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전처럼 ‘자신이 알고 있던 에이프릴의 흉내를 내고 있네’라는 생각 같은 게 들지 않았기에 더욱 무서웠다.
방금 전 본 에이프릴 힐 라이즈의 모습은 정말로 그가 기억하고 있는 예전 공녀의 모습이었으니까.
“미치겠네…….”
에이프릴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뛰고 나서야 페르포네의 걸음이 점차 느려졌다.
자리에 우뚝 멈춘 그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괜찮으세요, 전하?”
자신 대신 표범에게 물려 피를 뚝뚝 흘리던 어린 시절의 에이프릴을 떠올렸다. 맨 처음 만나게 됐던 순간도, 그리고 지난 시간 함께 지내왔던 에이프릴의 모습이 느리게 스쳐 지나갔다.
지난 3년의 시간 동안 에이프릴은 저가 모르는 사람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오늘의 에이프릴은 또 자신과 함께 시간을 보내왔던 이처럼 보였다. 3년 만에 처음으로 느끼는 감각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페르포네는 두려웠다. 이건 에이프릴이 사라지기 전에 보였던 전조현상과 마찬가지였으니까.
과거에도 이런 식으로 주에 두어 번씩 에이프릴이 이상하다고 생각됐던 적이 있었다. 그게 점차 찾아지다 어느 순간 사라졌던 에피를 생각하면……
“하.”
황성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페르포네가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함께 지내왔던 에피가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 방금은 영락없는 에이프릴이었다.
장난을 칠 때 눈가를 살짝 찡그리면서 웃는 얼굴도, 어린 동생을 놀리는 듯한 개구진 목소리도 말이다.
“내가, 진짜 미친 건가.”
아버지인 황제의 정신병이 정말로 유전이어서 저한테도 발병되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되었고, 동시에 두려웠다.
여태까지 모르는 척해왔던 공녀에게, 한순간 겹쳐 보았다는 이유만으로 혹시라도 마음을 주는 일이 생기게 될까 무섭고 두려웠다.
어린 시절 저를 덮치려고 했던 표범보다, 어머니의 장례식날 아버지와 관계를 맺던 로지안과 눈이 마주쳤던 그 순간보다 지금이 더 무서웠다.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에이프릴의 대역인 척하고 있는 가짜가 아닌, 페르포네는 저와 함께 시간을 보내었던 진짜 에피를 만나고 싶었다.
“보고 싶어, 에피.”
흔적도 없이 사라진 첫사랑을 그는 어떻게 찾아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 * *
“거참.”
의뢰비 대신으로 받은 시데반의 눈동자를 박은 팔찌를 만지작거리던 테란이 골이 아픈 듯 앓는 소리 비슷한 것을 냈다.
어마어마한 보수를 받았으니 한 건 물었다는 생각이 들 법도 한데…… 이번 일은 꽤 머리 아픈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맡은 일 많이 어려워서 그러세요?”
“많이 어렵다고 해야 하나……. 저번에도 비슷한 내용으로 일을 받았던 게 떠올라서.”
“같은 내용이면 전에 알아봤던 거 정보로 주면 되잖아요?”
뭐가 문제야. 테란의 앞에 서 있는 길드원이 영 이해 못 하겠다는 얼굴을 했다.
“저번에도 건진 게 없어서 그러니까 그렇지. 근데 영 이상하네. 같은 의뢰를 하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물론 먼저 의뢰를 한 사람은 2년 전쯤에 의뢰를 하기는 했지만.
“무슨 의뢴데요?”
팔찌를 금고에 넣고는 단단히 잠근 테란이 앞의 길드원에게 말했다.
2년 전에도 알아본 건 눈앞의 있는 이 녀석이니만큼 이번에도 이 녀석이 하게 될 게 분명했다.
“에이프릴 힐 라이즈에 대해 알아봐야 해.”
“아.”
전에 똑같은 의뢰를 받은 적이 있었던 길드원의 표정이 살짝 찡그려졌다. 그때도 말도 안 되는 일을 시키는 바람에 얼마나 뺑뺑이 쳤는지 테란이 모를 리도 없는데.
“이번에 또요? 저번에도 건진 거 하나도 없었는데.”
“이번에는 공녀에 대한 소문이나 그런 것들 알아보라고 하기는 했는데…….”
머리를 박박 긁던 테란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 다시 알아보긴 하겠지만은 전과 달리 결과를 내놓을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같은 사람이 또 의뢰한 거예요?”
“아니, 다른 사람. 얼굴도 완전히 가리고 온 젊은 남자더라.”
“흐음.”
쓰고 있던 이름도 가명 같아 보였고.
“도대체 공녀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길래 이렇게 여기저기서 알아보라고 하는 건지.”
“저번에는 누가 알아보라고 했는데요?”
길드원의 물음에 테란이 혀를 쯧, 작게 찼다.
2년 전 맨 처음 이곳에 와서 공녀에 대해 조사해 보라고 했던 젊은 남자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제 오른팔인 길드원에게까지 숨길 건 아니었기에 그가 가볍게 대답했다.
“데미안 디니아 발슈타인.”
황태자의 사촌이자 제국의 북부를 맡고 있는 발슈타인 대공의 외아들이었다.
* * *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이 서늘하다.
전과 달리 더위를 머금은 바람이 아닌, 빨래가 잘 마를 것 같은 건조하고 시원한 바람이 이따금씩 마르는 입안과 집무실에서 서류를 잔뜩 건네주는 레르비앙의 옷이 살짝 도톰해진 걸 보고 가을이 성큼 다가왔음을 알 수 있었다.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집무실 안에서 듣기 좋게 울려 퍼졌다.
“전하, 펜이 움직이지 않은 지 제법 되었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서류를 보는 것처럼 보이나, 일에 전혀 집중하지 못하고 있는 페르포네에게 레르비앙이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평소와 달리 묘하게 넋이 나간 페르포네가 고개를 짧게 끄덕이고는 집중력을 발휘하려 했지만, 집중력은 쉽사리 돌아오지 않은 채였다.
며칠 전 새벽에 보았던 에이프릴의 미소가 눈앞에서 계속해서 어른거렸기 때문이다.
공녀가 자신이 알고 있는 에이프릴을 흉내 낸다고만 생각했지, 정말 본인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애꿎은 서류의 끝자락만 꾸깃하게 접은 페르포네가 태연함을 가장한 채 레르비앙에게 물었다.
“경, 만약, 경의 아내가 어느 날 갑자기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굴면 어떤 느낌일 것 같나?”
갑자기 들리는 엉뚱한 소리에 결재 서류를 챙기던 레르비앙이 멈칫했다.
옆에서 레르비앙을 보좌하던 시간 동안 이런 사적인 질문을 받은 적이 극히 드물었기에 살짝 들뜨기도 했으면서 동시에 아리송한 질문에 고개를 갸웃하다 되물었다.
“라이즈 공녀 말씀하시는 건가요?”
짐작도 못 할 거라고 예상한 반면에 바로 정답을 말하는 그에 고개를 번쩍 든 페르포네가 레르비앙을 똑바로 바라봤다.
“어, 어떻게 그걸.”
“아도니스 경도 전하처럼 비슷한 말을 하더라고요.”
“아도니스 경도?”
사인을 끝낸 페르포네의 종이를 조용히 들고 간 레르비앙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덧붙였다.
“표현이 좀 그렇지만, 철이 든 것처럼 보인다고 했나, 그렇게 엇비슷하게 말하더군요.”
“아니, 그런 것과는 조금 다른…….”
철이 든 게 아니라, 다시 한번 사람이 완전히 바뀐…….
하, 설명할 수 없는 상태에 페르포네가 마른세수를 했다. 자신이 느낀 걸 레르비앙이 이해하도록 설명하려면 저가 완전히 미친 인간이 될 게 분명했다.
내가 여태까지 지내왔던 에이프릴 공녀가 3년 전에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더니, 며칠 전에는 갑자기 내가 아는 진짜 에이프릴 공녀처럼 굴더라, 따위의 말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한숨을 내쉬고 있는 페르포네에 레르비앙이 가볍게 대꾸했다.
“제대로 말씀 안 해주실 거라면 일을 마저 하시죠.”
지금 페르포네가 해야 할 일이 말 그대로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상태였다.
평소에도 일이 많지만, 건국제가 얼마 남지 않은 시기이다 보니 한창 바쁠 시기였다.
황태자인 페르포네도 바쁘겠지만, 실무 담당자인 레르비앙은 말 그대로 몸이 열 개여도 부족한 상태였다.
“지금이면 검술대회 토너먼트전도 시작했겠군. 아도니스 경은 어떤가?”
“오늘 토너먼트전이라고 하더군요.”
레르비앙이 쓰고 있던 안경알을 슥슥 닦으면서 퍽 걱정된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아도니스 경이 우승해야 할 텐데요. 그래야 전하의 면도 서지 않겠습니까.”
보통 황실, 그것도 황족의 근위대원이라면 건국제의 검술대회에는 참석하지 않는 법이었다.
황족을 경호하는 일을 해야 하기에라는 이유도 있지만, 크게 두 가지의 이유에서인데, 전혀 반대되는 이유지만 묘하게 일맥상통하는 이유였다.
첫 번째는 황실 근위대원이 건국제에 참석한다면 능력 있는 신인검사의 발굴이 어려워진다는 거였고, 두 번째는 황실 근위대원씩이나 된 자가 검술대회에 참석해서 우승 타이틀을 따내지 못하면 그만큼 수치스러운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회 담당자에게 미리 언질을…….”
“아도니스 경이 원하지 않는 일일 텐데.”
묘하게 후련해진, 그리고 결심이 선 얼굴로 ‘검술대회에 참가하게 해주십시오.’라고 허락을 구하던 아도니스 베트리체를 떠올렸다.
대회 참가는 자유의지이니만큼 일일이 허락을 받지 않아도 되었건만…….
“아도니스 경이 참가한다 할 때 허락하지 마시지 그랬습니까.”
“내게 우승을 안겨준다고 단언하는데 어떻게 안 된다 하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