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박힌 붉은 보석은 시데반의 눈동자로 만든 보석이다.”
사람들이 바다의 인어라고 종종 부르는 시데반의 붉은 눈동자를 박은 황금 팔찌에 숨을 헉! 하고 들이켰다.
시데반의 눈동자 하나의 가치는 고위 귀족들의 1년 예산에 맞먹는 값어치였다.
그게 한 개도 아니고, 여러 개를 박아둔 팔찌에 테란이 팔찌와 페르포네를 번갈아 봤다.
척 봐도 이십대 초반인 것처럼 보이는 사내에게 이런 어마어마한 보석이 어떻게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할 건지 말 건지 말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다른 곳으로 갈 테니까.”
눈앞에서 대놓고 다른 곳을 가겠다고 말을 하는 페르포네에, 돈이라면 영혼도 파는 테란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도련님께서 어떤 정보를 원하시는지 확실하게 말씀해 주세요. 그에 맞춰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2년 전처럼 헛수고를 한다고 해도, 이 정도 의뢰비면 받아야 할 일이었다.
일을 받아들이겠다는 길드장의 말에 찾아온 손님, 페르포네가 숨을 짧게 들이켜며 입을 열었다.
“에이프릴 힐 라이즈에 대한 정보, 라이즈 공작가에서 공녀를 다시 찾았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의 정보들 전부를.”
“예?”
특정된 기간을 원한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10년 치 정보를 전부 알아오라고 하는 건 불가능했다.
기겁하는 길드장의 얼굴에 페르포네가 방긋 웃었다.
“시데반의 눈동자를 받는 데 그 정도 값어치는 해야지.”
“거참, 지금 공녀가 스물셋으로 알고 있는데. 젊은 도련님도 영 너무하시네요.”
“그래서 안 할 건가?”
“……하긴 할 겁니다만.”
“기간은 1년을 주도록 하지. 공녀에 대한 모든 걸 알아와. 특히.”
“특히?”
테란이 페르포네의 뒷말을 앵무새처럼 따라 중얼거렸다.
“3년 전부터 지금까지에 대해서.”
아니, 정확히 따지자면 5년 전부터 종종 에피가 이상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었다.
하지만 하루, 이틀 이상하다가도 평소대로 돌아오고는 해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았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래, 정확히 따지자면 3년 전부터 에피가 완전히 이상해졌다.
말투, 목소리, 자신을 부르는 호칭, 함께 갖고 있는 추억이나 짓던 미소 전부가 저가 알고 있는 에피와 똑같은데 자신이 알고 있는 에피가 아니었다.
“실재하는 정보, 수도에 도는 소문이나 뒤에서 떠도는 가십거리 전부.”
그리고 자신이 약혼하기 원했던 건 지금의 에이프릴이 아니라.
“그녀에 대해 전부 알아오도록 해.”
자신이 알고 있던 3년 전의 에이프릴이었으니까.
제 말에 고개를 주억이는 길드장을 뒤로한 채 방을 빠져나왔다.
술집으로 위장된 길드는 새벽인데도 불구하고 손님과 길드원 몇몇이 섞여 소란스러운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사람들의 웃음소리나 가게 안을 채우는 독한 술 냄새가 코를 찔렀다.
눈을 느리게 감으며 지난 3년을 떠올렸다.
지난 3년간은 에이프릴 힐 라이즈의 말처럼 자신이 정말 미친 게 아닌가 하고 몇 번이나 의심하던 시간이기도 했다.
“도대체 뭐가 다르다고 생각되시는 건데요, 전하.”
파혼을 처음 요구했었을 때 눈물을 보이면서 저를 붙잡았던 에이프릴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 자신이 뭐라고 말했었더라.
“에피.”
가게와 골목을 벗어나면서 그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너의 전부가.”
그래, 전부라고 말했었지.
그리고 제 말에 눈물을 뚝뚝 흘리던 에이프릴의 모습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언젠가 에피가 눈물을 보인다면 눈물을 대신 흘려주고 싶을 정도로 마음 아플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날은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참 아무렇지 않던 날이었다.
슬픔과 억울함이 잔뜩 묻은 얼굴로 제 이름을 불렀었다.
“페르포네 님.”
“페르포네 님?”
이 시간에 그리고 이곳에서 들릴 리 없는 목소리에 페르포네가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스르륵 돌렸다.
조용한 시가지의 가운데서 보이는 이는.
“페르포네 님께서 이 시간에 왜 시가지에 계십니까?”
바로 에이프릴이었다.
* * *
“공작저 앞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대릴 마을을 벗어나 수도 직전까지 도착했을 때 타미타르테가 한 말에는 조용히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신전이 로지안을 위해 늙지 않는 약을 만들고, 로지안이 신전의 뒤를 봐주고 있는 상황이라면 타미타르테 역시 로지안의 감시 대상일 테니까.
성력을 가진 아버지를 찾지 못한 로지안이 죽어서도 놓지 않으려고 하는 인물은 단연코 타미타르테일 것이다.
타미타르테가 공작가와 가까이 지낸다거나, 특히 황태자의 약혼자인 공녀와 친밀한 사이인 것처럼 보이는 건 모두에게도 좋지 않을 이야기이니까.
“사람이 늙지 않는 약은 만들 수는 없죠. 그건 인간의 능력을 벗어난 일이니까요.”
“인간의 능력을 벗어난 일이지만, 다니엘 님이 갖고 있던 능력은 인간의 능력이 아니었으니까요.”
타미타르테가 불안한 듯 내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로지안을 조심하세요. 만약 다니엘과 같은 능력이 있다는 걸 안다면 그 사람은 정말로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그렇겠지.”
공작가로 걸음을 향하면서 짤막하게 중얼거렸다.
페르포네의 존재를 없애기 위해 황실에 표범까지 푼 게 로지안인데, 만약 내가 아버지와 같은 능력을 갖고 있다는 걸 안다면 어떻게 해서든 이용하려고 들 게 분명했다.
타미타르테 신관에게는 공작가의 밑에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으나, 그래도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공작가의 밑에 있는 1년은 어떻게든 넘긴다고는 하지만, 그 뒤는?
들키지만 않으면 괜찮겠지. 속으로 작게 중얼거릴 때였다.
“에피.”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애칭에 공작가로 향하려던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이 시간에, 그리고 이곳에서 내 애칭이 갑작스럽게 들렸다.
뒤따라오는 말은 너무 작아 들리지 않았다.
진짜 내 이름의 애칭도 아니었지만, 오랜 시간 동안 에피라고 불렸던 기억 때문인지, 날 부르던 이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에이프릴로 살아온 지난 시간 동안 날 에피라고 부르는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바로.
“페르포네 님?”
로브를 쓴 채 어둠 속에서 서 있는 남자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에피, 라는 말은 날 부른 게 아니라 혼잣말인 듯했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던 남자가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짙은 호박색을 띠고 있던 눈동자에 마치 태양이 떠오르는 것처럼 원래의 환한 금빛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나 역시 그가 이곳에 있을 줄 몰랐던 것처럼 페르포네 역시 이 시간의 시가지에서 날 보리라고 예상치 못한 얼굴이었다.
“페르포네 님께서 이 시간에 왜 시가지에 계십니까?”
“내가 해야 할 말을 공녀께서 하고 있군요.”
그가 내 주변을 슬쩍 둘러보다 어처구니없다는 듯 실소를 흘렸다.
황실에서, 그리고 어린 시절부터 쭉 봐왔던 다정다감한 페르포네와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
“공작은 알고 있습니까? 공녀가 호위도 없이 위험하게 이리 혼자 다닌다는 걸요.”
“그러는 레르비앙 경은 알고 있나요? 전하께서 이리 혼자 다니시고 있다는 걸요.”
한마디도 지지 않고 말하는 나에 그가 입을 꾹 다물다가 고개를 팩 돌렸다.
그나저나 페르포네가 이 시간에 뭐 때문에 혼자 나온 거지? 로브를 뒤집어쓰고 나온 쪽을 보면, 시가지 내에서도 술집이 즐비한 곳인데.
그것도 정보 길드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페르포네가 길드를 달리 찾을 만한 일이 뭐가 있다고. 여타의 평범한 귀족이나 부상도 아닌 제국의 황태자라면 굳이 길드를 찾는 것이 아니라 밑의 수족을 시켜 알아보게 했을 것이다.
먼저 걸음을 움직이기 시작하는 페르포네에 내가 슬그머니 그의 곁으로 붙었다.
“레르비앙 경 몰래 알아봐야 할 게 있으셨나 보네요.”
“…….”
“참 시간이 빨리 흘렀다 싶네요. 전하께서 비밀을 만드는 나이가 되셨다니.”
어렸을 때만 해도 내 옆에 떨어지지 않고 조잘조잘 떠들던 애였는데. 옆에 꽂히는 시선에 내가 그를 보다 짤막한 웃음을 흘렸다.
이제는 반대가 되어버렸네.
옆에서 떠들어대는 게 내가 될 줄이야. 그도 그럴 게 3년 만에 만난 데다 기억 속에 남아 있던 페르포네가 영 바뀐 모습이라 신기했다.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니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은데 물을 수가 없어서 으음, 짤막한 탄식을 흘렸다.
들키지 않는 선에서 에이프릴과의 관계가 어땠는지도 물어보고 싶었고, 로지안과 신전의 관계에 대해서도 혹여나 알고 있는 게 있는지도 물어보고 싶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내가 큼, 헛기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저랑 파혼하고 싶어 하시는 이유는 달리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그 이유 하나 때문인가요?”
“공녀께서는 내 말을 참 못 믿는 것 같네요.”
“다른 이유가 있다면 솔직하게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다 싶어서요.”
“그렇게 울었으면서 또 듣고 싶은 겁니까?”
“네?”
내가 정말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조금은 징그럽다는 듯한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묘하게 마땅찮은 빛을 띠고 있는 황금빛 눈동자에 내가 주춤했다.
두 사람 사이에 파혼에 대한 이야기 말고 다른 무언가가 있었나?
내가 머뭇거리자 그가 말을 마저 이었다.
“공녀가 내가 알고 있던 공녀 같지가 않아서.”
예상 못 한 말이 무겁게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