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인 것이 이리나가 지금은 마을에는 없다는 점이었다.
수도에 갔다는 것, 그리고 공작가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게 마음에 들었던 순간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지금만큼은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또 다행인 점은 다니엘이 죽었다는 것.
산속 오두막에 가봤자 다니엘의 흔적은 많더라도 이리나의 흔적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물론 집 안을 둘러봄으로써 이리나가 다니엘의 딸이라는 걸 바로 눈치채겠지만 말이다.
“산속에 살고 있었던 모양이지?”
“예.”
신전에서 나온 두 사람이 조용히 알리샤의 뒤를 따랐다.
공작가에 있으니 괜찮은 걸 알아도, 혹시라도 이리나의 존재에 대해 눈치챌까 두려웠다.
혹여나 이제는 다니엘이 아닌 이리나를 찾는 건가 싶어 무섭기도 했다.
버니스가 돈을 벌기 위해서 오두막집을 비울 때마다 다니엘이 죽기 전 알리샤에게 유언처럼 남겼던 말은 이리나를 지켜달라고 했던 한마디였기 때문이다.
한때나마 다니엘이 이곳 오두막에서 지냈다는 사실을 들키는 건 상관없었다.
그들이 다니엘을 찾고 싶어 해도 이미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이미 죽은 사람을 신전으로 억지로 끌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다니엘과 함께 지낸 이였다는 것은 알려져도 상관없었다.
알리샤가 신경 쓰이는 건 단 한 가지였다. 신전에서 이리나의 존재를 알게 되는 것.
다니엘의 핏줄에, 다니엘의 성력을 승계받은 자식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신전이 보일 모습은 단 하나였다.
다니엘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리나를 신전에 가두어 착취하는 것.
성력이 승계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이리나는 죽은 다니엘보다 더 비참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걸 누구보다 원하지 않았기에 알리샤의 걸음은 오두막이 아닌 다른 곳으로 향하였다.
“제대로 가고 있는 게 맞……. 지, 짐승?”
그리고 사내 둘을 따돌리고 빠르게 오두막으로 향하려면 인간의 모습인 것보다, 늑대의 모습인 게 편했기에 알리샤의 모습이 점차 바뀌었다.
올리브색이던 눈동자색이 황금처럼 바뀌고, 정말 짐승처럼 온몸에 털이 나고, 사나운 맹수의 이빨이 드러나기 시작하자 신전 성기사 둘은 다급히 허리춤에 있는 칼집에 손을 갖다 댔다.
“수, 수인……!”
하지만 알리샤의 목적은 이곳에서 성기사 둘과 싸우는 게 아니었다.
어차피 지금 당장 싸운다고 한들, 죽인다고 한들 동료의 뒤를 밟은 다른 성기사가 다시 이 마을로 올 게 분명했다.
빠르게 판단을 내린 알리샤가 한 행동은 두 사람에게 이빨과 발톱을 드러내며 공격성을 띠는 게 아닌, 몸을 돌려 빠르게 도망치는 것이었다.
뒤에서 거기 서라는 외침과 더불어 쫓아오는 기색이 느껴지자, 더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망할!’
집에 이리나와 관련된 게 얼마나 있지?
빠르게 지나치는 나무숲 사이로 보이는 익숙한 오두막의 모습에 알리샤가 멈추고는 빠르게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정돈되지 않은 숨을 헐떡이며 집 안으로 들어가자, 집 안 곳곳에는 다니엘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었다.
다니엘의 몇 안 되는 유품과 의복, 그리고 한때 버니스와 다니엘, 알리샤, 그리고 어린 시절의 이리나가 함께 찍었던 사진까지.
커다란 가방에 이리나의 물건들을 쑤셔 넣기 시작했다.
함께 찍었던 가족사진과 더불어 한때 여기서 지낼 때 입었던 옷들까지 말이다.
일평생을 이 산속에서 지낸 건 아니었기 때문에 그리 많은 물품이 있진 않았다.
이리나가 제게 보내주었던 서신들을 마지막으로 전부 챙기고, 돈 꾸러미 역시 마저 챙긴 알리샤가 빠르게 산속의 더 깊숙한 곳으로 몸을 숨겼다.
이리나의 존재가 들키지는 않아야 할 텐데. 그나마 지금 공작가의 밑에서 딸 노릇을 하고 있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언제 버려질지 몰라도 당장은 그녀의 신변에 큰 위협은 없을 테니까.
“공작가에 있어서 다행이라고 여길 줄이야.”
그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놈들이 이렇게 도움 되는 날이 올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다. 게다가, 이리나의 얼굴을 안다고 해도 눈치채지는 못할 것이다.
연베이지색의 머리카락과 푸른 눈동자를 가진 제국민들은 제법 많을 테니까.
다만, 제발 이 제국 안에서 이리나라는 이름이 흔하기만을 기도했다.
마을로 내려갈 수는 없으니 산속으로 더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수풀 사이에서 환청처럼 저를 찾는 사내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하아.”
어떻게 해서든 함께 지내왔던 집을 지키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이 그녀를 미치게 만들었다.
이미 다들 도망간 집이라는 걸 알게 되면 그리 오래 있지는 않겠지.
산을 넘어 어디 안전한 곳에 도착하고 나면 이리나에게 연락하면 될 것이다.
“제발.”
이리나의 존재만은 들키지 않기를.
* * *
―불화설 종식?
―한때나마 수도를 떠들썩하게 했던 불화설이 거짓말인 것처럼 두 사람은 다정한 모습을 뽐내고 있었다.
퍽!
로지안이 던진 수도 신문이 벽에 부딪친 뒤 아래로 툭 떨어졌다.
한껏 예민한 로지안의 모습에 타미타르테가 마른 숨을 삼켰다.
하긴, 공작가와 황태자가 파혼하기만을 원하는 사람이었는데, 불화설이 아닌 데이트 기사를 보았으니 속이 탈 만도 했다.
곁에 있던 하녀가 불안에 떠는 모습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걱정하는 눈치였다. 타미타르테가 눈짓으로 이만 나가 보라는 신호를 보내자 머뭇거리던 하녀가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입맛대로 굴 만한 귀족가와 페르포네를 붙이고 싶어도 여인에게는 관심도 없는 모습에 애간장만 태우던 로지안이었다.
“하, 그래서 다니엘은?”
“아직 못 찾았습니다.”
“도대체가!”
로지안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궁 안에 크게 울려 퍼졌다.
“찾으라고 사람을 보낸 지가 자그마치 20년인데 머리카락 한 올도 못 찾아!”
버니스와 다니엘을 이 잡듯이 잡아내려고 했던 게 벌써 20년째였다. 그나마 버니스의 존재는 찾았지만, 로지안이 그리도 원하던 다니엘의 존재는 찾지 못했다.
“그때 그 계집앨 죽이는 게 아니었는데.”
노골적으로 혀를 차는 로지안에 타미타르테가 조소를 흘렸다.
그렇게 버니스만은 죽이지 말아달라고 애원했던 제 말을 무시하고, 제 성질을 못 이겨 버니스를 죽인 게 로지안이었다.
버니스도 버니스지. 그렇게 모질게 고문당했는데, 다니엘에 대해 한마디도 안 한 게 여간 독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버니스가 말하지 못했던 이유는…….
타미타르테가 혀로 마른 입술을 훑었다. 다니엘을 찾아내면 함께 있을 딸의 존재까지 들키는 꼴이다 보니 입을 다문 거겠지만.
죽으러 가는 길에도 끝까지 웃던 버니스를 떠올렸다.
비단 로지안이 화난 건 다니엘과 버니스의 존재 때문만은 아니었다.
불화설 종식이라는 기사. 그 기사도 그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었다.
종식이라는 단어 뒤에는 물음표가 붙어 있으니 오히려 아직은 괜찮다며 안도할 만한 것이었겠지.
하나, 로지안이 직접 페르포네와 함께 있던 에이프릴을 보았으니 이 기사가 단순히 물음표로 끝날 일은 아니라고 생각될 터였다.
페르포네와 함께 있는 이가 진짜 에이프릴이 아닌 게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로지안의 화풀이를 보고 있던 타미타르테가 입술을 달싹였다.
“죽은 게 아닐까요?”
신경질적으로 행동하던 로지안의 몸이 일순 멈추었다.
마치 시간이라도 정지된 것처럼 굳었던 로지안이 일순 인상을 찡그리며 그를 바라봤다.
연녹색의, 여름날의 나뭇잎 같은 눈동자를 타미타르테가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뭐?”
오싹함이 느껴질 정도로 서늘한 표정에 타미타르테가 잠깐 침묵을 유지했다.
로지안이 다니엘을 찾는 이유는 불로불사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2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지 않았습니까. 제국을 뒤질 만큼 뒤졌는데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는 건, 그자가 죽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다니엘은 죽었다. 그건 이리나의 입을 통해서 직접 들은 말이었으니까.
동시에 타미타르테는 어서 빨리 로지안이 다니엘에 대해 포기하기만을 바랐다.
혹시라도 다니엘의 존재를 뒤쫓다 이리나의 존재에 대해 알아차리는 게 아닐까 싶어 걱정되었다.
“다니엘이 버니스 데빈과 도망친 지 20년이 훌쩍 넘은 데다, 버니스가 경제활동을 해왔지 않습니까.”
“그래서?”
더 말해보라는 듯 턱짓을 하는 로지안에 그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말마따나 버니스 데빈이 죽은 시점에서 다니엘이 일을 하면서 생활하는 게 가능했을까요?”
“…….”
“일평생을 신전에서 지냈던 사람이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거라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다니엘이 돈을 벌기 위해 움직인다면 성력을 사용하는 것뿐인데, 신관도 아닌 이가 성력을 쓰면서 20년 넘게 몸을 숨겼다?
다니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히려 성력을 썼더라면 다니엘을 더 빨리 찾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죽었다고 보는 게 무방하죠.”
그러니 이제 그만 다니엘의 행방을 뒤쫓기를 바랐다.