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
“억지는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일 거예요.”
에이프릴이 공작가로 다시 돌아오기 위한 큰 미끼로는 페르포네가 제격이었다.
“예전에는 먼저 구경하러 나가자고 권해주셨는데, 많이 바뀌셨네요.”
사춘기를 거세게 겪고 있는 동생을 보는 듯한 느낌에 입술을 삐죽 내밀 때였다.
펜대를 잡고 있던 페르포네의 눈동자가 일순 반짝였다. 신이 한 땀 한 땀 정성들여 만든 조각 같은 얼굴의 태양을 등진 채 날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
사르르 반달로 접히는 두 눈에 왠지 모르게 불길하다고 생각할 때, 굳게 닫혀 있던 페르포네의 분홍빛 입술이 달싹였다.
“외출하는 건 상관없지만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공녀.”
“네, 말해보세요.”
페르포네가 내밀 조건이란 게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크게 내가 싫어할 만한 조건은 없을 것이다.
내가 기겁을 하며 싫어할 조건이라면 바라크와 함께 움직이는 것 정도겠지만, 페르포네의 입에서 그런 말은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차분히 그의 뒷말을 기다릴 때였다.
“다른 한 사람 더 같이 하고 싶은데 괜찮겠죠?”
“상관은 없습니다만, 누구를요?”
“데미안 디니아 발슈타인.”
오늘따라 유독 많이 들었던 이름이 페르포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데미안 경을 포함한 세 사람이서요.”
데미안이라는 이름이 갑자기 나와서 그런지 에이프릴은 살짝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페르포네는 에이프릴의 그런 움직임을 아무 말 없이 그저 응시하기만 했다.
집무실 안에서 얼핏 비에 젖은 나무 향이 은은하게 맴도는 듯한 착각에 몸이, 그리고 정신이 과거로 돌아가는 듯했다.
“저한테 뭘 숨기려면 아직 5년은 이를 거예요, 전하.”
향기는 때때로 시간여행을 보내준다고 하더니, 그 말이 정말이었던 듯했다.
은은하게 나는 나무 향이, 그리고 에이프릴이 했던 말 한마디가 저를 아득한 과거로 보내주었으니까. 향수 어린 말 한마디와 어린 시절의 기억이 뒤섞였다.
로지안이 아버지의 곁에 있으면서 단 하루도 행복했던 적이 없었다. 어머니의 장례식 날에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몸을 맞대고 있던 아버지는 역겨웠고, 동시에 어린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었던 기억이었다.
지독한 장미향이 맴도는 황실에서 저가 숨 쉴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이가 에이프릴이었다.
“전하의 의견을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물끄러미 에이프릴을 바라보고 있을 때, 생각을 끝낸 에이프릴이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
데미안과 꽤 긴 시간 동안 연락 없이 지낸 데다, 그런 소문을 직접적으로 만든 사람이라고 하기엔 에이프릴은 굉장히 평온한 얼굴이었다.
마치 에이프릴과 데미안,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럼 데미안 경을 부르도록 하지.”
지난 3년간 겪어보지 못했던 감각과 생각들이 폭풍처럼 몰아치고 있었다.
저가 마냥 가짜라고만 생각해 왔던 에이프릴이 정말, 자신이 아는 ‘진짜’ 에이프릴처럼 굴 때마다 물어보고 싶었다.
당신은 대체 뭐냐고. 누구냐고. 정말로 내가 아는 ‘그’ 에이프릴이냐고.
그리고 그는 확신을 갖고 싶었다.
“두 사람이 전처럼 지내면 좋겠네요.”
눈앞의 여자가 어쩌면 저와 과거를 공유했던 에이프릴일지도 모른다는 확신.
그리고 동시에 궁금해졌다.
만약 에이프릴이 두 명이라면, 다른 한 사람이 에이프릴인 척 굴고 있었다면 공작가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왜 에이프릴은 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건지에 대해서 알아내고 싶어졌다.
페르포네가 자신의 속내를 감춘 채 두 눈을 부드럽게 휘었다.
* * *
[함부로 떠들어대는 것들이 있다면 굳이 참을 필요는 없다.]
통신구 역할을 하는 거울에 비치는 대니언, 아버지의 모습에 데미안이 작은 웃음을 흘렸다.
‘입양아’라는 말에 상처받는 건 아주 어렸을 때뿐이지 스물이 훌쩍 넘은 지금은 제게 상처도 아니었다.
종종 아버지가 이런 걱정을 할 때면, 도대체 그들의 눈에 저가 몇 살 난 아이로 보이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직도 자신이 어린아이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데미안, 언제든지 영지로 돌아와도 돼.]
“괜찮습니다. 걱정하실 만한 일은 없습니다.”
부모님의 걱정과 달리 미치지 않고서야 제 앞에서 그런 말을 꺼내는 인간도 없을 테고 말이다.
대니언의 옆에서 노란 민들레 같은 어머니의 머리카락이 일순 찰랑였다.
[아무 일도 없다면 다행이지만. 갑자기 수도로 돌아간 건 공녀 때문이니?]
[소문이 진짜이기라도 한 거냐.]
연달아 물어보는 어머니와 아버지에 데미안이 괜찮다는 듯 살짝 웃었다.
켈리스 영지에서 2년을 지내다가 라이즈 공녀가 수도로 돌아오면서 그 역시 수도로 돌아왔으니 다들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했다.
수도에서 생긴 발 없는 말이 북부에 계신 제 부모님께까지 가다니. 참 멀리도 갔다 싶은 생각이 절로 들었다.
“소문과는 상관없이 온 겁니다.”
에이프릴 때문에 수도로 돌아오긴 했으나, 자신이 에이프릴 공녀를 짝사랑하고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소문 때문에 온 것은 아니었다.
과거 정보길드에까지 의뢰했던 진짜 에이프릴 힐 라이즈를 찾기 위해서 다시 돌아온 것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가짜가 마음대로 떠들어대던 걸 정정하지 않았던 이유는, 정정하지 않아도 에이프릴인 척 연기하고 있는 그 여자가 혼자 마음 졸이면서 불안해하길 바랐으니까.
[전하는 보았고?]
“예.”
[오라버니는 아직까지 정신 못 차리고 있다니?]
결혼을 하면서 북부에서 20년을 넘게 사셨기 때문일까. 완전히 북부 사람이 다 되어버린 밀레나의 언사가 거칠기 짝이 없었다.
직접 뵙지는 못했지만, 황실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는 간간이 귀에 들어왔기에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밀레나의 연한 금색 눈동자에 걱정과 더불어 한심함이 물씬 느껴졌다.
[오라버니가 정신 차리려면 옆에 있는 로지안부터 쫓아내야 가능할 거다.]
로지안과 현 황제에 대한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이 없지. 걱정 가득한 부모님의 얼굴에 데미안이 옅은 미소를 살짝 지었다.
입양아이기에 수도의 귀족들은 대공 부부가 자신을 친자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황당한 말을 종종 하고는 했지만, 대공 부부에게 자신은 친자식이나 다를 바 없었다.
입양된 이후로 늘 커다란 애정을 주셨고, 따뜻한 걱정으로 자신을 지켜봐 주신 분들이었으니까.
[황실에서 쓸데없는 말을 지껄인다면 절대로 가만히 있지 말거라.]
“예, 아버지.”
입양아라고 쓸데없이 입을 놀리는 놈들이 있다면 주먹이라도 한 대 날려주라고 신신당부하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이제 어리다고 말할 수 없는 나이이건만 제 부모님들 눈에는 아직도 자신이 어린 모양이었다.
마구를 통해 부모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가벼운 노크와 함께 집무실의 문이 열렸다.
“무슨 일이지?”
“황실에서 사신을 보내왔습니다.”
“황실에서? 무슨 일로?”
황실에서 사람을 보낸다면 페르포네 한 사람뿐이지만, 무엇 때문에 보냈는지 도통 감이 잡히지가 않았다.
에이프릴로 인해 수도에 헛소문이 돌기 시작하면서 사촌인 페르포네와의 접점도 끝이 났기 때문이었다.
“급히 황실로 들어오시라 명하셨습니다.”
[황실에서 찾는다면 가봐야지. 데미안, 나중에 연락하렴.]
사용인의 말 뒤로 마구 속 어머니의 목소리가 다정하게 들려왔다.
* * *
빠른 걸음으로 황실 복도를 걸으면서 짤막하게 생각했다.
페르포네가 저를 부를 만한 이유가 달리 있나? 몇 번을 떠올려 봤지만 딱히 생각나는 부분은 없었다.
그나마 접점이라고 할 수 있는 에이프릴과도 인연이 끝났으니 어쩌면 당연한 거였고.
아니면 저번에 만나서 했던 말에 뭔가 눈치채기라도 했나? 눈치챘으면 좋겠는데.
데미안은 먼저 말해주지는 않을지언정, 페르포네가 이상함을 느끼고 먼저 물어본다면 솔직하게 말할 요량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가짜가 진짜인 체, 에이프릴이 형성해 왔던 모든 것들을 앗아가는 게 싫었으니까.
황태자궁의 집무실 앞에 서자 레르비앙 경이 자신이 도착했음을 알렸다.
“전하, 발슈타인 경이 도착했습니다.”
굳게 닫혀 있던 황금색 문이 부드럽게 열리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화려한 금빛의 머리카락이 아닌 아래로 차분히 묶은 연한 베이지색의 머리카락이었다.
스르륵 따라온 청회색의 시선이 제게 꽂히는 순간, 데미안의 얼굴 위로 불편함이 스쳐 지나갔다.
‘도대체 네가 누구길래 에이프릴 행세를 하고 있냐, 이 말이다.’
일련의 사건이 있은 뒤 근 1년 만의 만남이었다.
* * *
“전하, 발슈타인 경이 도착했습니다.”
레르비앙 경의 목소리와 함께 열리는 문에서 보이는 건 밤보다 짙은 흑빛의 머리카락이었다.
기억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검은색의 머리카락과 더불어 포도주를 떠올리게 만드는 적색의 눈동자에 내 얼굴이 그대로 박혔다.
찰나의 순간, 그의 얼굴 위로 나타난 건 불편함과 불쾌감이었다. 그리고 그 감정이 내게 향하고 있다는 것쯤은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내가 없는 시간 동안 별의별 일들이 많았었나 보네.
티타임에서 귀족 영애들이 해주었던 말이 일순 떠올랐다. 수도에 있으면서 공작저로 단 한 번도 방문하지 않은 걸 보아 무슨 일이 있었다고 짐작은 했지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추리는커녕 예측도 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함께 보는 건 오랜만인 거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