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잠시 후 마차가 덜그럭거리면서 움직이고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붉은 눈동자가 서늘한 빛을 띠며 나를 향했다.
“그래서.”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먼저 말문을 연 사람은 데미안이었다.
하긴, 마음 급할 사람은 데미안이지 나는 아니었으니까.
“진짜 에이프릴은 어디에 있는 거지?”
“진짜 에이프릴이라.”
그 말이 조금 신기하고, 동시에 이상했다.
라이즈 공작가의 모든 사람들에게 나는 가짜인데, 데미안에게는 진짜라는 게 영 낯설게만 느껴졌다.
페르포네와 마찬가지로 날 구분하는구나.
“넌 진짜 에이프릴이라고 말하지만…….”
데미안에게는 이리나 데빈이 ‘진짜’이겠지만 나는 어쨌거나 대역에 지나지 않는 가짜였다.
“사실 네가 찾는 진짜가 가짜라면 어쩌려고 그러는지 모르겠네.”
“…….”
“그 애를 진짜라고 부를 사람은 결국 데미안, 너 혼자일 테니까.”
나는 웃음기를 거두고 천천히 한마디씩 내뱉었다.
얼굴만 딸과 닮았을 뿐, 결국 핏줄도 이어지지 않은 내가, 모두가 인정하는 ‘진짜 라이즈 공작가의 딸’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네가 찾는 그 애가 결국 가짜여서 숨은 거라면 어쩌려고.”
모든 게 마무리되고, 끝이 난다면 결국 가짜인 나도 숨을 것이다.
나는 진짜 라이즈 공작가의 딸이 될 수 없고, 딸이 되고 싶은 마음도 없으니까.
“별 쓸데없는 소리를 다 듣겠군.”
그가 불쾌하다는 듯 노골적으로 인상을 구겼다.
타이밍 좋게 발슈타인 가 앞에 도착한 마차에 그가 문을 벌컥 열며 대답했다.
“사라진 그 애가 라이즈 공작가의 핏줄이든 아니든 그런 건 내게 상관없다. 중요하지도 않고.”
그렇다면 왜 그 애를, 찾는 나를 진짜라고 부르는 거냐 물어보기 위해 입술을 달싹이려던 찰나였다.
“나한테는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낸 그 애가 진짜이니까.”
품고 있던 의문을 단박에 해결해 준 아주 명쾌한 한마디였다.
해가 동쪽에서 떠 서쪽으로 지는 만고불변의 진리처럼, 그 말은 데미안에게 있어서 아주 당연한 말이었다.
이미 모습을 감춰 버린 진짜 에이프릴의 이름이라도 알았더라면 이름을 불렀겠지만, 그럴 수가 없어 ‘진짜 에이프릴’이라고 칭하는 것뿐, 이름을 알고 있었다면 진즉 가짜 에이프릴을 놔둔 채 그 아이를 찾았을 것이다.
“그렇군.”
‘내가 진짜라고.’
맨 처음 정체에 대해 물어봤을 때처럼 감정적으로 굴 줄 알았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고저 없이, 담담한 목소리로 수긍하는 낯선 모습에 데미안이 슬쩍 인상을 찡그렸다.
마차 사고를 겪은 뒤로 심경의 변화라도 생긴 건가.
차분해진 모습은 지난 3년간 봐왔던 모습이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그가 잘 알고 있는, 진짜 에이프릴과 가까운 모습…….
미친 생각이군.
“들을 말은 전부 들었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발슈타인 경.”
평이한 어조를 뒤로한 채 닫히는 마차 문 사이로 보이는 건.
“……뭐야?”
웃고 있는 에이프릴의 모습이었다.
* * *
“요즘 어째 산짐승들 잡아 오는 수가 줄었어?”
가죽 가게를 하는 사장의 말에 알리샤가 들고 왔던 멧돼지를 쿵! 내려놓았다.
“이리나는 마을로 영영 안 돌아온대?”
마을의 베이커리 가게에서 일을 하던 이리나가 어느 순간부터 마을에서 보이지 않은 지도 오래였다.
“이제는 혼자 사니까 잡아 오는 짐승 수가 적죠.”
다니엘과 이리나와 함께 지낼 때는 그만큼의 생활비가 들었기에 그랬다 치지만, 지금은 산속에 있는 작은 오두막집에서 생활하는 사람은 알리샤 하나뿐이었으니 그리 많은 생활비가 필요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이리나가 수도로 간 뒤로는 서신과 함께 꼬박꼬박 생활비를 보내주고 있었기에 더욱 돈을 벌 필요는 없었다.
물론 그 돈을 쓰고 있지는 않았지만.
언젠가 이리나가 다우스 제국의 국경을 벗어나 먼 곳으로 떠나려고 할 때 줄 것이다.
이리나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수인인 자신을 가족으로 생각해 주고 있듯, 알리샤 역시 이리나를 동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수도로 갔다고? 좋은 곳에 일자리라도 생긴 거야?”
이런 시골 마을에서 수도로 갔다는 건 대체로 희소식이었기에, 가게 사장이 제 일처럼 기뻐하며 박수를 쳤다.
좋은 곳에 취직이려나. 어떻게 보면, 그리고 남들이 보기에는 ‘좋은 일자리’가 생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공작가로 돌아간 것이니까.
그리고 정말 축하하는 말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이이기에 가능한 말이었다. 그저 빈말이라도 고맙다는 말이 나오지 않을 때였다.
“안에 계십니까?”
나무문을 똑똑, 하고 두드리는 소리에 가게 안에 있던 두 쌍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누구십니까?”
가게 주인이 고개를 갸웃하면서 손님 두 사람을 바라봤다.
행색을 보니 아무리 봐도 물건을 사러 온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말끔한 차림새나 세련된 말씨를 보아 수도 사람으로 보였다.
가게 주인이 이야기를 하겠거니 싶어 알리샤는 계산대에 있는 돈 꾸러미를 챙기고 나서려 했다.
“사람을 한 명 찾고 있는데, 협조 부탁드립니다.”
협조라는 알리샤의 발목을 잡는 한마디에 그녀가 걸음을 멈추고는 가게 안으로 들어온 사람을 바라봤다.
도대체 누구지? 신분이나 정체에 대해서 쉽게 알 수 없는 모습이었다.
수도 사람인 것 같긴 한데. 타지인을 경계하는 마을답게 가게 안에 있는 두 사람 모두 낯선 외지인을 바짝 경계한 채 바라봤다.
“어디서 온 분이시기에 누구를…….”
“혹시 마을에 다니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없습니까?”
정체를 물어보는 가게 사장의 말을 싹둑 잘라낸 상대의 말에 알리샤가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굳은 얼굴로 상대를 바라봤다.
다니엘. 이미 죽은 지 몇 년이나 된 사람의 이름이 외지인에게서 나올 리가 없었다.
고작 그 한마디뿐이었을 텐데 알리샤는 눈앞의 존재가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단박에 알 수가 있었다. 바로 신전에서 온 사람들이겠지.
알리샤는 이 상태에서 침착함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들킬 염려도 없을 테니까.
“신전에서 나왔소.”
이내 신분증을 보여주는 상대들에 가게 사장의 태도가 퍽 공손해졌다.
“아이고, 마을에 다니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지금 당장만 해도 마을에 다니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청년이 하나 있고 아이가 둘이었다.
그만큼 흔한 이름이니만큼 찾을 수 없다는 뜻으로 가게 사장이 손을 휙휙 내저을 때 한 사내가 말을 덧붙였다.
“제대로 협조하는 게 좋을 겁니다.”
고저가 없는 살벌한 목소리에 가죽 가게 사장이 주춤할 때, 다른 사내가 말을 이었다.
“우리가 찾는 다니엘은 은백색의 머리카락에 푸른색의 눈동자를 가진 사내요.”
다니엘이다. 가게 사장은 여전히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모르는 게 당연했다. 다니엘이 이 마을의 산 뒤에 살기 시작한 뒤로, 마을로 내려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으니까. 아내였던 버니스는 죽은 지 오래였으니 찾지도 않을 것이다.
“거기, 넌 들어본 적 없나?”
질문이 알리샤에게로 돌아왔다.
“……모르겠습니다.”
잘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겨우겨우 떼어내며 알리샤가 내뱉은 한마디였다.
성에 차지 않는 대답과 반응에 가게로 들이닥친 남자 둘이 짧게 혀를 찼다.
은백색 머리카락에 푸른 눈동자면 좀체 보기 힘든 외모이니만큼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데빈이라는 성을 쓰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이 마을에 데빈이라는 성을 쓰는 자는 없나?”
다른 의미로 휩싸이는 정적에 알리샤가 볼 안쪽을 꾹 씹었다.
동시에 알리샤의 시선이 가죽 가게 사장에게로 향했다.
제발, 제발 눈치껏 입을 다물기를! 모르는 척하기를. 이리나라는 이름을 내뱉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을 때, 그런 그녀의 속도 모르고 가죽 가게 사장이 가볍게 대꾸했다.
“이리나라는 아이가 있긴 한데.”
“있다고?”
망할! 욕지거리를 작게 중얼거린 알리샤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마을 사람들이 가죽 가게 사장이 눈치가 없다고 수군거리는 데는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어디에 살고 있지?”
상대의 물음에 사장의 시선이 알리샤에게로 향했다.
“알리샤와 같이 살았었습니다. 지금은 수도에 갔지만.”
“수도에 갔다고?”
“예. 뭐 자세한 건 본인에게 물어보시죠.”
“…….”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으니, 안내 좀 부탁하지.”
부탁이라는 말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명령조의 말에 그녀가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 오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