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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역공녀에게 후회는 필요 없습니다 (33)화 (33/109)

33화

아도니스는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베트리체 백작부인은 그녀에게 대답을 들을 거라고 큰 기대는 하지 않았기에 ‘쯧.’ 가볍게 혀를 차면서 아도니스를 향한 시선을 거두었다.

“누굴 닮아서 이렇게 무뚝뚝한지 몰라.”

“어머니, 오셨어요?”

2층에서 내려오는 아돌프의 인사에 인상을 살짝 쓰고 있던 베트리체 백작부인의 낯이 환해졌다.

“아돌프, 그러잖아도 건네줄 게 있다.”

“저한테요? 뭔데요?”

“신전에서 받아온 연고인데 타박상에 좋다고 하더구나. 안 그래도 몸 쓴다고 고생하고 있는데 틈틈이 발라주렴.”

“아…….”

아돌프의 시선이 일순 아도니스에게 닿았다. 이런 연고는 2기사단인 자신보다야 누나인 아도니스 쪽에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머뭇거리고 있는 아돌프를 뒤로한 채 아도니스가 제 방으로 향했다.

받지 않는 아돌프에 받으라 종용하고 있는 베트리체 백작부인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동생에게만 저리 각별하게 구는 이유도 잘 알았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그녀가 검을 놓기를 바라는 사람이었고, 누나인 자신이 차기 가주가 될 동생의 기를 죽여놓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방으로 들어간 아도니스는 받은 연고를 입안의 찢어진 부분에다 살짝 발랐다.

그래, 에이프릴의 말이 맞았다.

‘날 가장 위하는 건 가족이 아니라 나 자신어야 할 테니까.’

가족도, 스스로도 이런 작은 연고 하나를 선물해 준 적이 없었다.

* * *

로지안의 초대를 굳이 거절할 필요가 없었기에 황실로 다시 방문하기는 했지만, 막상 도착하고 보니 잘못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게 로지안이 지내는 궁에 오면 퍽 불쾌한 냄새가 코를 찔렀기 때문이다.

뭐라 설명을 할 수 없는 묘한 냄새와 후덥지근한 공기가 몸을 휘감는 느낌이었다.

괜히 방문한다고 했나, 잠깐 후회하고 있던 찰나였다.

“그래, 몸은 완쾌한 건가요, 공녀?”

차를 직접 건네주는 그를 바라보다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앞에 놓인 향긋한 차를 한 모금 마시면서 대답했다.

“예. 아픈 곳 하나 없이 멀쩡히 다 나았습니다.”

“그것참 다행이네요. 그래도 어느 정도 경과는 더 두고 보도록 해요. 다시 아플까 봐 걱정이에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네.

나조차도 이렇게 확신하는데 알렉시스 공작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내가 슬쩍 그쪽으로 곁눈질을 하자, 공작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하긴, 날 데리고 온 이유도 이 약혼이 유지되기를 바라고 있었으니까 입 다물고 있는 게 답이긴 하지.

황실에서, 공작가의 가주로 몇 년을 지낸 공작이 저 말이 거짓말임을 간파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황제가 죽고 난다면 페르포네가 황실에서 가장 먼저 치워 버릴 인물이 바로 눈앞의 로지안이었다.

로지안은 제 목숨 연명을 위해서라도 다른 귀족가의 영애가 필요했다.

황실에서 로지안을 가장 못마땅해하는 사람은 단연코 페르포네일 텐데, 공작가와 파혼을 하려고 든다고?

사랑에 빠져서 앞뒤 분간을 못 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공작가의 힘 없이 혼자의 힘으로도 해결이 가능하다는 건가.

“요즘 공작가에 액운이 꼈나 봅니다. 안 그런가요?”

딴생각을 하고 있을 때, 머리 위로 떨어지는 로지안의 물음에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공작가라고 크게 묶어 말하는 걸 보아하니 이번 마차 사고만 뜻하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무슨 뜻인지…….”

“황태자와의 약혼식 하루 전날에는 공작이.”

“로지안 님.”

로지안의 말을 멈추게 한 건 알렉시스 공작이었다.

약혼식 하루 전날이라면…….

공작이 쓰러졌고, 몸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분명했다.

수도를 오가면서 일을 하기는 했지만, 이런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었다.

황태자와 공녀의 약혼 소식이야 제국의 경사스러운 일이니만큼 듣고 싶지 않아도 들려온 일이었지만, 그 외의 일들에 대해서는 의식적으로 신경을 끄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걱정하시는 마음은 알겠습니다만, 그 일에 대해서는 그만하시죠.”

도대체 어디가 아픈 걸까. 유독 흰 얼굴인 이유가 아파서였던 걸까.

노골적으로 그날의 일을 화두로 올리기 싫다는 걸 드러내고 있는데도 로지안은 가벼운 눈웃음과 함께 저 하고 싶은 말을 계속 이어갈 뿐이었다.

“공작이 쓰러졌던 게 걱정이 되어서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신관에게 따로 몸을 보여주지도 않으셨다면서요?”

알렉시스 공작의 눈매가 살짝 찡그려졌다.

로지안이 말하라고 해서 말하고, 말하지 말라 해서 어디 말하지 않을 인물인가.

“제가 걱정이 돼서 신관을 불렀습니다.”

“……예?”

“완쾌되었다고는 하지만, 공녀의 몸도 걱정되고요.”

“로지안 님, 신관님께서 오셨습니다.”

하필이면 재수 없게 왔다는 신관에 볼 안쪽을 꾹 씹었다. 신관에게 몸을 보여주는 건 질색이었다.

다 나았다고 말하긴 했지만, 사고를 겪은 이의 몸에 흉터 하나 없다고 생각하면 의심스러울 만한 일이었으니까.

기름칠이 잘된 문이 소리도 없이 부드럽게 열리자, 로지안이 양 입술 끝을 매끄럽게 올리며 웃었다.

눈은 접히지 않은 채 웃고 있는 걸 보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흠을 잡아내겠다는 얼굴이었다.

내 흠이면 파혼의 사유가 되었고, 더불어 알렉시스 공작의 몸 상태도 알게 되면 좋을 일이었으니까.

로지안의 웃는 얼굴은 징그럽기 짝이 없었다. 굉장한 미모였지만, 나이에 맞지 않게 젊음을 유지하고 있는 모습은 기괴하다는 표현밖에 쓸 수가 없었다.

저벅저벅 뒤에서 들리는 발걸음 소리를 들으면서 찻잔을 내려놓자, 바로 옆에 신관이 서는 기척이 느껴졌다.

“찾으셨다 들었습니다.”

……음?

익숙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긴 머리카락이 아래에서 찰랑거리는 신관의 얼굴은 나도 아는 이였다.

어머니의 얼굴을 알아본 남자, 현재 대신전에서 유일하게 성력을 가진 인물.

“오늘은 내가 아닌 이 두 사람을 봐줬으면 해서 불렀네.”

“네.”

타미타르테 신관.

고개를 자신들 쪽으로 돌린 신관의 무표정한 눈동자와 마주치자 설핏 놀람이 스쳐 지나갔다.

날 이곳에서 다시 볼 줄 몰랐다는 얼굴이었는데, 이곳이 신전이 아닌 황성이라는 걸 재빨리 자각하고는 표정을 갈무리했다.

성력이 없는 신관이어도 몸을 맡기는 건 불안할 판에, 성력이 있는 신관이라 더 불안했다.

아주 만에 하나라도 내게 있는 성력을 느낀다면 큰일이었다. 적어도 에이프릴을 이 집으로 데려오기 전까지는 내가 에이프릴이 아님을 들켜서는 안 됐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한쪽 무릎을 꿇고 날 살피려고 하는 타미타르테 신관에 내가 고개를 저었다.

“따로 신관에게 보일 정도는 아닙니다, 로지안 님.”

“하지만 공녀.”

날 어르고 달래기 위해 꾸미는 목소리에 로지안이 짓는 것처럼 입술 끝만 슬쩍 올렸다.

“괜찮습니다.”

억지로라도 신관에게 지시할 것 같은 그가 쉽게 물러설 말을 알았다.

“제가 애완 표범에게도 물려서 살아났는데, 마차 사고로 죽겠습니까.”

계속 웃고 있던 로지안의 얼굴이 쨍하게 굳는 순간이었다.

로지안의 표정이 일순 굳어졌다.

그도 그럴 게 로지안이 황실에서 키우던 표범이 페르포네를 물려고 한 것을 내가 몸을 던져 대신 물렸기 때문이었다,

혼자만의 추측이지만 로지안은 선물로 받은 표범이 물기 바란 상대는 공작가가 몇 년 만에 찾은 귀한 공녀 딸이 아니라, 후에 황위를 계승받을 어린 페르포네였으니까.

공작가의 공녀가 몸까지 던져가며 황태자를 구해줄 줄 누가 알았겠나. 로지안에게 이용만 당하다가 결국 죽임당한 표범만 불쌍하지.

어린 시절 실어증으로 인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던 시기의 페르포네를 떠올렸다.

황비 전하의 장례 이후 말문을 닫아버린 페르포네는 황실에서도 걱정 어린 존재였다.

황제는 사내놈에게 정신이 팔렸고, 그나마 멀쩡한 줄 알았던 황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이가 되었으니 말이다.

“그때도 보셨으니 아시겠지만, 저는 상처나 사고에 강한 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로지안 님.”

황실과 페르포네는 내게 빚이 있는 셈이었다.

황실의 유일한 후계를 살린 빚 말이다. 페르포네와 나이 터울도 크지 않았기 때문인지 그 애와 말동무가 된 것도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감정을 느끼지 못했던 게 아니었던 듯, 페르포네가 날 볼 때마다 한껏 미안한 얼굴로 나를 봤었던 기억이 어제 일처럼 선명했다.

본인도 빚이 있다 생각하기 때문인지 아마도 에이프릴이 원하는 전부를 들어주려고 노력했을 텐데…….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이유로 파혼을 요구한 건 굉장히 의외였었다.

“게다가 로지안 님의 시종들이 입이 가벼울 거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

“아무리 황실이라고 한들 귀족가의 여성이 아무 곳에서 몸을 보이는 건 안 되는 일입니다.”

살짝 일그러진 로지안을 향해 가볍게 미소 지으며 알렉시스 공작을 곁눈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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