겠지. 귀족이 성을 버린다는 건 본인의 정체성을 버린다는 말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그건 보통의 귀족이고, 아도니스 경은 아니다. 아도니스 경의 정체성은 베트리체 가문이 아니었고, 그녀가 성취한 많은 것들은 그녀가 베트리체이기 때문에 성취하게 된 것이 아니었다.

“경이 최연소, 최초의 수식어를 갖게 된 건 베트리체라는 성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경의 노력으로 인해 갖게 된 것들이에요.”

날 빤히 바라보고 있는 아도니스 경과 시선을 마주쳤다. 공작가에서 쫓겨난 경험이 없었더라면 이런 말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예전처럼 에이프릴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을 때라면, 여타의 다른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그래도 부모님인데.’라는 말을 했을 게 분명했다.

“경께서는 제가 타인이니 쉽게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앉았던 자리에서 다시 일어났다. 아도니스 경의 고개가 살짝 들리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가족을 버리라는 말에 불쾌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는데, 묘한 얼굴이었다. 불쾌하기도 하면서 충격적이고, 동시에 이런 식의 해결방법이 신선하다는 반응.

“건국제까지 시간은 있으니 한 번 생각은 해보세요.”

나쁘지 않은 해결 방법이라 생각하면서 후원에서 걸음을 돌렸다.

* * *

“순전히 경의 노력으로 인해 갖게 된 것들이잖아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에이프릴이 앉아 있던 자리를 아도니스가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었다.

저가 검을 잡은 뒤로 그런 말을 해준 이는 에이프릴 힐 라이즈가 처음이었다.

자신이 근위대까지 들어갈 수 있었던 이유가, 베트리체 백작의 덕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

제 노력에 대해서 스스로만 알고 있으면 된다고 자신을 다독인 것과 달리, 에이프릴의 한마디가 여태까지의 노력에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다만, 에이프릴 힐 라이즈가 이런 말을 해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전하께서 하신 말씀의 상대가 그대입니까?”

과거, 공녀 본인이 제게 말을 했던 적이 있었는데……. 지금 파혼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꺼낸 걸 보면 본인이 과거에 했던 질문을 기억하지도 못하는 눈치였다.

그게 고작 몇 달 전의 일이었는데 잊었을 리도 없고. 아니면 사고 때문에 기억에까지 문제가 생겼나?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하기에 에이프릴은 정말 일상적인 모습 그대로였다.

겉으로는 바뀐 것 하나 없는데, 굳이 무언가가 바뀌었다고 하면 조금 여윈 게 다이건만, 오늘 본 에이프릴 힐 라이즈는 평소 자신이 알고 있는 라이즈 공녀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가족을 버리고, 성을 버리라는 말은 가족의 사랑을 잔뜩 받으며 자란 공녀가 그저 가볍게 던진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그 말을 꺼낼 때 짓던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날 가장 위하는 건 가족이 아니라 결국 나 자신이어야 할 테니까.”

겉으로 봐왔던 것들이 전부가 아니었나……?

자신이 모르고, 공녀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면서 리안과 바라크의 표정이 좋지 못했던 것과 연관이 있는 건가라는 생각이 천천히 들기 시작했다.

“뭔가 이상한데.”

여태까지 자신이 봐왔던 에이프릴 같지가 않았다. 그리고 전에도 한 번 이런 기시감을 느낀 적이 있었다.

언제였냐면, 늘 바라크의 관심을 받고 싶어 하던 에이프릴이 아카데미를 졸업하면서부터였다.

그때가 에이프릴을 향한 바라크의 태도가 바뀌던 시기이기도 했다.

에이프릴 힐 라이즈가 이렇게 시시각각 변하는 인물이었나.

자신을 기사가 아닌 귀족 영애로 보던 이 중 한 명이기도 했는데.

“기사이기 전에 여성이잖아요. 전하께서 그대에게 마음이 없으리란 법은 없죠.”

“도대체 전하를 어떻게 생각한 건지.”

자신보다 더 오랜 시간 페르포네의 곁에 있었으면서 전하에 대해 믿음이 없는 듯한 모습이었다.

근위대원인 자신이 신경 쓸 만한 일은 아니지만. 확실한 건 에이프릴이 마차 사고로 머리라도 크게 다친 모양인지 달라졌다.

그녀가 선물이라며 건네주었던 연고를 들고는 집 안으로 향했다.

후원을 나와서 저택으로 향할 때, 외출을 끝내고 막 저택으로 돌아온 백작부인이 아도니스를 향해 물었다.

“공녀가 왔었다면서?”

“벌써 들으셨어요?”

“그래. 온 지 얼마 안 됐는데 벌써 갔다고 하던데……. 뭐 때문에 방문한 거라니?”

“전하께서 제게 파혼을 요구하셨습니다.”

감정의 동요라고는 느껴지지 않던 차분한 목소리가 다시금 울렸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