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공녀에 대한 반응만 보면, 두 사람이 아카데미 시절의 절친한 친우였단 게 안 믿깁니다.”
당연하지. 자신이 아카데미 시절 함께 지내왔던 건 지금 공작가에 있는 그 공녀가 아니었으니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자신이 알던 에이프릴은 도대체 어디로 갔으며, 만약 공작가를 떠난 것이라면 왜 제게 연락 한 번 없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말이다.
제 도움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는데, 지난 시간 동안 에이프릴은 자신에게 단 한 번의 연락도 없었다.
“전하께서는 왜 라이즈 공녀와 파혼하려고 하시는 겁니까?”
질문에 대한 답을 질문으로 돌려주는 데미안에 페르포네의 눈매가 일순 꿈틀거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페르포네에 데미안이 연한 미소를 그렸다. 데미안은 에이프릴을 바라보던 페르포네를 기억한다.
연심이 가득 담겼던 눈빛이었다.
금색이 이다지도 온화한 색이라는 걸 처음 알게 된 때이기도 했다. 유년 시절을 함께 보낸 친한 누이에게 보내는 눈길이 아니었다.
에이프릴을 향하는 페르포네의 눈을 본다면, 모두가 인정할 것이다. 황태자가 라이즈 공녀를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 페르포네가 에이프릴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황태자에 데미안이 연한 미소를 그렸다.
답을 듣지 않아도 무슨 말을 할지 들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제 생각엔…….”
느린 목소리가 페르포네의 집무실에 조용히 퍼졌다. 낮디낮은 목소리에서 얼핏 쓰게 웃는 기색이 느껴졌다.
자신도 느낀 걸 저보다 더 오랜 시간을 에이프릴과 함께한 페르포네가 모를 리가 없었다.
“그 이유가 저와 공녀의 사이가 틀어진 이유일 것 같군요.”
그 말을 하면서 데미안이 고개를 들며 잘게 웃었다.
그것 봐라, 제 말 한마디에 그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지 않나.
* * *
클리프가 슬쩍 옆에서 함께 움직이고 있는 리안의 눈치를 살폈다.
다니엘 데빈에 대해 알아보고 오라는 알렉시스의 명령에 몰래 새벽같이 움직이려고 했었는데, 이렇게 리안과 함께 움직일 거라고는 예상도 하지 못했다.
“클라프 경, 아버지께서 이리나의 아버지에 대해 알아 오라고 하셨죠?”
“내가 같이 가겠습니다.”
리안이 함께 가고 싶어 할 줄이야. 조용히 알아보라고 했기에 또 걱정이 되었다.
바라크와 함께하는 것보다 낫긴 하지만, 리안이 이리나의 친부를 알아보고 함께 움직인다는 사실 자체라 클리프에게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공자님, 정말 저 혼자 움직여도 괜찮습니다.”
“제가 있어서 불편한 겁니까?”
예,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거기다 대고 긍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미 이리나와 알리샤가 함께 지내던 산속 오두막에 도착하기 직전이니 돌아가라 말하기도 애매했다.
리안이 한숨을 목 뒤로 삼키면서 보이는 오두막집의 지붕에 말에서 내렸다.
후, 클리프가 바짝 긴장한 기색으로 낡은 나무문을 바라보았다. 일주일간 문턱이 닳을 정도로 드나들었던 곳이었다.
리안은 자신을 긴장하게 만드는 게 이 집 안에 있는 수인 때문인 건지 아니면 함께 온 리안 때문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 집의 수인 때문이겠지. 맨 처음 이리나를 데리고 가기 위해 왔었을 때도 사람 여럿 죽일 것처럼 굴었던 걸 상기했다.
맨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이리나가 없었더라면 어쩌면 크게 다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문을 두드렸음에도 안에서 이렇다 할 기색이 느껴지지 않자, 클리프가 고개를 갸웃했다.
없는 건가? 문을 두드리기 위해 다시금 손을 들었을 때였다.
“누구세요?”
안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살짝 피곤한 인상의 여자에 클리프가 숨을 흡! 들이켜며 허리를 곧추세웠다. 동시에 올리브색 눈동자와 공중에서 마주쳤다.
방문객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여자의 얼굴이 매섭게 일그러졌다.
보통의 사내들보다 키가 큰 편인 클리프와 시선의 높낮이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여자는 보통의 인간들보다 신체 능력이 월등히 뛰어난 수인, 알리샤였다.
손님의 얼굴을 확인한 알리샤가 이야기 같은 건 섞고 싶지 않다는 얼굴로 문을 닫으려고 하자, 클리프가 다급하게 손을 집어넣었다.
“많은 시간을 빼앗지 않을 거다. 잠깐 물어볼 게…….”
“할 얘기 없으니까 이거 놔.”
솔직한 심정으로 당장이라도 목덜미를 물어서 뜯어 죽이고 싶은 걸 꾹꾹 참고 있었다.
참고 있던 이유는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라는 도덕상의 관념이나 제국법상의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공작가에 이리나가 있다는 이유 단 하나 때문이었다.
자신이 공작가의 기사를 물어 죽인다면 혹시나 이리나에게 해가 될까 봐, 자신이 감옥에 들어간다면 공작가를 떠난 이리나가 더 이상 돌아올 곳이 없을까 봐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잠깐이라도 좋으니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온 거다.”
클리프의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리안이 다가서며 문틈 사이로 작게 보이는 올리브색 눈동자를 바라봤다.
늑대 수인이기 때문인가, 어둠 속에서 섬광처럼 빛나는 눈동자에 리안이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꺼져.”
짐승들이 위협할 때 내는 소리가 사람에게서 나오고 싶었다.
“이리나가 필요하다고 해서 그 애를 데리고 갔으면서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공작가를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
약속을 지킬 줄 알았던 공작부인은 다니엘을 죽이고, 친딸처럼 평생 아껴줄 거라며 데리고 갔던 이리나는 10년도 되지 않아 파양당했다.
아니, 파양이라는 말도 웃기지. 애초에 이리나는 그들의 자식이었던 적이 없었다. 그들이 잃어버린 친딸의 대역이었을 뿐이지.
“공작가 놈들과 할 이야기는 눈곱만큼도 없다. 너네나 그 여자나 똑같겠지.”
이리나 인생에서 영원히 꺼지라는 말이 목 안에서 빙빙 맴돌았다.
“공녀님 부친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서 그러니 잠깐만 시간을……. 윽!”
시간을 내주면 좋겠다라는 말이 전부 완성되기도 전에 문이 부서질 듯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알리샤의 힘에 뒤로 밀쳐진 클리프가 무게 중심을 잡지 못하고 넘어질 뻔하는 걸 리안이 빠르게 그를 낚아채듯 잡았다.
“네들 무슨 염치로 다니엘을 입에 담아.”
“공자님, 조심하십시오.”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던 알리샤의 얼굴이 점점 구겨지면서 늑대의 모습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옷 위로 드러난 피부에서 머리카락 색과 똑같은 잿빛 털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수인이 본인의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흥분하면 짐승으로 돌아온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던지라 클리프가 바짝 긴장한 얼굴로 허리춤의 검집에 손을 갖다 댔다.
“양심 없는 새끼들. 다니엘이 누구 때문에 죽었는데.”
“……뭐?”
마지막 한마디에 리안이 인상을 찡그리다 저를 지키기 위해 서 있는 클리프의 몸을 옆으로 밀고는 앞으로 나섰다.
“이리나의 친부가 우리 때문에 죽었다고 말하고 싶나?”
“이제 와서 모르는 척이냐?”
모르는 척하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꼴이 우습다.
이리나를 데리고 가기 위해 한껏 짓던 미안하고 죄책감이 가득하던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도 가증스럽다고 생각했었지만, 지금은 가증스럽다 못해 역겨울 지경이었다.
짓씹듯이 내뱉는 말에 리안은 상황 판단이 되지 않았다. 알리샤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 봐서는 분명 다니엘과 공작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만 확실했다.
“다니엘이 죽은 지 언제 적인데.”
언제 적이라는 반응이 나온 걸 보면 단순히 이리나가 공작가에서 쫓겨났을 때 이야기는 아닌 듯했었다.
적어도 수년 전에, 그 아이가 공작가에 있을 때 다니엘이 죽었다는 말인 듯한데…….
그렇다면 왜 다니엘의 부고가 공작가의 귀에 들리지 않았지? 그랬다면 알리샤가 어떻게 해서든 공작가로, 이리나에게 친부의 죽음에 대해 소식을 알렸을 것이다.
어째서, 도대체 어떻게, 왜?
그런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그들의 모습에 알리샤가 기가 찬 듯 웃었다. 정말 몰라서 이렇게 물어보는 걸까.
“네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죽였잖아.”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는 리안에게 알리샤가 말을 이어나갔다.
“죽기 직전에 온 잘난 니네 공작부인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
알리샤는 아직까지도 기억하고 있었다. 다니엘을 등에 엎고 산속을 달렸던 순간을, 그리고 제 몸에 박히던 칼들도.
그래, 이리나가 공작가에 있던 시절에는 공자들도 어린 시절이었으니까 몰랐을 거라고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려고 해도 알렉시스 공작과 닮은 반반한 낯짝이, 그리고 저 몸의 반이 공작부인의 피가 흐른다고 생각하니 역겨움과 분노가 울컥울컥 치밀었다.
“내 딸이 될 네 딸의 미래를 위해서.”
알리샤가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의 얼굴과 몸이 반쯤 늑대의 형상으로 변했지만, 그 누구도 그 자리에서 뒷걸음질 칠 수가 없었다.
그녀가 하는 말이 충격 그 자체였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아닌 짐승의 앞발처럼 변한 알리샤의 손이 시선이 비슷한 리안의 어깨를 꽉 눌렀다. 악력 때문인지 고통스러웠음에도 리안은 그걸 내색하지 않고 그녀를 바라봤다.
“얼른 죽어줘.”
악몽처럼 남아 있는 기억에 알리샤의 눈에 눈물이 가득 맺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