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그리고 이 자리에서 웃고 있는 건 페르포네 단 한 사람뿐이었다. 레르비앙 경도 숨이 막히는 얼굴을 하고 있는 판에 내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침묵을 지켰다.
쓸데없는 말을 해서 트집이 잡히는 것보다야 아무 말도 안 해서 답답한 게 훨씬 나았으니까.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딱 한 번 눈이 마주친 걸 끝으로 날 향해 시선을 한 번도 주지 않는 데미안의 행동에 순식간에 머쓱해졌다.
아카데미 시절엔 절친한 친우라고 말을 할 수 있는 사이였는데, 지금 집무실에서 맴도는 분위기는 남보다 못하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전처럼 셋이 함께 있던 시절이 떠올라서요.”
페르포네가 더할 나위 없이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악의나 꿍꿍이 같은 건 눈곱만큼도 없는, 사르르 접히는 눈이 어린 시절 내가 알고 있던 페르포네의 미소와 똑같았다.
그런데 지금은 묘하게 옛날처럼 마냥 순수하게 느껴지는 미소는 아니었지만.
“이렇게 세 사람이 함께 있으면 수도에 떠도는 쓸데없는 소문도 가라앉을 테니까요.”
“…….”
“국혼이 진행되면 종종 만남을 가지게 될 텐데, 지금 떠도는 소문을 정리하지 않으면 후에 곤란해질 게 뻔하기도 하고요.”
1년 뒤에 파혼할 것이라 이미 말을 맞춰뒀는데도 불구하고 페르포네의 거짓말은 조금의 버벅거림도 없이 유려하게 흘러나왔다.
따로 마음에 품은 사람이 있다고 말했으면서 어쩜 이렇게 거짓말을 잘 하는 건지. 헛웃음이 일순 나오려고 할 때, 데미안의 미간이 살풋 찡그러졌다.
“공녀와 결혼하시는 겁니까?”
영 못마땅한 기색이었다. 데미안이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건지 모르겠는데, 페르포네만은 그런 반응이 이해 간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쓸데없는 소문 때문에 절 부르신 겁니까?”
“소문이 종식되는 게 데미안 경도 좋잖아요. 사촌이 내 약혼녀를 좋아한다는 추문을 남겨두고 싶지 않으니까요.”
‘추문’이라는 단어가 페르포네의 입에서 나오자마자 두 쌍의 눈동자가 내게 콕 박혔다.
페르포네의 말에 내가 주먹을 꾹 쥐었다.
에이프릴은 내가 만들어왔던, 내가 형성해 왔던 모든 것들을 지난 3년 동안 처참하게 부숴온 모양이었다.
페르포네와의 관계도, 티타임의 다른 귀족 영애들과의 관계도, 그리고 데미안과의 관계도. 어느 것 하나 멀쩡하지 않고 죄다 엉망이 되어버린 상태였다.
도대체 무슨 정신머리로 행동한 건지.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내가 전하께 억지를 부른 거야, 데미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내가 그의 이름을 나직하게 불렀다. 내가 없던 시간 동안 두 사람이 서로를 어떻게 불렀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를 데미안이라고 부르고 싶었다.
아카데미 시절처럼 친숙하게 부르자 페르포네를 향했던 적색의 눈동자가 내게 꽂혔다.
“오늘 하루만 내 억지에 응해줬으면 좋겠어.”
데미안의 눈가가 일순 찌푸려졌다.
데미안의 이해 못 할 시선이 다시 페르포네에게로 향했다.
“고작 같이 한 번 움직였다고 소문이 종식될 거라 생각하십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단 나을 테니까요.”
페르포네가 갓 피어난 봄꽃처럼 산뜻하게 웃었다.
내가 부탁했더라면 거절했겠지만, 황태자인 페르포네가 나서서 움직이다 보니 칼같이 잘라내지는 못하는 모양새였다.
이 자리에 데미안을 데리고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지만, 상관없었다. 수도 사람들 눈에 공녀와 황태자와의 사이가 다시금 좋아졌다는 이야기만 돌면 되었으니까.
“베트리체 경도 없는 지금, 발슈타인 경이 내 호위를 맡아주면 좋겠다 싶기도 하고.”
황태자가 호위라는 말도 꺼내고 있으니 쉽게 거절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확실히 황실의 내로라하는 기사들을 여럿 끌고 나가는 것보다 데미안 한 사람이 있는 게 더 나을 테니까.
다만, 데미안의 검술 실력은 호위와는 걸맞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보통 호위라고 한다면 사람을 지키는 의미의 검술이겠지만, 북부를 쭉 지켜왔던 발슈타인 가의 검술은 지키는 검술보단 누군가를 죽이는 검술에 가까웠으니까.
데미안이 제국 내에서 유일무이한 검술 실력을 갖고 있지만, 기사들 사이에서 겉도는 이유가 바로 이에 있었다.
“함께할 거죠, 발슈타인 경?”
침묵을 지속시키다 겨우 내뱉은 한숨은 부탁에 응해준다는 말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럼 준비하는 동안 응접실에서 기다려요.”
페르포네가 집무실을 나서면서 안으로 들어온 시종 하나가 나와 데미안을 근처의 응접실로 안내했다.
사실 응접실에서 기다릴 만큼 오래 기다릴 것 같지는 않았지만, 나나 데미안이 황실 복도에서 멀거니 페르포네를 기다리고 있는 꼴도 볼품없게 보일 테니까.
집무실에서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응접실의 안으로 들어가자, 이미 준비되어 있는 디저트와 티가 테이블에 올려진 상태였다. 준비도 제법 철저하네.
“전하께서 준비되시면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문이 탁 하고 닫히자, 일순 걱정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수도를 떠도는 추문이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지금 황실 응접실 안에 나와 데미안 둘만 남아 있다는 이 사실이 수도에 돌고 있는 추문에 힘을 실어주는 게 아닐까란 생각 말이다.
……괜히 불안한데. 응접실 소파에 편하게 앉지도 못하고 서서 닫힌 문을 바라보는 나와는 달리 데미안은 소파에 편히 앉고는 태연자약하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내가 유별난 건가.
“이렇게 둘만 보는 건 그날 이후로 처음이네.”
“그러게.”
그날이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수도로 돌아온 뒤 데미안과 만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던 데다, 내가 에이프릴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의 시그널을 준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얼핏 포도주로 착각이 되는 짙은 적색의 눈동자가 나를 관통했다. 잘 벼려진 칼처럼 금방이라도 날 벨 것 같은 서늘한 눈동자에 나도 모르게 치맛자락을 꾹 잡았다.
데미안의 눈동자에서 느껴지는 건 하나였다.
노골적인 적대감.
아카데미 시절, 그를 발슈타인 가의 입양아라고 배척하는 귀족들 앞에서도 당당함을 유지했던 게 데미안이었던 걸 떠올렸다.
자신을 배척하던 사람들 앞에서도 감정을 드러낸 적 없던 그가 내게 이렇게 적대감을 드러내니 절로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데미안과의 사이가 틀어진 걸지도 모른다고 추측하긴 했으나, 틀어졌다는 표현은 아주 귀여운 축에 속했다.
“언제까지 그러고 살 셈이지?”
공격적인 언사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애꿎은 볼 안쪽만을 씹었다.
둘도 없는 친우 사이가 엉망이 된 걸 보아 에이프릴도 참 어지간한 인물이었다.
이렇게까지 관계를 전부 망치기는 어려운 일이었을 텐데.
분명 기분 좋게 선선한 날씨이건만, 북부의 살얼음 같은 바람이 느껴지는 착각이 들 때, 자리에서 일어난 데미안이 내게 성큼 다가왔다.
나보다 머리가 하나 정도 더 큰 이의 모습이 퍽 위협적이었던지라, 나는 자연스럽게 걸음을 한 걸음 뒤로 물렸다.
황실의 응접실은 넓디 너른 곳이었지만, 막상 벗어나거나 도망치기에는 좁은 곳이었다.
뒷걸음질 몇 번에 등이 벽에 닿자, 굳게 닫혀 있던 데미안의 입술이 느리게 열렸다.
“아직까지도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네.”
“하.”
조롱 섞인 웃음이 머리 위로 떨어졌다.
“언제까지 에이프릴인 척 연기할 셈이냐고 묻는 거다.”
안전장치 없이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진 것처럼 심장이 철렁거리는 걸 느껴야만 했다.
공작가에서 나를 내보내려고 했을 때조차도 이런 느낌을 가진 적은 없었는데.
살짝 숙이고 있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데미안이 눈치챘던 거다. 에이프릴이 내가 아님을. 우습게도 마냥 불안하지만은 않았다.
에이프릴과 나를 구분했던 사람이 있었구나, 완전히 잊힌 건 아니었구나란 기쁨에 이번에는 가슴이 울렁거리기까지 했다.
에이프릴과 데미안의 사이가 틀어진 건,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리고 데미안이 가짜를 알아봤다는 사실을 에이프릴은 말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말하지 않은 걸까? 페르포네에게 파혼하자는 이야기를 들은 상태였다면 더 불안했을 텐데.
“네가…….”
데미안의 목소리가 무겁다.
“네가 어디서 왔든, 귀족들 사이에서 어떤 짓을 벌이든, 나에 대한 말을 지어 내든 간에 관심없어.”
답답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찡그려지는 미간을 검지로 꾹 누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종종 내 앞에서 인상을 찌푸릴 때면 종종 미간을 누르며 억지로 폈던 기억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데미안의 붉은 눈동자에 내 얼굴이 그대로 담아졌지만, 그가 바라보고 있는 건 내가 아닌 것 같았다.
“진짜 에이프릴이 어디 있는지만 말해.”
‘진짜’ 에이프릴이라. 일순 붕 뜨던 마음이 순식간에 식어지는 순간이었다.
데미안은 내가 진짜 에이프릴이라고 생각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