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시선을 피하지도 못한 채 그를 놀란 얼굴로 페르포네를 바라봤다. 페르포네의 얼굴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혼란스러움도, 마냥 불신하기만 하는 의심의 눈초리도 없었다.
지금 내 맞은편에 서 있는 페르포네 디니아 다우스는 모르는 사내였다.
내게 늘 향하던 미소와 다정다감한 눈빛이 없는, 아무런 관계 없는 타인보다 못한 이를 보는 눈동자였다.
“꼭 다른 누군가가 공녀를 연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공작가의 사람들을 제외한 타인에게 들어볼 거라 생각하지 않았던 말이었다.
에이프릴이 나와 똑같이 굴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누구보다 내가 잘 알았다.
말투, 짓는 표정, 사소한 습관과 더불어 목소리까지 똑같이 따라 했던 게 에이프릴이었으니까.
나를 완전히 똑같이 따라 하게 만들고 난 뒤에 공작가에서는 나를 쫓아냈었다.
에이프릴이 정말로 마음먹고 사람들을 속이려고 했다면, 눈치챌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한데…….
들켰나? 예상하지 못한 말에 심장이 풍랑을 만난 조각배처럼 속절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뭐가 다른데요?”
침착함을 유지하는 척 웃으며 물었지만, 목소리의 끝이 잘게 떨렸다.
페르포네가 인형같이 예쁘게 빚은 얼굴이라 생각했는데, 감정이라고는 없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정말로 인형이 사람인 척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날 빤히 바라보고 있는 금빛의 눈동자가 점점 침잠되기 시작했다.
“말했잖아요, 그때도.”
고저 없는 목소리에 떨리던 심장이 조금씩 진정되기 시작했다.
“전부라고.”
숨을 흡, 하고 크게 들이마셨다.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페르포네를 바라보고 있을 때 그가 조금 피곤한 듯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면서 대답했다.
“본인이 물어본 거니까 저번처럼 울지 마요. 난처해지기 싫으니까.”
전에도 에이프릴이 페르포네에게 이런 질문을 했었구나. 그리고…… 그때도 페르포네는 에이프릴에게 ‘전부’라고 말을 했구나.
강제로 끊어진 인연에 나를 아직까지 기억해 주는 사람이 있구나.
나와 에이프릴을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 남아 있었구나. 가슴 한구석이 아리게 저려왔다.
수도로 내려오고, 에이프릴의 대역을 하게 되는 1년 동안은 이런 감정은 느끼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었기에 더더욱.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나에 페르포네가 작은 한숨을 내쉬면서 다시 걸음을 움직였다.
“물론 공녀 말처럼 내가 아버지를 닮아 정신병에 걸린 걸 수도 있겠지만요.”
에이프릴이 그런 소리를 했다고? 걔는 도대체 무슨 정신머리로……!
황족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당장 목이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을 한마디였다.
미친 것. 페르포네를 마음에 품었다고 말할 때는 언제고, 그 앞에서 정신병 이야기를 운운하는지.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한 말이기에 페르포네는 충격도 적잖이 받았을 것이다. 이걸 미안하다고 말을 해야 해, 말아야 해.
내가 한 말이 아니기 때문에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다라는 이유가 아니었다.
에이프릴이 다시 공작가로 돌아오게 됐을 때 페르포네에게 그런 말을 또 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으니까.
“……그때는 제가 제정신으로 한 말이 아니어서……. 죄송합니다, 전하.”
“미안해할 필요는 없어요.”
크게 불쾌한 기색이 없는 어투에 내가 조금 의아한 얼굴을 했다.
내 시선을 느낀 모양인지 날 보던 그의 얼굴에 살풋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게 말함으로 인해서 공녀가 내가 알고 있던 에피가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으니까.”
황실로 향해야 하는 걸음이 공작가로 향하자 내가 멈칫했다.
“전하, 황실은…….”
“시간이 늦었으니 공작가까지 데려다주겠습니다.”
“…….”
“아직은 약혼자이기도 하니까요.”
공작가로 향하는 동안 길거리에 저벅저벅 걷는 발자국 소리만이 조용히 수면 위에 파문이 일 듯 퍼졌다.
페르포네에게라면 말해도 되지 않을까?
어차피 1년 후에는 내가 에이프릴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는 상황이 올 것이다.
그걸 생각한다면 페르포네에게만큼은 사실대로 말하는 게 좋지 않을까?
묵묵히 앞을 바라보며 걸어가고 있는 그를 곁눈질했다.
공작가의 화려한 대문이 보일 때 내가 조용히 물었다.
“그렇다면 파혼 뒤에는 기억 속 에이프릴 공녀를 찾으려고요?”
“…….”
“황실 사람들 모두가 전하를 이상하게 생각할 겁니다.”
아비를 닮아 미쳤다는 이야기가 더 돌겠지. 과거 페르포네가 실어증을 겪었던 적이 있었던 만큼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이 황실에, 아니, 어쩌면 제국 전역에 돌지도 모른다.
“기억 속 에이프릴 공녀를 찾는 게 아니죠.”
내가 틀린 말을 하기라도 했는지, 페르포네가 정정했다.
“진짜 에이프릴을 찾는 겁니다, 공녀.”
“푸핫!”
단호하게 말하는 그에 내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다 이내 시원한 웃음을 터뜨렸다.
박장대소까지는 아니더라도 어깨를 들썩이면서 잘게 웃음을 흘리다 후, 숨을 내뱉었다.
내가 진짜 에이프릴이라니. 일평생을 대역으로 살아오고 있었는데, 페르포네에게만큼은 내가 ‘진짜’라는 사실이 너무 놀라웠다.
그리고 동시에 고맙기도 했다.
갑자기 터진 웃음에 벙찐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그를 향해 대답했다.
“열심히 찾아주세요.”
페르포네에게만큼은 먼저 말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지만, 그 욕심을 삼켰다.
조금 더 상황을 두고 보고 말할 수 있을 때 말해줘야지.
그리고 그건 멀지 않은 미래가 될 것이다.
동이 트기 시작함을 알리는지 까만 어둠이 서서히 옅어지기 시작했다. 트이는 시야에 페르포네의 놀란 얼굴이 더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이제 혼자 갈 수 있으니 얼른 황실로 돌아가 보세요, 전하.”
“…….”
“레르비앙 경에게 들키지 않으려면요.”
내가 눈을 가볍게 찡긋하고 몸을 돌린 그 순간이었다. 앞서 나가려던 몸이 움직여지지 않고, 차가운 손이 내 손목을 잡고 있었다.
나보다는 훨씬 더 커지고, 전과는 달리 거칠어진 감촉이 살갗에 선명하게 느껴졌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손을 보다 고개를 들었다.
오늘 페르포네의 여러 모습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무감각하던 얼굴도, 평소와 같은 옅은 미소를 짓던 얼굴도, 놀란 얼굴도.
3년 만에 제법 다채로운 표정을 보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페르포네가 보여주는 모습은 조금 당황스럽고 의외의 얼굴이었다.
살짝 화가 난 얼굴에 내가 퍽 걱정스레 물었다.
“왜 그러세요, 전하?”
화가 난 것 같기도, 무너질 것 같기도 한 얼굴이었다.
“열심히 찾아주세요.”
평소 같았으면 그 말이 비꼬는 것처럼 들렸을 것이다. 에이프릴이 아비를 닮아 정신병이 발병이라도 되었느냐고 물어보았던 적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저 말이 마냥 나쁘게 들리지만은 않았다.
에이프릴이, 에피의 모습으로, 자신이 알고 있는 모습으로 웃고 있었다.
마냥 저를 어린 동생 보듯이 보던 그 얼굴이었다. 지난 3년 동안 점점 퇴색된, 잿빛이 되려고 했던 제 기억을 다시 푸르고 선명하게 만드는 미소였다.
“이제 혼자 갈 수 있으니 얼른 황실로 돌아가 보세요, 전하.”
“…….”
“레르비앙 경에게 들키지 않으려면요.”
그리고 자신과 비밀을 만들 때면 가볍게 찡긋 웃어 보이던 모습까지.
3년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그리고 앞으로는 보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그 얼굴이 몸을 돌리면서 사라졌다.
저 미소를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가 3년 전이었다.
저 미소를 보여준 뒤 다시금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페르포네가 저도 모르게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아래로 묶은 베이지색의 머리카락이 일렁이는 파도처럼 찰랑거렸다.
접촉에 놀란 듯 떠지는 청회색의 눈동자가 제 시야에 그대로 박혔다.
“왜 그러세요, 전하?”
당혹감과 불안함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다시 밀려오는 건 어렴풋한 분노였다.
“전하?”
진짜 에피가 아니면서, 에피처럼 웃지 않기를 바랐다.
“……그렇게 웃지 마.”
“네?”
무심결에 튀어나온 말에 그녀가 머뭇거리면서 손으로 자신의 볼을 만지작거렸다. 방금 자신이 지었던 미소가 이상했나? 싶어 하는 모습이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에이프릴의 모습에 페르포네가 볼 안을 세게 씹었다.
공녀가 매번 에이프릴의 흉내를 낼 때마다 느꼈던 분노였으나, 이번에는 미묘하게 다른 분노였다.
“전하?”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가 이상하게 느껴지는 건지 에이프릴이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왔다.
평소에는 페르포네가 거부하고 피했기 때문에 제 몸에 손을 대는 것도 머뭇거렸었는데, 오늘은 아주 자연스럽게 제 몸에 손을 대는 그녀에게 페르포네가 숨을 멈추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손길이었다. 다정하고 부드러운 손이 이마를 살짝 가리고 있는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면서 물었다.
그리고 신분을 떠나 서로를 아주 편하게 여기던 옛날처럼 물었다.
“갑자기 왜 그래? 어디가 불편하기라도 해?”
걱정 어린 목소리에 움찔한 페르포네가 그녀의 손을 빠르게 내치고는 도망치듯이 자리를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